[전문가 분석] 전시납북자 문제 해결에 국제사회가 하나돼야
[전문가 분석] 전시납북자 문제 해결에 국제사회가 하나돼야
  •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전 대한민국 인권대사
  • 승인 2024.09.0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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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무력 남침을 통해 전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했다. 한국전쟁(the Korean War of 1950)이 그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남한의 수많은 지식인과 정치인, 공무원(판·검사·경찰 및 소방 공무원 등)과 더불어 북한의 입장에서 소위‘적대세력’인 우익인사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ROK)을 파괴·약화시키는 동시에,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자 북한군은 이북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우리 노무자, 의료인, 기능 인력, 농민, 학생과 아동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납치해 북한으로 데려갔다. 이 같은 행위에 대해 2014년 2월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on Human Rights in the DPRK)가 발표한 『북한인권보고서(COI Report)』에서 한국전쟁 당시에 이루어진 한국인 납치 및 강제실종(enforced disappea-rance)을 ‘반인도범죄(crime against humanity)’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한 납치 및 강제실종이 북한 당국이 정책적으로 실시한 비인도적 행위로서‘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체계적인 공격의 일부’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 6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는 전시납북자(South Korean abductees in wartime: SKAIW)의 총 숫자가 10만 명을 헤아린다고 파악한바 있다. 이 중 19세 이하의 학생 및 아동은 10,462명에 달한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2023년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아동 6천여 명을 강제이송한 것과 관련해‘전쟁범죄(war crime)’라고 간주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마리야 리보바-벨로바 대통령실 아동인권 담당위원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반인륜적이고 광범위한 민간인 납치와 아동 강제이주가 이미 한국전쟁에서 발생했던 것이다(다만, 최근 한국을 방문한 우크라이나 시민단체 대표단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한 지 2년 3개월이 지난 금년 5월말 현재 러시아로 강제이송된 우크라이나 아동은 2만 여명에 이른다고 폭로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전시 아동의 강제이송 규모로는 우크라이나 케이스가 역대급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억류자들 위해’ 물망초 배지 단 우크라 시민사회 리더들”, 『조선일보』, 2024년 5월 28일 참조).

1953년 7월 27일 한국휴전협정(The Korean Armistice Agreement)이 체결됐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서 3년간 계속되었던 포성(砲聲)은 일단 멈추었다. 이 휴전협정의 제3조 제59항에서는‘실향사민(Displaced Civilians)’의 귀향을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은 이런 사람들의 존재를 부정하며, ‘의거(自進) 입북자’들만 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그 결과 송환협상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하였고, 남쪽 가족들의 바람대로 돌아온 전시납북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후 지금까지 71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는 전시납북 사건은 한국전쟁이 낳은 가장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상처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들을 ‘역사의 조난자’ 내지 ‘분단 희생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지만, 시간이 가면서 기대는 서서히 사라졌다. 돌아오지 못한 전시납북자들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 후 북한의 오지(奧地)에 위치한 탄광이나 광산에 무리(집단) 배치되어 그곳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광산의 선전비서나 공장 노동자로 활동한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다. 

결국 납북 피해자들은 북한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전시납북자와 그 자녀들은 이른바 ‘남조선 출신’으로 불렸다. 좋은 성분과 토대를 가진 북한 주민들과는 철저히 구별됐다. 그에 따라 거주지 이전, 직업 선택, 노동당 입당, 상급학교 진학 등 생활 전반에서 차별과 감시를 받는 등 극심한 인권 침해를 받았다

전시납북자들 중 귀환자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있지 않다. 무려 10만 여명에 달하는 전시납북자 중 지금까지 자력(自力)으로 귀환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지난 시기 한국전쟁 미귀환 국군포로 80명과 전후납북자 9명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귀환한 것과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다수의 전시납북자들이 피랍 초기 북한 측에 협조하지 않아 살해되었고, 전쟁 중 인민군에 강제편입 또는 전시 근로 동원 등 북한에 의해 정책적으로 활용되는 과정에서 희생당했다. 

둘째, 1995-1996년 연이은 수해(水害) 및 생산량 급감으로 식량난이 악화됐을 때 이미 대부분 고령의 나이였고 먹고 살기가 힘든 형편이었다. 수많은 아사자 발생의 여파로 여러 가지 전염병이 창궐했는데, 이 때 납북 피해자들이 역병(疫病)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사망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셋째, 전시납북자들은 재북(在北) 가족들에게 자신이 전쟁 시기에 강제로 북한에 끌려 왔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납북 피해자들은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어느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1953년 휴전협정 조인식 현장
1953년 휴전협정 조인식 현장

전시납북자들은 자기 의사에 반해 피랍(被拉)되었기에 스스로 고향을 등진 ‘일반 이산가족’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원상회복, 즉 본래 살던 곳으로 즉각 귀환하도록 해야 마땅하다. 필요하다면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등 공신력 있는 국제기관의 개입과 전시납북자들의 ‘자유의사’ 내지 귀향 희망 여부를 확인해도 좋다. 그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국제인권법 및 국제인도법의 요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시기 남북한 간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북한 당국이 ‘전시납북’이란 용어를 집요하게 반대했던 까닭이다. 그러자 남한은 북한의 태도를 고려해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라는 표현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2002년 9월 열린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전시 행불자’란 개념 틀내에서 전시납북자의 생사 및 주소 확인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유사한 합의를 도출(총 10회)했지만 북한은 끝내 합의사항 이행을 외면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해결을 모색하였다. ‘이산가족’ 상봉의 틀 안에서 전시납북자 및 재북 가족과 남쪽 가족의 상봉을 추진키로 한 것이다. 속칭 ‘끼워넣기식 해결’이 그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써 2006년 3월 제13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처음으로 남북한에 흩어진 전시납북자 가족 상봉이 성사되었다. 이후에도 네 번에 걸쳐 전시납북자 가족 상봉이 추가로 실현되어 총 11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70여년의 세월에 비춰 보면 너무나 미미한 실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다.

그마저도 안타까운 사실은 북한은 2018년 8월 제21차 이산가족 상봉을 끝으로 이산가족 상봉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는 점이다. 그런 반면 2023년 말부터 북한은 남북관계는 ‘적대적 두 국가’라며, 남북 교류협력이나 인도적 사안의 해결을 전면 차단하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따라서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추가 상봉은 물론, 전시납북 피해자들의 ‘전면적 생사확인’이나 유해송환 등의 실질적인 성과 거양은 단시일 내에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전시납북자들의 대다수는 세상을 등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쪽의 가족들은 납북 피해자들의 정확한 사망 일자를 알지 못해 제사나 기타 추모의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다. 이같은 ‘비인도적 상황’은 더 이상 지속돼선 안 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국제공조 노력이 요구된다. 우선 발표 10주년이 되는 북한 인권 『COI 보고서』에 최근 내용까지 포함되도록 업그레이드하여 이를 국제적으로 널리 홍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국제사회가 북한 인권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힘을 한데로 모을 때 전시납북자 문제 해결의 모멘텀도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전시납북자 문제의 진전을 위해선 북한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긴요하다. 하지만 북한이 쉽사리 기존의 태도를 바꾸려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북한의 태도 변화를 위한 압박과 설득을 비롯한 국제협력이 절실하다. 

특히 금년 11월에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인권 상황에 대한 제4차 보편적 정례검토(Universal Periodic Review: UPR)가 예정돼 있다. 이 계기를 통해 문제를 적극 제기하고 북한의 호응을 유도해야 한다. 더불어 이러한 국제적 여건을 바탕으로 남북한은 빠른 시일 내에 당국간 회담이나 적십자회담을 재개하여 미해결의 인권 및 인도적 사안인 전시남북자 문제 협의에 나서야 한다. 

“거론할 때 개선이 있고 침묵하면 진전이 없는 법이다.” 또한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는 법이다.” 이와 관련해 세계시민들의 관심과 성원은 문제 해결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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