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어수선한 해였다.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 제주공항 KAL기 추락사고 등이 이 한 해에 모두 일어났다. 충격적인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키며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범죄조직 지존파 체포와 성수대교 붕괴사고 또한 1994년의 일이었다.
여름은 유독 더웠다. 전국 최고 기온 38.4도의 폭염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미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 2무1패로 월드컵 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지만 목표로 했던 첫 승과 16강 진출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렇게 지나가는가 싶었던 그 해 여름, 소식이 들려왔다.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설’들
7월 8일, 김일성 사망. 새벽 2시 집무실에서 발생한 갑작스런 심근경색이 원인이었다. 이 죽음이 놀랍게 다가왔던 이유는 당시의 남북관계가 화해무드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3년 4월 ‘평화통일을 위한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 제시 후 김일성은 대한민국 김영삼과 회동을 약속했다. 1994년 초에는 김영삼과의 정상회담이 추진됐으나 김일성의 건강악화로 무기한 연기됐다. 그런 와중에 찾아온 죽음이었다.
김일성의 죽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 의문점은 사망 장소다. 공식적인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집무실로 돼 있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은 ‘아버지가 죽은 장소인 까닭에 김정일이 더 이상 향산초대소에 가지 않는다’는 추측과 맞물리며 무게를 얻었다. 아들 김정일의 암살설(혹은 사망방관설)도 정해진 수순처럼(?) 따라붙었다.
김일성과 같은 날 사망한 북한 정치인 조명선의 사망도 잠시 화제가 됐다. 같은 날 일어난 사건임에도 그의 사망은 김일성 사망 소식이 발표된 지 20일 정도가 지난 7월 27일에야 북한 ‘중앙통신’에 의해 보도됐다.
김정일이 조명선의 영전에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표시했다는 짧은 뉴스였지만 5년 뒤 중국의 대련만보와 홍콩의 문회보는 두 사람의 사망에 연결점이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즉, 빨치산 동지였던 조명선의 사망소식을 듣고 극도로 흥분한 김일성이 심장발작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발작 당시 묘향산 별장에서 일을 보던 김일성은 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前대통령을 만난 뒤 극도로 고무돼 하루 10시간 이상 일을 했으나 과거 심장병을 앓은 일이 없어 별장에는 응급약이 구비돼 있지 않았다.
조명선 사망 소식을 접한 뒤 발작한 김일성을 평양으로 옮기기 위해 출발한 첫 번째 헬기는 폭우로 추락, 두 번째 헬기를 띄우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돼 결국 8일 오전 2시 사망에 이르렀다는 게 이 신문의 분석이었다. 항간에 횡행하던 각종 음모론을 전부 취합한 모양새의 분석이었지만 김일성의 발작 직전 조명선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화제가 됐다.
김일성의 죽음을 대하는 한국의 시선
화해무드가 지배적이던 상황에서 발생한 김일성 사망뉴스는 국내에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7월 하순의 남북정상회담은 ‘없던 일’이 됐고 한국 정부는 군 경계태세를 강화시켰으며 재야 운동권과 학생들의 조문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에 대해 북한 측은 김영삼 정부를 비난하며 당국 간 대화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이후 김영삼 정부의 남은 임기 중에도 악재는 계속 터졌다.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96년 4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96년 9월), 황장엽 망명(97년 2월) 등이 이어지며 남북화해의 분수령을 맞을 줄 알았던 김영삼 정부는 남북관계의 긴장국면 속에서 임기를 다했다.
한편 김일성 조문을 금지한 김영삼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는 반발도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김일성 조문 파동’으로까지 비화되는데 발단은 국회였다. 당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은 “같은 민족으로서 우리 쪽에서 조문단을 파견하거나 그것이 안 된다면 조문의사를 표시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지 않느냐”며 남측의 조문단 평양 파견을 제안했다. (이부영은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다.)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한총련)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등의 단체는 조문단 파견 의사를 밝혔지만 정부는 불허 방침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북한 노동신문이 “남조선 당국이 조문단 파견을 가로막고 조전·조의는 고사하고 애도의 뜻조차 표시하지 않은 것은 상식 이하의 불손하고 무례한 행위이며, 남조선 통치 집단의 대 범죄를 단단히 결산할 것”이라고 비난하자 국내 여론이 일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상 최악의 독재를 하고서도 상대적으로 평온한 죽음을 맞은 권력자의 죽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의 논란은 김정일이 사망한 2011년 12월에도 반복됐다. 특히 서울 동교동 김대중 前대통령 사저에서 방북을 앞둔 이희호 여사를 만난 박원순 서울시장은 “김정일 위원장 사망은 남북 관계를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라고 말하며 “조의 표명이 어려운 점은 안타깝다”고 말하며 한동안 ‘종북 논란’이 일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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