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회장은 최고의 지성과 활동력, 희생정신을 두루 갖춘 탁월한 리더이자 시대적 통찰력과 원대한 비전을 지닌 선각자였고 거인이었다.
1970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73년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로 공직을 시작했고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법복을 벗고 일찍이 변호사로 활동했다.
판사 재직 시 김대중 시국사건 배석판사로 당시 군사정부와 마찰을 빚으며 지방발령을 받기도 했고, 변호사로서는 김근태 고문사건, 권양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하여 인권변호사로도 이름을 떨쳤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에 공헌했고 당시 YS-DJ 단일화 무산을 야기한 이기적 진영/지역논리, 구태정치에 환멸을 느껴 양 진영의 구애를 뿌리치고 우리정의당을 창당, 새로운 정치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가 이른바 민주진영 인사에서 대표적 보수인사로 인식되기 시작한건 이 무렵부터다. (그것은 ‘시대와의 불화’이기도 했다.) 국내 민주화 이후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개선의 필요성 그리고 진보좌파의 위선과 종북성을 누구보다 앞서 인식하고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80년대말 민주화 이후 과격한 반미운동이 모습을 드러내자 1991년 한미우호협회를 창립,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활발한 민간외교를 펼쳤다.
1993년 YS정부 초대 서울시장으로 전격 임명됐다가 자택의 ‘그린벨트훼손’ 논란으로 7일 만에 낙마한 것은 ‘내부견제’ 혹은 ‘시대적 불화’로 인한 진보좌파진영의 선제공격의 측면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내 오점으로 남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1994년에는 태평양아시아협회를 설립, 지금까지 약 7,000여명의 대학청년봉사단을 아시아 국가에 파견 일찍이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서 진입하기 위한 아시아 내 입지를 준비했다.
1999년에는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현 세이브엔케이)를 설립 1,180만명이라는 경이로운 숫자의 서명을 국내외에서 받아 이를 유엔과 미 의회 등 세계 관계기관에 전달함으로써 탈북민들이 국제법적으로 난민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국내입국 탈북민 2만5,000여명 중 2,000여명의 탈북민을 국내로 인도했고, 북한 내부 상황과 자유민주화통일의 필요성을 국내외에서 여론화했다.
출판, 언론인으로서는 1983년부터 월간 고시계를 발행했고, 2002년에는 시사주간 미래한국을 창간,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가치와 기독교적 세계관의 함양, 대한민국정통성 수호에 기여하며 보수정권 집권에도 공헌했다.
김상철 회장은 생전에 “진리는 저항이 아니라 인내와 희생에 있고, 불신이 아니라 믿음에, 증오가 아니라 연민과 사랑에 있다”며 “사회의 개혁을 외치기에 앞서 나부터 변화되기를 간구했고 남의 과오를 들추기보다 미래의 세계를 위해 지금 할 일이 무엇인지를 늘 기도한다”고 했다.
그의 원대한 비전과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열매 맺을 것이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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