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에 본 3·1운동과 21세기 의미”
“기독교사에 본 3·1운동과 21세기 의미”
  • 김권정 박사
  • 승인 2018.05.2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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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정 박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유와 정의, 평화의 공동체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독교의 역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장 8절)는 예수 말씀에서 출발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와 팔레스타인이라는 좁은 공간을 넘어 이방인과 서방세계로 펴졌고, 마침내 오늘 한국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으로 인류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구속사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단순한 직선의 과정이라 아니라. 하나님 계시의 수직 차원과 인간 역사의 수평 차원이 만나서 엮어내는 거룩한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인간사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지는 역사 속에서 자유와 정의, 평화의 가치를 향한 기독교 공동체의 열정과 헌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늘 새로움을 가져다준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를 언급할 때, 어려운 신학적 논쟁이나 딱딱하고 엄격한 교리나 교회제도 형성에 대한 일련의 기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오히려 훨씬 그 범주가 넓고 그 가치 지향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리스도 성령께서 인류의 공동체 삶에 끼친 영향력의 역사를 드러낸다.

이것은 한국에 수용되어 형성된 기독교 역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99년 전에 일어난 3.1운동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자유와 정의, 평화의 가치가 대단히 보편적 가치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 이 운동은 기독교인만 참여한 것은 아니나, 한국의 기독교가 일제의 탄압과 한국인 차별에 맞서 자유와 정의, 평화를 앞세우며 자주적 독립 권리 획득을 위한 고난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3·1운동에서 외쳤던 자유와 정의, 평화의 정신은, 그래서 기독교적 가치관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며 그리스도 성령이 우리를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는 고백과 함께 일체의 억압과 불의에 맞서는 정의와 평화 의식이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3·1운동은 한국기독교계가 ‘한국의 독립’이란 목표를 향해 민족운동세력과 협력하여 일으킨 실천운동이었다. 그것은 먼저 이 운동의 이념적 근거와 조직의 형성, 그리고 이 운동의 전개와 확산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것은 3·1운동의 이념적 근거인 〈독립선언서〉의 33명이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계의 대표적 지도자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일제경찰의 집중적이고 전면적인 탄압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동안 3·1운동의 기독교적 성격은 한국근현대사 연구에서 크게 지적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업적이 있었으나, 이제까지 일반사에서는 여전히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단지 3·1운동의 민족대표와 준비단계에 그쳤으며, 그 한계를 종교 세력으로서 기독교세력의 주도에서 찾는 등 그 역할의 의미를 소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3·1운동의 기독교사적 이해는 단순히 운동에 참여하거나 그 한계에 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참여한 배경과 기독교적 가치나 이념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고,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기독교적 조직들이 그대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기독교적 성격을 간단히 지나쳐 버릴 수 없다.

한국기독교계의 3.1운동 참여 배경

일제는 1910년 한국을 완전히 강점함으로써 무단적 통치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착수하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눈에 가시처럼 여긴 것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세력이었다. 1900년대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에 맞서 저항한 민족운동세력 중에 무장투쟁을 전개한 의병세력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제 안의 합법적인 종교조직을 토대로 활동하는 종교세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앞에서 보기에는 온건하고 반일운동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으나 뒤로는 국내외 비밀결사단체와 연계하거나 국내 비밀결사단체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기독교는 일제에게 더욱 큰 문제 거리였다. 이른바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일제의 정치·문화·종교적 이념과 하나님 신앙을 제일주의로 내세우는 기독교와 조화를 이루거나 공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다. 또 여기에는 한국교회가 민족운동과 깊게 연계되어 있는 가장 큰 배일세력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1905년 이후 각종 구국기도회와 교육구국운동,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단체, YMCA운동 등을 통해 한국교회가 항일민족운동과 깊게 맞물려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기독교가 외국선교사들을 매개로 일제와 경쟁내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영미 서구 국가와 연결되어 있었고, 세계 여론에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지속적이고 철저한 통제 내지 종속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105인 사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사건은 당시 총독인 테라우치가 서북지방을 시찰할 때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 등의 기독교인들이 총독이 암살을 모의했고, 이 과정에 선교사들도 개입했다는 일제의 날조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일제가 이 사건을 조작한 것은 당시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제거하려한 목적 이외에도 반일의식이 강한 기독교 교세의 확장과 배후세력으로 단정한 외국선교사들을 축출하려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세력의 기세를 꺾었다고 판단하고, 기독교 민족운동세력의 근거지가 되는 기독교 교회와 학교에 대한 대대적 탄압을 시작하였다. 1910년대 중반 ‘포교규칙’과 사립학교령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교회 설립시 허가를 받도록 하였고, 부흥회·기도회·주일예배 등을 방해하거나 경관을 파견해 설교 등의 내용에 트집을 잡았다. 기독교 학교에 대해서는 예배와 종교교육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같은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교세는 1910년 이후 조직적인 성장이 지속되었다. 1918년 당시 장로교는 1개 총회에 11개 노회에 2,205 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감리교는 미감리회가 1개 연회에 10개 지방회에 487개 교회가, 남감리교가 1개 연회, 5개 지방회에 238개 교회가 전국에 걸쳐 조직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장로교인의 수가 16만명, 감리교인이 3만명으로 기타 중소 교파까지 합치면 20만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오히려 한국기독교회의 반일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기독교세력은 끊임없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운동 세력을 강화 확대시켜 나갔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회 자체가 곧 정치집단이 아니었으나 언론 ·집회·결사의 자유가 철저하게 차단된 상태에서 한국인들에게 종교공동체는 거의 유일한 합법 조직이었고, 이런 조직은 암흑과 같은 식민지 현실에서 독립의 가능성을 찾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모임의 공간이며 의사 및 정보 소통의 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정치 사회적 관계망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특히 주일예배 각종 특별기도회와 부흥회, 사경회, 그리고 성경공부 등은 정치·사회적 활동의 자유가 차단당한 한국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합법적인 접촉 및 국내외 정보 소통의 통로가 되었다.

또한 기독교세력이 3·1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외 독립운동과 깊게 연계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던 비밀결사로 신민회를 비롯한 송죽결사대·한영서원비밀결사·조선국민회 등을 주도적으로 조직하며 활동하였다. 국외에서는 이승만·안창호·박용만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하는 기독교인들과 연락망을 구축하고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시키면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외 기독교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후 각국의 혁명 독립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제창 및 파리평화회의 개최 등 국제 정치의 변화의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국내 세력과 연계하며 국제 변화의 상황을 바로 독립운동에 반영시킬 수 있는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한국기독교공동체가 3·1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기독교적 가치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정교분리의 틀을 넘어 기독교적 가치와 방향 차원에서 참여한 인물들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남강 이승훈이었다. 기독교 측의 실질적으로 대표자로 활약한 그는 “민족의 자결은 하나님의 혜택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고, 3·1운동에 대해 “하나님이 행복을 내려 주는 시기에 만나서 천하 일반 사람이 같이 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신홍식도 “조선도 하나님의 의사로 독립국이 되리라고 믿고 가담했다”고 했으며, 유여대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만 믿으면 될 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김창준 역시 “내가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은 천의(天意)라는 생각을 주장했던 것이다.

특히 신석구 목사의 경우에는 독립운동의 참여 권유를 듣고 천도교와의 합작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로 즉각적인 대답을 회피했으나 이후 진지하게 새벽마다 기도하고 나서 새벽에 기도하던 중, “사천년 전해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음성을 듣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3·1운동의 참여를 만류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그는, “나는 이른 줄은 안다. 그럼으로 나는 지금 독립(獨立)을 거두려 함이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라고 하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이 운동을 단순히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는 것이라 보지 않았다. 이들은 기독교 가치 아래 한국인이 당하는 고통과 수난의 원인인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적 독립과 자유를 되찾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자 소명, 정의라는 인식 속에서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3·1운동 전개와 한국기독교계 참여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준비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먼저 준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다가오자 중국 상해에서는 이런 역사적 분위기를 한국독립운동의 기회로 삼고자 노력하였다. 여운형·장덕수·선우혁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는데, 이들은 국내 기독교세력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기 시작하였다.

신한청년당 여운형은 1918년 9월 평북 선천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 참석 및 출석을 기회로 기독교지도자 이승훈과 이상재를 만나 국제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상해로 돌아갔다. 그해 11월에는 여운형은 중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R. Crane)을 만나 한국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파리평화회의 의장과 미국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1919년 초에는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김규식을 한민족 대표로 파리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신한청년단 장덕수와 조용은을 만나고 독립을 위한 궐기를 준비하였다.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에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 소집청원서를 일본 정부, 각국 공관, 언론기관에 발송하고, 동경 한인 YMCA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렇게 국외에서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흐름에 맞추어 국내에서는 종교지도자들과 학생들이 3·1운동을 초기에 조직화하였다. 기독교계에서는 1919년 1월말~2월초에 걸쳐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이 이승훈·양전백 등을 찾아와 독립운동을 협의한 후 서북지방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던 중 2월초에 이승훈이 연합전선을 펴자는 천도교 측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천도교와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 때 YMCA 박희도 간사, 세브란스병원의 이갑성 제약주임 등도 강기덕·김원벽 등 전문학교 기독학생들과 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하였다. 2월 24일에는 불교계까지 포함한 종교계를 중심으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구체적인 독립운동 추진방침을 결정하고 그 준비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의 발표와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조직된 연락망을 통해 독립만세시위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 과정에 시위대와 진압하는 일제 경찰의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대중시위가 더욱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회의 종교조직이 대중시위의 연락망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장로교의 총회·노회·시찰회, 감리교의 연회·지방회·구역회 등의 조직은 지방내 교회간, 또는 지방과 지방 사이 기독교인들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시위 정보를 서로 교환하며 시위 대중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연락망과 동원망으로 활용되었다. 기독교 학교들도 대중시위 과정에서 중요한 연락망이 되었는데, 학생들이 휴교령으로 지방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지방의 만세 시위를 조직하고 추진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기독교청년회와 지방 연락망을 갖춘 여전도회 조직들, 그리고 지방을 순회하며 자유롭게 전도활동을 했던 매서인들과 전도부인들의 조직도 대중시위 확산에 빼놓을 수 없는 조직이다.

교회는 대중시위운동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교회의 부속시설이 고종 황제의 봉도식( 奉悼式) 또는 독립 축하식 장소로 이용되었고, 교회의 종교집회가 바로 시위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았다. 교회의 기도회와 같은 종교의식이 저항운동의 방법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또한 교회는 3·1운동의 이념을 형성하고 확산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시위투쟁의 도구였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보급에 참여했다.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채택한 평화주의 이념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투쟁노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중투쟁에서 기독교세력은 교파와 종파를 초월해 독립을 목적으로 한 대중시위에 적극 연대 투쟁하였다. 물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교리와 신조가 다른 종교인들과 의 연대에 대해 부정 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를 신앙적 체험과 결단을 통해 극복하고 대중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방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천도교인들, 유림들과 적극 연대해서 시위를 전개하는 사례가 많았다.

‘독립선언’을 계기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근대적 의미의 정부를 조직하려는 움직임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기독교인들이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해 임시정부 설립운동에는 3·1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던 신한청년단의 청년기독교인들과 3·1운동 당시 중국 상해로 망명한 기독교인들이 적극 가담했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인천의 국민대회 모체로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 기독교인들이 가담했고, 이 모임 대표로 이규갑 목사가 뽑혀 상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와의 통합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일제의 탄압이 집중적으로 기독교계에 가해졌다. 준비단계 뿐만 아니라 대중투쟁 단계에서 기독교계의 주도적 역할을 포착한 일제는 기독교회와 기독교 학교들에 대한 방화 및 파괴를 저질렀으며, 지방에서는 교회의 집회를 강압적으로 중지시키기 일쑤였다. 시위투쟁을 이끌던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무자비한 발포와 폭력으로 현장에서 사망하는 일이 많아졌다. 예를 들어 그 해 장로회 총회에 보고된 피해사항을 살펴보면, 교회당의 파괴가 12동, 장로교 경영학교 파괴가 8곳, 사살된 자가 41명, 매 맞아 죽은 자가 6명, 체포된 신자 3,804명 가운데 목사와 장로만도 134명이나 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인명피해를 제외한 가옥·재산상의 피해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단체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대중투쟁의 시위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살상과 파괴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여론이 침묵하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은 <독립선언서>와 각종 시위 유인물들을 제작 또는 복제하여 해외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시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선교사들을 통해 3.1운동의 실상을 국제 기독교와 세계 여론에 알렸다. 이를 통해 한국인들에 대한 지지와 일제에 대한 국제적 비판이 형성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예컨대 제암리교회 학살사건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것이다.

일제 경찰과 군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표면적 시위가 1919년 5월에 들어서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중투쟁이 지하화 하는데, 여기에도 기독교인들은 해외 독립운동단체 와 연결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국외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밀입국 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국내외와 연결된 대중투쟁을 전개했다. 여기에서도 이들의 활동에 교회가 조직적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기독교계의 3·1운동 참여는 단순하고도 산발적인 대중시위에만 참석한 것이 아니라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전개에 이르기까지 전체에 걸쳐 이를 조직하고 대중을 동원하며 이념을 형성하여 이를 추진하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성격을 갖는다. 이런 결과 한국사회는 기독교를 민족종교로 인정 하고 민족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 역사 속의 3.1운동 현재성

이제까지 살펴본 기독교계의 3·1운동 참여의 성격을 21세기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정리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계의 3·1운동의 참여는 19세기말 이래 민족 과제에 동참해 왔던 민족운동의 전통을 확립하고 재해석한 결과라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은 3·1운동 이전에 급조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이래 서구와 일제의 침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충군애국’·‘국권회복’으로 표현되는 민족운동에 참여했고,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됨에 따라 항일 독립운동으로 발전되는 민족노선을 꾸준히 지켜왔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도 가중되었는데, 이에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도 끊임없는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국내 비밀결사운동과 국외와 연결된 군자금 모금운동이나 민족의식 고취와 실력양성 운동 등이 그러한 운동들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의 3·1운동의 참여는 단순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한말 이래 민족이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역사적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는 민족운동인 동시에 종교운동의 일환이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탄압을 단순한 정치적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당한 고난이 일제의 침략과 강점이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한 기독교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곧 신앙 수호의 관건임을 인식하고 3·1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3·1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은 3·1운동 이전에 신앙적 체험을 통해 기독교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형성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아래에서 민족이 처한 고난을 목도하고 체험하면서 역사의식을 확립했고, 3·1운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이에 참여한 것이다. 좁은 개인 및 교회, 집단, 민족의 시각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라는 큰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구체적 현장에 뛰어 들었다.

셋째,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는 기독교 종교 조직을 적극 활용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학교, 기독교청년회, 여전도회와 여선교회, 그리고 매서인과 전도부인들 등과 같은 기독교 조직이 운동의 연락망과 대중 동원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치사회 조직과 활동이 전면 금지된 상황에서 이들 조직망이 없었다면, 그리고 정치 사회적 지도자들이 없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없었더라면 3·1운동의 내용과 규모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교회 조직과 종교집회가 시위의 주요 기반이 되었고, 시위의 전개과정에서 교회의 종교 기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외국 선교사들은 이런 교회의 정치적 기능을 끊임없이 제거하려고 노력했으나, 교회안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는 항일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하게 것이다. 기독교가 정치집단은 아니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없는 송두리째 빼앗긴 채 1910년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이게 이 교회는 민족지도자들과 대중들에게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기대하고 또 기대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공동체와 민족운동세력은 깊게 연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한국기독교계는, 당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개인과 민족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받던 상황에서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는 성경 구절을 읽으며 개인과 민족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을 갈망하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한국의 기독교회는 자유를 꿈꾸며, 자유를 추구한 공동체였다는 점을 기록해야 한다. 기독교의 가치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행동의 원칙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가 3·1운동과 같은 역사 속에서 자유와 정의, 평화의 가치를 새롭게 되살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흩어져 있는 기독교의 역사의 자랑스러운 파편과 흔적들을 모으고 정리하며, 이를 복원하고 회복하기 위한 한국교회의 역량을 모으는 것이다. 이를 수행할 학문적 역량을 갖춘 학자 등을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한다. 기억하고 기록하여 기독교의 역사가 한국교회 안에서 죽은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오늘 기성세대뿐 아니라 자라나는 젊은 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생산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일들을 위해 한국기독교학술원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기독교학술원 제52회 학술공개세미나 김권정 박사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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