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청년 이승만의 궤적이 곧 대한민국 자유시민의 교육 커리큘럼
[이슈] 청년 이승만의 궤적이 곧 대한민국 자유시민의 교육 커리큘럼
  • 조평세 미래한국 편집위원·1776연구소 대표
  • 승인 2024.03.2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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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관련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개봉 한 달 만에 누적 관객 100만을 돌파하면서 우리나라 국부 이승만에 대한 숱한 왜곡과 거짓이 걷히고 있다. 고 유영익 교수를 비롯한 여러 이승만 연구자들의 노력과 본지 <미래한국>을 비롯한 일부 매체들을 통해 밝혀진 이승만의 진실이 그동안 묵혀 있다가 이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대중문화의 놀라운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건국전쟁’에 대한 관람평은 대체로 우남에 대한 ‘미안함’으로 요약된다. 그토록 위대했던 우리나라 초대·건국 대통령을 제대로 못 알아준 정도를 넘어, 그동안 그를 ‘친일파’, ‘런(run)승만’, 심지어 ‘살인마’라고 거짓말하는 일부 반(反) 대한민국 세력의 준동에 대해 반박은 커녕 모른 체 침묵하고 오히려 편승해 왔던 보수 세력의 비겁함 때문이다. 

대한민국 보수의 지동지서(指東指西)는 이승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의 건국정신과 사상을 제대로 후대에 전수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대한민국 보수주의 정신은 이승만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으로 정리·요약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해, 이승만을 제대로 아는 것이 곧 대한민국을 보전하고 지키는 길이다. 

특히 배재학당에서 한성감옥을 거쳐 미국 유학 생활로 일단락되는 그의 드라마틱한 청년 시절 발자취는 사실상 모든 대한민국 자유시민이 밟아야 할 지적 궤도의 커리큘럼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에서 접한 개인의 자유사상과 문명개화, 한성감옥에서 확립한 기독교 신앙 바탕의 독립정신, 그리고 워싱턴DC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립한 칼뱅주의와 기독교 입국론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그 자유민주공화적 정체성을 보전하고자 하는 모든 보수·자유·우파 운동과 정치 교육 과정은 다음과 같은 ‘청년 이승만의 지적 궤적’을 기초 커리큘럼으로 삼아야 한다. 

1903년 한성감옥에 수감된 당시 죄수복을 입은 28세의 우남(왼쪽)과 53세의 월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03년 한성감옥에 수감된 당시 죄수복을 입은 28세의 우남(왼쪽)과 53세의 월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배재학당의 개화사상

작년 4월 미국 의회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밝혔듯이,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놓였다. 1884년 조선에 들어오게 된 호러스 알렌 의료선교사는 서양 의술을 통해 조선인의 몸을 치료했고, 이듬해 들어온 호러스 언더우드는 교회를 세워 조선인의 영혼을 보살폈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함께 들어온 헨리 아펜젤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학인 배재학당을 세워 조선인의 정신과 생각을 활짝 열어 젖혔다. 

1895년 4월 만 20세가 된 청년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그의 의도는 단지 영어를 익히려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자유와 독립 및 평등 등의 근대 정치사상을 배웠다. 다음은 1912년 쓴 이승만의 당시 회고다.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하면서 가졌던 포부는 단지 영어만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영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바로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이었다. … 이것은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같은 정치적 원칙을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남은 바로 종교개혁 이후 서구세계를 밝게 비춰 폭발적인 정치·사회·경제적 성장을 가능케 한, 서구문명의 자유사상을 접한 것이다. 

특히 미국의 국부 벤자민 프랭클린의 이름을 딴 프랭클린 마샬 대학에서 인문고전을 전공했던 헨리 아펜젤러는 놀라운 지적 능력과 통찰력을 보유한 이승만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에게 꼭 필요했던 지적 멘토가 되어 줬다. 또한 그 즈음 미국에서 귀국해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한 서재필을 만나 국민 계몽의 필요성과 개화의 의지를 굳혔다. 그리고 선교사들과 서재필의 독려로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한 동지들과 함께 ‘협성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서재필이 호머 헐버트 선교사의 도움으로 창간한 최초의 한글 신문이자 영자 신문인 독립신문에서 주요 필진으로 활약하며 글을 통한 국민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1897년에는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뽑혀 ‘조선의 독립’이라는 주제로 유창하게 영어 연설을 하여 그곳에 모인 많은 외국인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테오도어 루스벨트를 접견할 때의 청년 이승만
테오도어 루스벨트를 접견할 때의 청년 이승만

한성감옥의 독립정신

이승만은 배재학당 졸업 후 계속해서 서재필 등의 개혁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며 1898년 3월 처음 열린 만민공동회 집회에서 연설했다. 4월에는 매일신문 창간에 함께하여 편집과 논설을 맡았다. 그러던 중 11월 고종의 독립협회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이듬해 1월 고종폐위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온갖 고문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맞은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선교사들이 알려줬던 하나님을 찾아 처음으로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십시오.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십시오.” 이때 그는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을 받으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다. 예수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이후 이승만은 함께 투옥되었던 수많은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간수들을 전도했다. 

이내 감방은 예배당이 되었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책들과 잡지들을 반입하고 옥중 도서관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월남 이상재의 손자가 당시 한성감옥에서 기록했던 도서대출대장을 공개했는데, 이승만과 이상재를 포함한 옥중 동지들이 가장 많이 대출한 책이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집필한 ‘유몽천자’였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유몽천자’는 미국 독립선언문과 건국문헌과 각종 영미문학이 예문으로 적혀 있던 한글교과서였다. 신체적으로는 끔찍이도 열악한 한성감옥이었지만, 그곳은 청년 이승만을 통해 사상 교육의 토론장으로 탈바꿈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지적 양성소이자 영적 충전소가 되었다. 

이 외에도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청일전기’를 집필했으며, ‘제국신문’ 및 ‘신학월보’에 기고하는 등 활발한 ‘옥중 국민계몽운동’을 펼쳤다. 무엇보다 올바른 근대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선제적 필수조건으로 국민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독립’하여 양심을 바로잡고 나라의 독립에 각자가 책임을 질 것을 호소하는 국민계몽서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프린스턴의 칼뱅주의

당시 조선의 처지와 주변 국제정치의 상황, 그리고 서구의 정치사상과 철학을 총망라한 ‘독립정신’은, 말미에 조선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한 방안으로 대외 개방, 새로운 문물 도입, 외교노력 강화, 국가주권 보호, 도덕적 각성과 충성심 배양, 모든 백성에게 자유보장 등 6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의 근본’은 곧 종교라고 이야기한다. 즉, 기독교로의 교화를 통해서 개인이 변화되는 것만이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자유문명국의 수준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당시 청년 이승만의 이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은 1903년 ‘신학월보’ 9월호에 실린 그의 기고문이다. 다음 대목이 하이라이트이다. 

“정치는 항상 교회본의로서 딸려 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러므로 교화로서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하고 순리한 연유니라. 이것을 생각지 않고 다만 정치만 고치고자 하면 정치를 바로 잡을 만한 사람도 없으려니와 설령 우연히 바로 잡는다 할지라도 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오.” 

1904년 한성감옥에서 나온 이승만은 제임스 게일과 언더우드 선교사 등의 추천서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2개월의 긴 여정 끝에 12월 31일 수도 워싱턴 DC에 도착한 청년 이승만은 다음날 곧바로 커버넌트 장로교회 튜니스 햄린 목사를 찾아간다. 튜니스 햄린 목사는 미국 교계와 학계는 물론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펼쳤던 목회자다.

조지워싱턴 대학을 포함한 여러 대학의 이사진에 속했던 튜니스 햄린 목사는 이승만의 초기 미국 정착을 지도하고 조지워싱턴 대학으로의 편입학을 적극 도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해 4월 23일, 이승만이 만 30세가 되기 3일 전, 이승만에게 세례를 줬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튜니스 햄린 목사가 이승만에게 세례를 줬을 당시, 자신이 담임하는 커버넌트 장로교회 앞에 존 위더스푼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성도들과 워싱턴 주민들의 청원 서명을 수집하고 정계에 각종 로비력을 동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존 위더스푼은 ‘미국 기독교 입국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존 녹스의 직계 후손으로, 1768년 미국 독립 시기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청빙되어 이 대학 커리큘럼을 완전히 장로교 개혁주의 전통에 입각한 국가지도자 양성과정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목회자이자 유일한 대학 총장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그는 뉴저지 대학교에서 훗날 미국 연방헌법을 쓴 제임스 매디슨을 키워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튜니스 햄린 목사는 자신이 워싱턴 정가에 되살리려 했던 존 위더스푼의 기독교 입국 정신을 이승만에게 가르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승만에게 세례를 주며 ‘조선의 위더스푼’이 되어 조선의 새 나라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나라로 세우게 될 것을 축복하며 기도했을 수 있다. 그리고 몇 년 뒤 하버드 박사과정 입학이 좌절되고 프린스턴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 이승만은 그것을 ‘조선의 위더스푼’으로 훈련받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햄린 목사가 기획하고 추진했던 워싱턴DC 내 존 위더스푼 동상 건립은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지 다음 해인 1909년 실현되었다. 이후 커버넌트 장로교회는 철거되어 없어졌지만, 그 교회 앞에 세운 존 위더스푼 동상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서 있다. 

새나라를 위한 자유시민 양성을 쉬지 않았던 청년 이승만

하나 더 놀라운 사실은 이승만이 프린스턴에 도착하기 약 10년 전, 네덜란드의 목회자이자 정치인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프린스턴 신학교에 와서 그 유명한 ‘칼뱅주의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카이퍼가 설파했던 칼뱅주의는 정치적 의미에서, 입헌주의 정치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했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정치운동을 가리킨다.

카이퍼는 칼뱅주의의 종교개혁 정신이 네덜란드와 영국을 해방시키고, 이어 청교도들을 통해 미국의 독립, 건국, 번영에 강한 추진력을 제공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강의 말미에 그 칼뱅주의 정신이 과연 미국 다음으로 어디로 가게 될지, 태평양 기슭에서 경건히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그곳에 10년 후 훗날 대한민국을 세울 이승만이 온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시작한 조선인 계몽운동도 계속했다. 1908년 7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서는 의장으로 활약하며 국민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저술·번역·출판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또한 최근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청년 이승만은 초단기간 동안 학사, 석사(하버드), 박사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미 동부와 중부 지역까지 수많은 교회와 단체를 순회하며 200여 회 이상의 강연을 했다. 

이는 무려 한 달에 13번꼴이다. 지역도 최소 10개 주 36개 지역을 다녔다. 대표적으로 1906년 여름 매사추세츠 주에서 열린 만국기독학도공회와 1908년 3월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 2010년 세계주일학교대회 등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민간외교이자 독립외교였다. 청년 이승만은 이러한 대중 강연을 통해 생활비도 충당할 수 있었다.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구 자유문명을 접한 이후로부터, 한성감옥에서의 기독교 개종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새나라 구상을 거쳐 프린스턴의 칼뱅주의를 통해 전수 받은 독립과 건국의 청사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건국정신과 국가 정체성을 뚜렷이 나타내는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대한민국을 보전하고 지키는 길은 국민 모두가 청년 이승만의 지적 궤도에 올라타 ‘리틀 이승만’이 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으로 일어난 ‘이승만 바로알기’ 열풍은 반드시 ‘이승만 닮기’ 운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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