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지략으로 정승에 오른 한명회
경세지략으로 정승에 오른 한명회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7.12.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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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명재상을 찾아서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도 뒤에 가서는 나태해지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바라건대 그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소서.”

평범해 보이면서도 깊은 통찰을 담은 이 멋진 말은 뜻밖에도 1487년(성종 18년) 11월 14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풍운아 한명회(韓明澮)가 자신이 임금으로 만들어 올렸고 한때 사위이기도 했던 성종(成宗)에게 남긴 유언이다. 도학(道學)에 물든 그 후의 조선 성리학은 한명회를 매도했지만 사실 한명회는 거물 중의 거물이다.

1415년(태종15년)에 세상에 나온 한명회의 할아버지는 1392년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해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승인받아 이듬해 2월에 돌아온 한상질(韓尙質)이다. 그의 동생 한상경(韓尙敬)은 개국공신이다.

따라서 한명회의 집안 자체는 조선 혹은 조선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 한기(韓起)는 이렇다 할 행적이 없었고 일찍 죽어 한명회는 어려서 고아가 됐다. 의지할 데가 없자 작은 할아버지인 참판 한상덕(韓尙德)을 찾아가 몸을 맡겼는데 한상덕은 어린 한명회의 남다른 언행을 주의 깊게 살펴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그릇이 예사롭지 않으니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해 과거 공부를 했으나 나이가 장성하도록 여러 차례 낙방(落榜)했다. 그러나 이를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개의하지 않았다. 간혹 위로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궁달(窮達)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사군자(士君子)가 어찌 썩은 유자[腐儒]나 속된 선비[俗士]가 하듯이 낙방에 실망하고 비통해 하겠는가?”

어린 나이에 벌써 공자가 말한, 50살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결국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란을 통해 한명회는 권력을 장악했다.
일일구천(一日九遷), 하루에 아홉 번 승진한다는 말로 다름 아닌 한명회를 두고 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된 뒤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에 올랐다. 이듬 해 동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되었다.

그 해 가을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오르며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2년)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했다.

1457년 이조판서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등 4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우의정, 1463년 좌의정에 올랐다.

계유년이 1453년이니 일개 포의(布衣)였던 한명회는 정확히 10년 만에 최고 정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1466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와 함께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신문을 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곧 석방됐다.

한명회는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다가 1년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성종이 즉위하게 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참고로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자 성종의 장인이기도 했다.

성종에게 학문을 진흥시킬 방안을 제시했고, 서적이 부족한 성균관의 장서 확충을 위해 경사(經史) 관계의 서적을 많이 인출해 비치하게 했다. 1484년 70세 때 궤장(杖)이 하사되었다.

▲ 지난 2011년 KBS 2TV에서 방영된 특별기획드라마‘공주의 남자’에서 등장하는 한명희 / KBS2 영상캡처

압구정 확장과 권세

세조 즉위 이래 성종조까지 고관 요직을 두루 역임, 군국 대사에 참여했다. 특히, 세조는 그를 총애해 “나의 장량(張良)”이라고까지 했다. 4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권세와 부를 누렸다.

한강 남쪽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압구(狎鷗)’라 했다. 다산 정약용이 압구정에 올라 지은 시다.

승상이라 공명은 청사에 빛나는데/丞相勳名國史靑
풍류 즐겨 압구정 그 이름이 자자하네/風流尙說狎鷗亭
삼한의 주옥 비단 자리에 전부 쌓였고/三韓玉帛全堆席
팔부의 가수 악기 뜰에 모두 있었다오/八部歌鍾盡在庭
가련할사 뜬세상은 흐르는 물 같은데/浮世可憐同逝水
고깃배는 어인 일로 빈 물가에 떠 있나/漁舟何意汎空汀
지는 꽃 향그런 나무 찾을 만한 곳은 없고/落花芳樹無尋處
석양빛만 낡은 난간 쓸쓸하게 비추누나/唯有殘暉照古

한명회를 이야기하면서 압구정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성종12년(1481년) 6월 24일 상당부원군 한명회가 성종을 찾아와 “중국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는데 이 정자는 매우 좁으니 말리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종도 우승지 노공필을 시켜 중국사신에게 “압구정은 좁아서 놀기에 적합지 않다”고 전했으나 중국 사신은 굳이 “좁더라도 가 보겠습니다”고 말했다. 사실 한명회가 느닷없이 “매우 좁다”며 말려달라고 한 것은 나름의 수계산이 있었다. 그 수는 바로 다음날 드러난다.

6월 25일 한명회가 다시 와서 이렇게 말했다. “내일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고자 하니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당 부서를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바로 전날 한명회의 이야기는 결국 중국 사신을 모시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압구정이 좁다는 이야기였다. 성종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함인가? 그렇게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에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 그러자 한명회는 한 술 더 떠 성종의 지시는 무시한 채 압구정의 처마를 잇대어 정자를 넓힐 수는 없겠느냐고 묻는다.

한명회는 중국 사신의 위세에 기대어 성종에게 간접적인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종은 “내일 제천정에 사신들을 위한 오찬을 차리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도록 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한명회의 대답이 걸작이다.

“신은 정자가 좁고 더위가 심하기 때문에 아뢴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아내가 본래 오래된 질병이 있는데 이제 더 심해졌므로, 내일 그 병세를 보아서 심하면 제천정일지라도 신은 가지 못할 듯합니다.”

한명회가 물러간 즉시 승정원 승지들이 들고 일어났다. 아내가 아프면 중국 사신이 구경하려고 해도 사양했어야 할 텐데 중국 사신이 아프다는데도 유람을 청해놓고 이제 와서 성종이 압구정 연회를 허락하지 않으니 아내의 병을 핑계 대며 ‘제천정일지라도 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임금에게 대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성종은 한명회를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한명회는 이미 성종의 그 같은 유약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한명회의 사리(事理)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사건이다.

한명회는 성리학의 교조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왕조 시대 신하가 누릴 수 있는 정점에 이른 독특한 존재다. 정승이 되는 길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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