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백제에 관한 ‘시시하지 않은’ 이야기
일본과 백제에 관한 ‘시시하지 않은’ 이야기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10.1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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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에 대해 공부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사실이 있다. 백제가 고대 일본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오늘은 한국인들에게 이미 익숙한 이 사실에서 한 걸음을 더 나가보자.

한일(韓日) 간의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본이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다는 사실에 대해 한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의 고문서에는 백제(百濟)라는 한자에 구다라(くだら)라고 음가가 적혀 있다. 고구려의 경우 고려(高麗)라 쓰고 고마(こま)라고 읽는다. 신라(新羅)는 시라기(しらぎ)라고 읽었다.

일본에서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 이유와 관련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그 가운데 국어학자 도수희 충남대 교수는 백마강 유역의 ‘구드레’ 나루를 구다라의 어원으로 지목한다. 이 구드레 나루에서 황포돛배가 일본을 오가는 과정에서 ‘구드레’가 ‘구다라’로 변했다는 주장이다.

   
 

‘구드레 나루’에서 비롯됐다?

일본 고대사 전문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는 “백제를 큰 나라로 찬양하면서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한 근거는 일본서기 속편에 등장하는 현재의 오사카(大阪) 지역을 ‘백제군’(百濟郡, 구다라 고우리)으로 부른 이유다. 오사카는 왕궁이 있던 도시였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시시하다’는 뜻으로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말을 쓴다. 이 표현이 ‘백제가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고대 일본인들이 백제 문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어찌됐든 우리 한국인들로서 기분 좋은 일 아닌가?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한 일련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먼저 일본 고대문헌에는 백제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한(漢)이나 오(吳)와 같은 중국도 ‘구다라’라고 표기했다. 즉 일본 입장에서 도래(渡來)적 문화들에 구다라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물론 그 가운데 백제가 대표적이었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다만 구다라가 백마강의 구드레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시시하다’ ‘별 볼일 없다’는 뜻의 ‘구다라나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백제품이나 외래품이 아니어서라는 해석도 틀린 것인가. 사실을 살펴보면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는 팩트를 만나게 된다. 먼저 일본어 ‘구다라나이’는 ‘백제가 아니’라는 뜻으로 ‘百濟ない’라고 쓰지 않는다. 그 대신 바른 표기는 ‘下らない’다. 다시 말해 ‘내려 보낸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된다. 뭘 내려 보내지 않았다는 것일까.

   
 

알고 보면 복잡하고 우스운 속사정

‘구다라나이’의 어원에 대해 일본 학자들은 이 말이 17세기 에도시대에 사용됐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에도는 상품소비의 중심지였는데 가미가케(上方)라고 불린 관서지방, 즉 교토나 오사카에서는 이 에도(지금의 동경)에 물품을 유통하는 것을 구다루(下る)라 불렀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에도로 유통되는 물건을 ‘구다리모노(下り物)’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는 청주와 같은 술도 있었는데 일본 효고켄(兵庫縣)의 나다(灘) 지방에서 14세기경에 시작된 최고급술 나다자케(灘酒)가 그것이다. 명실 공히 당시 일본 최고(最高)이자 동시에 최고(最古)의 술이었다.

이런 술은 인기가 높아서 에도에 보내기도 전에 현지에서 다 소비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나다 지방의 이 술은 에도에도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下らない(구다라나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에도에서도 보기 힘든 술이라는 명칭이 고급품이라는 뜻으로 통용되자 여기저기 할 것 없이 술도가들이 자기들의 술을 구다라나이(下らな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 ‘구다라나이’가 흔해 빠져서 시시하거나 별 볼일 없는 것이 돼버렸다는 이야기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식당에 붙는 ‘원조’ 경쟁과 패턴이 같다.

민족주의 긍지에 다소 금이 가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런 것이 근거를 가진 역사적 팩트다. ‘구다라나이’는 일본인들이 백제의 물건을 칭송해 부른 것이 아니라 에도시대에 술도가들이 서로 자기들의 술이 최고급품이라고 떠벌리는 마케팅 전쟁을 비웃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다라’가 아니라고 자랑스럽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당시 百濟를 어떻게 읽었을까. 지금의 북경어라면 ‘빠이지(baiji)’겠지만 고대 중국어 상고음(上古音)은 ‘bbak-dei’에 가깝다. 아마도 ‘빡데이’ 정도로 들렸을 것이다.

백제는 사실 한국 전통문화에 깊숙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기름진 호남과 경기평야지역을 차지했던 백제는 그만큼 생산력도 높았을 것이고, 자연히 생산력에 따르는 문화예술의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백제는 서해안을 교통로로 격조 높은 중국 남조(南朝) 국가들과 교류해 왔다.

고조선을 위만이 찬탈하자 왕 기준(箕準)이 남하해 정착해 한(韓)이라 일컬은 지역은 지금의 익산인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곳에서 청동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된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백제는 마한(馬韓)으로서 고조선의 후예 한(韓)의 왕통을 이어받은 대표 격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피를 나눈 부여의 한 갈래를 이어받았다.

남방의 경쾌함과 북방의 장엄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 백제의 문화였을 것이며 그렇기에 금동향로에 새겨진 오악사(五樂士)의 예술혼이 일본에 전해져 아스카(飛鳥)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백제가 구다라여서 ‘구다라 나이’가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을 필요는 있다. 그런 맹목적인 민족주의 주장이 일본 내 백제의 진정한 위상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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