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인연’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의 이름을 유산(legacy)으로 가진 대학을 다녔고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수차례 만나보기도 했으며 케네디박물관을 여러 번 방문할 정도로 그의 매력에 매료된 적이 있다.
그런데 결론은 케네디 대통령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조셉 나이 前 학장조차도 “케네디는 좋은 대통령이었을지는 몰라도 위대한 대통령은 아니었다”고 담담히 평가한다.
미국 역사학계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신화가 무너진 지 오래다. 우선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케네디’는 어디까지가 실체인지 모호하다. 그는 젊음과 활기를 상징했지만 매주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을 정도로 병으로 고통을 받았고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
그러면서도 여성편력은 도를 넘어 병적이었다. ‘하루도 섹스를 안하고 살 수 없다’고 했고 이를 과감히 실천(?)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유명배우들과 사귀었고 아내 재키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들을 백악관 침실로 불러들이거나 일주일에 수차례 ‘외박’을 했으며 심지어 대통령 취임식 당일에도 몰래 빠져나와 여자와 즐겼다.
마릴린 먼로를 사귀다 동생 로버트에게 넘겨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고 비서와 참모, 스튜어디스, 거리의 창녀 등 대상과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인턴과 한 번의 부적절한 사건과 위증으로 탄핵위기에 몰렸던 클린턴 대통령을 생각하면 60년대는 그에게 ‘행운’이었다.
대학 시절 그가 썼다는 우수 논문과 베스트셀러가 된 책, 그리고 퓰리처상을 받은 자서전과 수많은 학술논문과 기고문,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여전히 전율케 하는 그의 명연설문 모두가 뉴욕타임스 기자와 역사학자, 전문 연설가 등이 대필한 것으로 드러났다.
건강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에 입대한 것도, 그리고 위험해지니 급히 제대한 것도 아버지의 ‘빽’이었고, ‘전쟁 영웅’이 되고 하원, 상원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것도 검은돈과 결탁한 아버지의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더욱이 문제는 그 정도가 범인(凡人)의 상상을 초월했다는 점,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의 평대로 그의 정치 역정이 ‘미국 정치사상 최대 사기극’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가족당 50달러의 현찰을 쥐어줘 유권자를 매수했고,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유력 라이벌에게 거액의 돈을 줘 주지사로 나서게 해서 ‘제거’했으며,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텍사스와 시카고 등에서 조직적 부정집계와 마피아의 개입 및 결탁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1000일간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남긴 정치적 유산으로는 그가 최초로 결정한 베트남 개입, ‘소련을 이기기 위해’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부은 우주사업과 이후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정부 만능주의 혹은 정치의 스포츠화, 쿠바 미사일사태의 ‘성공’ 뒤에 숨겨진 소련과의 비밀약정, 미 공립학교에서 사라진 기도(prayer) 등이 꼽힌다. 물론 정치적 공과는 입장에 따른 해석차가 있을 것인데 강력한 반공과 자유수호의지, 평화봉사단 설립 등은 분명한 공적으로 뽑힌다.
이러한 모든 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매력 있는 ‘좋은 대통령’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비극적 죽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넘어 케네디家에 이어지는 불운한 사건들을 보면서 ‘저주’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발행인 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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