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그대로’가 파라다이스라고?
‘자연 그대로’가 파라다이스라고?
  • 미래한국
  • 승인 2011.09.27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성준의 BOOk & World] 찰스 피시먼의 <거대한 갈증>를 읽고

황성준 편집위원·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1999년 8월. 러시아 남부 다게스탄 공화국의 보틀리흐 지역. 이곳에서는 북카프카스 해방을 외치는 체첸 반군과 러시아 정부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이 전투를 취재하고 있었던 필자는 러시아 공수부대원들과 함께 러시아 MI-8헬기를 타고 러시아군 136독립여단 소속 포병이 위치한 ‘당나귀 귀’ 고지로 날아갔다. 이곳에서 러시아군은 맹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탄피는 산처럼 쌓여 있었고, 포신은 붉게 달아 있었다. 야포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T-72 탱크도 계속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1시간 쯤 흘렀을까? 포격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포를 쏘던 병사들이 새로 합류한 공수부대 병사들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식수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수부대 요원들도 급히 오느라 물을 챙겨오지 못했다. ‘아니, 이런…’ 필자도 난감했다. 수통에 물 대신 보드카를 넣어 왔기 때문이었다. 다음 수송 헬기가 올 때까지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보드카로 갈증을 해소해 보았지만, 오히려 더욱 목이 탔다. 고지 바로 밑에 맑은 개울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으나 아무도 물을 뜨러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체첸 저격병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시원해 보이는 그 개울물을 바라보며 그저 마른 침을 삼킬 뿐이었다.

 
러시아의 위험한 ‘청정’ 물 

이 이야기는 전투 상황에서 벌어진 특수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러시아 카프카스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풍부한 수자원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물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산업시설이 없는 깊은 산중의 물이 깨끗할 것이라는 상식은 어긋나곤 한다. 자연상태의 물은 항상 깨끗한 것이 아니다. 비가 와서 흙탕물이 되기도 하고 짐승들의 배설물이나 사체가 떠내려 오기도 한다. 특히 양떼가 한번 지나가면, 그곳의 물을 마시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그곳 여자들의 주된 일과 중의 하나가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눈앞의 맑은 개울물도 내 수통에 넣을 수 없으면 그림의 떡이듯이, 관리되지 않은 수자원은 아직은 ‘자원’일 뿐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피시먼(Fishman)의 <거대한 갈증(The Big Thirt)>에서 인도의 물부족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잘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천연’ 신화에 살고 있다. 찌든 도시 생활을 하면서 청정 자연에 대한 갈망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천연 그대로가 과연 최선일까?
네팔 히말리아 트레킹을 다녀와서 “공기가 너무 좋고 사람들이 너무 순박하다”며 “그곳이야말로 파라다이스”라고 주장하는 어느 서울 의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의사는 또 “비인간적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서울에서 다시 살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면서 자신을 안내하던 네팔 청년이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하기에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얼마나 탄압받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는데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도 했다.

이 의사에게 네팔인의 평균 수명이 얼마이며 왜 네팔인들이 한국으로 오려고 애쓰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의사는 왜 ‘청정무구의 파라다이스’ 네팔이 아닌 ‘비인간적인 서울’에서 굳이 살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네팔에는 의사가 부족한데 그곳에서 봉사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모두가 행복할텐데 말이다. 그런 류의 사람들은 또 흔히 시장경제를 비판하면서 ‘정글’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정글’이야말로 ‘순수한 자연상태’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나라는 ‘물부족 국가’에 해당된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물 자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물 공급 시설이 부족한 것이다. ‘눈앞의 물’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관리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거대한 갈증>을 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사막 한복판에 위치한 라스베가스에서 어떻게 거대한 인공폭포와 상어 수족관을 유지할 수 있는지, 또 역설적으로 호주의 한 도시가 왜 환경운동가들의 오물 재처리장 건설반대 운동 때문에 물부족에 시달리는지 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연은 무조건 그대로 둔다고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찬 네팔의 히말리아 트레킹 지역 마을들과 곳곳을 케이블카로 연결시켜 놓은 스위스의 알프스를 비교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미개발을 칭송하는 위선자들  

<거대한 갈증>은 물부족 문제를 시장경제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지금 세계는 물부족 상태로 접어들고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또 환경오염을 방지하는 것도 ‘자연 그대로의 방치’가 아니라 ‘적절한 관리’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는 최근 최악의 정전사태를 목도했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전기가 부족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니 전기 부족으로 대한민국이 파탄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물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너무나 값싸고 풍부하고 깨끗한 물에 익숙해 있다. 물을 거의 공짜로 생각하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거대한 갈증>은 이러한 사고에 대해 경고한다. 물공급이 중단된다면 우리는 대소변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제 4대강 사업도 마무리에 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4대강 건설에 악무한적으로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데 최근 이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지난 번 광우병 사태 때 그러했던 것처럼...
이러한 일은 비단 최근의 일만이 아니다. 과거 경부고속도로를 뚫을 때도, 포항제철을 건설할 때도 공사현장을 막으며 그 자리에 드러누웠던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환경파괴를 거론하면서 또는 “그런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논리로 개발을 반대해 왔다. 만약 이 사람들 주장대로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건설 자금을 ‘복지’ 기금으로 사용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떠한 모습이 됐을까.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