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태의 본질 - 참을수 없는 종교적 속박에 개혁파 꿈틀
이란 사태의 본질 - 참을수 없는 종교적 속박에 개혁파 꿈틀
  • 미래한국
  • 승인 2009.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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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이란 유혈 시위
▲ 박현도 책임연구원
박현도 서강대 종교연구소 책임연구원

지난 6월 12일 제10대 대통령 선거를 치른 이후 이란이 요동치고 있다. 아흐마디네자드 현직 대통령이 야당 후보 무사비를 압도적 표차로 이겼다는 공식발표가 나온 후 시민들이 부정선거라고 규탄하며 반정부 거리시위에 나서자 정부는 유례없는 유혈강경진압으로 맞서 정국이 혼미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개혁파가 득세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고무적인 것은 이란이 의미 있는 변화의 첫발을 디뎠다는 사실이다. 1979년 이란혁명이 오랜 기간 동안 샤의 일방적 국정 운영에 대한 피로와 분노가 쌓이고 쌓여 폭발했던 것처럼, 이슬람 혁명 이후 종교지도자들과 강경 혁명파가 앗아간 자유를 되찾으려는 갈망이 터져 나왔다는 것은 비록 그 주역이 아직은 소수인 중산층 젊은이들이지만 쉽게 간과하기 어려운 변화다.

1979년 혁명을 통해 2500여년에 걸친 왕정을 무너뜨리고 호메이니의 ‘법학자 통치’ 이론에 따라 건국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요체는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 ‘순나’에 바탕을 둔 이슬람법에 의한 통치다. 알라가 계시한 이슬람법을 가장 잘 해석할 수 있는 자는 종교법학자로, 언론에서 성직자라고 하는 사람이다.

법학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오랜 기간 신학교에서 학문적 수련을 거친 후 법 해석 능력을 인정받아야 비로소 법해석학자(무즈타히드)라는 칭호를 얻는다. 해석 능력의 탁월함 정도에 따라 ‘호자톨레슬람 (이슬람지식의 권위자)’, ‘아야톨라 (알라의 증거)’ 등의 명예로운 칭호가 붙는다. 가장 높은 영예는 ‘아야톨라홀 오즈마 (?아야톨라)’다.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뽑힌 86명의 종교법학자들로 구성된 전문가회의에서 이란의 최고지도자를 선출한다.
공화국의 첫 최고지도자는 호메이니였고, 지금은 하메네이다. 최고지도자는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외교, 국방, 언론, 사법 등 실질적으로 이란 사회의 권력을 통제하는 제왕적 국가원수다. 그는 군통수권자로 혁명수비대 사령관과 군참모총장 임명권, 전쟁 선포권을 가지고 있다.

국영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은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관리하는데 최고지도자, 사법부 수장, 국회에서 각각 2명씩 임명한다. 그런데 사법부 수장은 최고지도자가 임명하므로 사실상 최고지도자 몫은 4명이고 이들 위원의 해임권 역시 그에게 있다. 사법부의 경우 최고지도자가 지명하는 수장이 대법원장과 검찰총장을 임명한다.

더 나아가 최고지도자의 권력은 입법부분에 까지 미친다. 이란은 우리처럼 국민들이 국회의원을 직접 선출하지만 국회에서 만든 법이 바로 국법이 되지 못한다. 국회가 만든 법에 대해 12명으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가 이슬람법에 맞는지 다시 심사한 후 통과시키거나 거부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12명의 위원 중 6명은 최고지도자가 종교법학들 중에서 뽑고, 나머지 6명은 최고지도자가 임명하는 사법부 수장이 이슬람법에 정통한 일반 비종교지도자 법학자 중에서 선출한다.

문제는 입법효율성이다. 국회에서 만든 법의 상당수가 이슬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헌법수호위원회에서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고지도자가 임명하는 3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정조정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들은 논란이 되는 법을 심사할 뿐 아니라 국정전반을 최고지도자와 상의한다.

이처럼 종교법학자가 국가권력을 쥐고 흔드는 것은 수니파나 시아파 모두 통틀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전통적으로 이슬람 법학자들은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지극히 꺼렸다. 제도권으로 나가면 양심적으로 법을 공부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늘 재야에 머물렀다. 따라서 현 이란 체제는 이슬람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이러한 체제 아래 이란 대통령은 제한적 행정력만 행사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다. 입후보하려고 해도 헌법수호위원회의 까다로운 심의를 통과해야만 가능하고, 국민들이 직접 선출하기는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최고지도자에 있고 제한적 행정력 밖에는 없다. 이런 자리를 두고 부정선거라고 목메어 외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이 숨막히게 좁은 이슬람법 해석으로 일상을 옥죄는 너무나도 ‘경건한’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대통령 밖에 없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8년 동안 체제 내에서 개혁의 바람을 일으켰던 하타미 대통령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하타미 역시 “헌법수행이라는 가장 큰 책무를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이 저에게는 없습니다”라고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강경파가 사실상 이란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타미 이후 2005년 아흐마디네자드가 집권하자 변화는 멎었고 저항하는 언론은 폐간되었으며 반정부 인사는 탄압받기 시작하였다.

1979년 혁명 당시 3,100만이었던 이란 인구는 지금 7,000만에 달한다. 현재 인구의 반 이상이 혁명 이후에 태어난 세대다. 이들은 이슬람은 존중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전횡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에 대한 의식이 강한 세대다.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 여자들 옷차림이나 단속하고, 록과 헤비메탈을 듣는 이들을 사탄 숭배자로 체포하는 등 자유로운 의식과 행동을 종교의 이름으로 규제하는 종교지도자들의 꽉 막힌 사고와 아흐마디네자드와 같은 강경파 혁명 세대의 구태의연함은 참을 수 없는 속박일 뿐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자유와 개방을 꿈꾸며 거리로 나선 젊은이들이 중산층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원유수출로 이란은 부자인 것 같지만 사회주의 경제체제 아래 특별히 발전한 산업구조를 지니지 못한 관계로 국민 대다수가 여전히 1차 산업에 종사하고 가난하며 의식수준이 높지 못하다.

빈곤층을 기반으로 한 아흐마디네자드의 대중선동 정치와 18만에 달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설교가 효과를 발휘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욱이 종교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곧 출세를 보장 받는 지름길이니 이란 성직자들의 본거지인 꼼(Qom)을 비롯한 주요 도시 종교학교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고위성직자들 사이에 균열이 있다지만 체제 내 권력 다툼이지 탈정치나 탈체제는 아니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정치참여에 부정적인 성직자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출세지향의 성직희망 학생들과 종교인들의 이중적인 삶의 태도에 대한 냉소적 기류가 대중문화에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달빛아래에서’라는 영화에서 한 신학교 성직자가가 성직자 옷 대신 일반 복장을 하고 밖에 나선다. 영화 주인공인 신학생이 의아하게 여기자 그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이유로 들면서 전에 성직자 옷을 입고 택시를 타려고 했을 때 기사가 소리치며 한 말을 들려준다: “무슨일이요? 다른 성직자들이 다들 먼저 벤츠를 타고 가 버렸소?”

터키를 제외하면 이란은 현재 중동 이슬람문명권에서 가장 앞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국가이기에 이웃한 전제왕정이나 독재정권국가는 몹시 불편하다. 자유민주주의 세계에 가장 바람직한 이란의 변화는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세속적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 길은 아직 멀기에 지금은 개혁파가 힘을 받는 것이 급선무다. 그러면 서방과 관계도 부드러워지고, 북한과 이란의 군사적 연계성 때문에 찜찜한 우리 마음도 편해질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강경파가 군 요직을 장악하고 있으니, 지금 당장은 자유 이란인을 위한 고레스의 출현을 간절히 바라는 것 외에 다른 수는 없을 것 같다.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사야 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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