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황제’‘수수께끼 사나이’ 마이클 잭슨 떠나다
‘팝의 황제’‘수수께끼 사나이’ 마이클 잭슨 떠나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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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국민 64%, 지나친 언론 보도 불만·음악성은 극찬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죽음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그의 음악은 뛰어났다. 하지만 사생활은 아니다”이다. 음악적으로 그가 남긴 업적은 충분히 기리고 높이지만 ‘소년 성희롱’ 등 그의 사생활은 지탄받아야 할 오명이라는 시각이 분명한 것이다.

마이클 잭슨이 죽은 지난 6월 25일(미국 시각)이후 며칠 동안 미국 언론은 온통 마이클 잭슨에 대한 얘기로 뒤덮였다.

미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추모하며 정확한 사인(死因)을 찾는 소식들과 장례 일정, 남은 3명의 자녀들 등 그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미국의 유력 시사주간 ‘타임’은 64페이지 분량으로 마이클 잭슨의 일생을 다룬 특집호를 발행했는데 타임의 이런 특집호는 9·11 테러 후 처음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 미국 각계 인사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미 연예인들은 자신의 공연과 TV 쇼에서 전성기 시절 마이클 잭슨의 음악과 춤을 따라하며 그를 추모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팬들은 그의 앨범을 다시 구입하고 그의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며 그를 기리고 있다. 그가 죽은 후 1주일 동안 미국에서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이 42만2,000여장이 팔렸고 그의 대표적 뮤직비디오인인 14분짜리 ‘스릴러(Thriller)’는 840만명이 본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클 잭슨 웹사이트(www.michaeljackson.com)에는 44만6,000여 명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남겼고 7월 7일 LA 스테이플 경기장에서 열리는 마이클 잭슨 추모공연 무료티켓을 받기 위해 온라인으로 160만명의 팬이 몰리기도 했다. 이 가운데 1만7,500명만 입장이 가능해 183대 1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황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2세 때 ‘잭슨 5’으로 음악을 시작하고 성인이 되어 솔로로 첫 앨범 ‘Off the Wall’(1979년)을 낸 후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판매된 그의 앨범 수는 7억5,000만장이다. 그는 ‘잭슨 5’ 시절 이미 ‘ABC’, ‘I Want You Back’, ‘I’ll Be There’ 등을 통해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상인 그래미(Grammy)상을 수상했다.

1982년 낸 ‘Thriller’는 그를 팝의 황제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앨범이었다. 그의 나이 24세에 낸 이 앨범에는 ‘Billie Jean’, ‘Beat it’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노래들을 담고 있는데 이 앨범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4,000만장이 팔렸다. 앨범 ‘Thriller’는 8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그가 공연에서 보여준 ‘Moon Walk’이라는 뒷걸음 춤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가 공연 때마다 한 손에 흰색 장갑을 끼고 나오는 것 역시 마이클 잭슨 하면 떠오르는 패션이 되기도 했다. 1987년 ‘Bad’ 앨범 역시 3,000만장이 팔리면서 마이클 잭슨은 명실상부한 ‘팝의 황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의 이룩한 음악적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풍기문란’한 행태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또한 크다.

마이클 잭슨은 30대 이후 기이한 ‘수수께끼의 사람’으로 변했다. 반복되는 성형수술을 통해 코가 점점 줄어들었고 피부색은 갈색에서 귀신처럼 창백한 흰색으로 바뀌었다. 몸은 계속 말랐고 목소리가 변해 고음의 속삭이는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대중 앞에서는 전신을 가리는 옷 등 이상한 옷을 입고 다녔다.

이 가운데 1993년 13세 소년을 성희롱했다는 소송에 말렸다. 그는 1988년 1,460만 달러를 들여 지은 놀이동산 ‘네버랜드’에 10세에서 13세 사이의 소년들을 초대해 같이 지냈는데 1993년 13세 소년이 마이클 잭슨이 자기를 성희롱했다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소송은 다음해에 마이클 잭슨이 그 소년의 가족에 약 1,500만 달러에서 2,400만 달러 사이의 돈을 지급하면서 합의로 끝났다. 이 때부터 마이클 잭슨은 ‘소년상대 성도착증 환자’라는 오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자 프레슬리와 결혼했지만 2년 뒤 이혼하고 자신의 피부과 의사 비서인 데비 로웨와 결혼해 아이 둘을 낳은 후 이혼했다. 로웨는 이 결혼은 철저히 애를 낳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마이클 잭슨의 셋째 아들은 다른 대리모를 통해 낳았다.

그는 2002년 담요에 싼 자신의 아기를 발코니 난간 밖으로 들어 떨어질 뻔해 사람들의 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2003년 한 인터뷰에서 남자 소년들과 침대에서 같이 잤다고 시인했고 2005년 13세의 다른 소년이 성희롱을 당했다며 마이클 잭슨을 소송했다. 판사는 마이클 잭슨이 무죄라고 판결했지만 이를 계기로 그의 이미지는 추락, 그는 재판 후 중동으로 가서 한동안 머물다 올 정도였다.

마이클 잭슨은 방탕한 사생활, 막대한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 5,000만 달러의 빚더미를 남기고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클 잭슨의 이러한 말로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미국에서 크다. 여론조사기관인 퓨(Pew)리서치센터는 지난 7월 1일 미국인들의 64%가 언론들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너무 많이 다룬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애도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보통 미 대통령들은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끼진 유명 미국인이 죽으면 이를 애도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해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흑인사회에서 항의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런 항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마이클 잭슨이 연예인으로 보여준 탁월한 재능은 여러 면에서 그의 비극적이고 슬픈 개인적 삶과 함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인들 중 51%는 마이클 잭슨의 팬이라고 했지만 49%는 아니라고 답했다. CNN이 지난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미 성인 1,0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성, 젊은이, 민주당원들이 마이클 잭슨의 팬이라고 답했고 남성, 50대 이상 미국인, 공화당원은 팬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

워싱턴·이상민 특파원 genuinevalu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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