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의 추억
베를린 장벽 붕괴의 추억
  • 미래한국
  • 승인 2009.06.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문예춘추사 발행 <제군> 2009년 6월호 (최종호)
▲ 제군 6월호(최종호)표지
1980년 4월호 이후 게재된 권두칼럼에서 엄선한 특집 중 1990년 1월호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장벽 파편을 하나씩 주워 조용히 마음 속에 간직해 두자. 장벽을 넘으려다 죽임을 당한 200명을 추모하기 위해 200개의 십자가를 마음 한구석에 세워두자. 그 언젠가 이토록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으려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전후 4개국의 공동관리 아래 있었던 독일의 수도는 한반도와 병행해 미·소 양 핵 초강대국이 냉전으로 들어가는 도화선이 됐다. 그후 자주 첨예한 대치 상황까지 가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 동서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베를린의 미·영·프 관리지구에서의 통화개혁에 반발한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한 것은 1948년 3월이었다. 당시 소련은 아직 핵이 없었다. 동독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서베를린을 지키기 위해 연합국은 물자의 대공수작전에 나섰다. 서베를린을 끝까지 지키려는 서방의 강한 의지가 스탈린의 서베를린 축출작전을 이긴 것이다.

독일은 전화에서 회복되고 서베를린은 자유의 쇼윈도우가 됐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다시금 세계대전 발발 위기가 왔다.

1958년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는 서베를린이라는 ‘유럽의 심장에 꽂힌 가시를 뽑을 때’가 왔다고 선언했다. 세베를린을 무장해제해 자유도시로 하라 그렇지 않으면 소련은 동독과 평화조약을 맺겠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서베를린은 소멸된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자유도시안을 배척했지만 전후 15년이 지나서도 베를린에 여전히 외국 군대가 주둔한다는 ‘이상(異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는 케네디 대통령에게로 넘어왔다. 1961년 케네디·흐루시초프 회담에서 흐루시초프는 계속 위협적인 말을 했다. 그렇지만 케네디는 버텼다.

“서베를린을 둘러싸고 바야흐로 서방의 엄숙한 약속과 소련의 야심이 정면으로 대립하게 됐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서서히라도 힘으로 우리를 서베를린에서 쫓아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케네디 연설 바로 뒤 흐루시초프는 베를린 장벽을 쌓게 했다. 당시에도 매일 수백,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서베를린으로 넘어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소련을 웃음거리가 되게 했다. 28년 전의 일이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단속이 느슨해지고 베를린 장벽의 존재는 무의미하게 됐다. 장벽 구축 책임자 호네커의 뒤를 따르듯 장벽은 무너졌다. 힘으로 자유를 빼앗으려는 자에게는 끝까지 힘으로 대항한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독일이 있게 했다.

케네디는 1962년 6월 서베를린에 갔다. 시민의 5분의 3이 거리에 나와 베를린을 구해준 영웅을 맞이했다. 케네디는 그 장벽 앞에서 불덩어리 같은 연설을 했다.

“세상에는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베를린에 와서 보라. 공산주의는 미래 희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베를린에 와서 보라.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베를린에 와서 보라. 공산주의는 나쁜 제도이지만 경제적 진보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베를린에 와서 보라. 자유인은 그 거주하는 곳이 어디든 모두 베를린인이다. 한 자유인으로서 나도 ‘Ich bin ein Berliner.’이라는 말이 자랑스럽다. #

번역·이영훈 객원해설위원·교포교육연구소 소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