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사건 20주년, 그 유업은 자유인가 번영인가
천안문사건 20주년, 그 유업은 자유인가 번영인가
  • 미래한국
  • 승인 2009.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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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풍향계_유럽
1989년 6월 4일은 중국 역사에 기록될 날이다.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잔혹한 일 중의 하나인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 지배 아래 일어난 대약진운동(1958~1963)(주1)으로 수백만 명이 희생됐고 문화혁명(1966~1976)(주2)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줬다.

천안문사건은 살인적이고 가공스러운 국가권력이 행사된 것이라는 데 초점이 있다. 공산당 독점 권력이 정점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산당의 노련한 지도자 등소평이 무력으로 공산당 지배를 확고히 하느냐 아니면 민주세력을 흡수해 지난 40년 동안 중국 인민의 생활을 지배해온 공산당 조직의 힘이 연약해질 위험을 감수하느냐를 선택해야 할 시점이었다.

등소평은 무력을 선택함으로써 개혁주의자로서 그 당시 동구권에 불길같이 번지던 자유화 물결을 중국에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던 서방의 기대를 저버렸다. 한편 등소평은 중국 인민들로부터 존경심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경제의 자유화를 위해 힘썼다. 인생의 말로에 있는 등소평으로서는 과감한 결정이었다. 20년이 지난 후 엄청난 효과를 냈다고 중국 인민들은 믿고 있다.

등소평의 업적은 소련 탱크의 지원을 받아 권좌에 오른 야노스 카타르(주3)의 헝가리식 공산주의보다 컸다. 오늘날 중국 인민들은 한 세대 전에는 꿈도 못꿨던 직업이나 거주, TV 채널, 휴대폰 통신회사의 선택과 같은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사복 경관이 천안문 광장을 순찰하고 인터넷이 통제되며 20년 전 사건의 증인들은 일정 기간 내륙 오지나 농촌으로 추방당하고 있다. 아직도 자유와 민주주의 부재가 중국에 부담이 되고 있다.

자유가 없기 때문에 중국의 앞날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인들은 겨우 암암리에 빗대어 표현하는 정도만 허용된다.

이 때문에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중국은 국익에 손해를 보고 있다.

첫째, 외교정책이다. 중국은 한 세대도 안 돼 세계 강국으로 발전했고 지금은 G2로 미국과 견주는 국가가 됐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당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기존 체제에 관한 논의를 제한하는 한, 방대한 지식과 지성의 역량을 동원, 가동할 수 없다.

둘째, 지적 자질도 훼손되고 있다. 사회 기반을 탐구할 진정한 자유가 없는 한 중국은 개혁될 수 없다. 모방과 개발은 가능하겠지만 경쟁국을 앞서 가거나 세계를 위한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다.

셋째, 중국 인민들의 종교적, 지역적 특성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문제이다. 1989년에는 학생들이 국가의 공권력에 포위돼 있었지만 오늘날 공산당 당원들은 자금성 인근의 북경 본부에 고립돼 인민들에게 포위돼 있다.

더 타임스 6/4

(주1) 대약진운동(1958~1961)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모택동이 중국의 경제 및 사회 개혁운동으로 중국의 방대한 인구를 활용해 중국을 원시적 토착농업 경제에서 농업화와 공업화 병진 과정을 통해 현대식 공산주의 사회로 변환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이 운동은 기아의 확산으로 약 4,000만 명이 굶어 죽은 큰 재앙으로 끝났다.

(주2) The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이 운동은 1966년 5월 모택동의 제창으로 시작. 부르주아 계급분자들을 공산당으로부터 축출해야 하고 이를 위해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혁명후의 계급투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됐다. 모택동 자신이 시도한 대약진운동에서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와 당이 권력과 영향력이 위축되자 이를 회복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을 ‘10년 동란’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중국 공산당은 1981년에 이를 모택동의 과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주 3) 야노스 카다르(Janos Kadar) (1912~1989)
헝가리 공산당 당수(1956~1988), 총리 두 차례 역임(1956~1958, 1961~1965) 1956년 임레 나지(Imre Nagy) 총리의 반 소련정부를 친 소련정부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이 역할을 했다. 그는 소련을 설득해 소련군대를 철수시키고 헝가리에 내부적으로 극히 적은 정도의 독립성을 부여하도록 했다. #

정리/정철 객원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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