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은의 서울 나들이] 한양 천도할 때 하륜이 주산으로 추천한 안산
[김경은의 서울 나들이] 한양 천도할 때 하륜이 주산으로 추천한 안산
  • 김경은  작가 
  • 승인 2024.01.1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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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6일. 가을을 재촉하는 비를 맞으며 안산을 찾았다. 우중 산행이다. 생소한 만큼 신선했다. 안산의 숲 향기가 싱그러웠다. 안개 속의 실루엣은 더 신비로웠다. 

봉우산, 길마재, 안현, 모악산, 무악산…. 안산의 다른 이름이다. 안산이 이렇게 많은 이름을 가진 만큼 다양한 사연을 갖고 있다. 안산은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다. 안산과 인왕산은 서울 서부의 양대 명산이다. 안산은 인왕산에 비해 산세가 순하다. 인왕산을 양산(陽山), 안산을 음산(陰山)이라고 하는 이유다.

안산에서 본 인왕산
안산에서 본 인왕산

인왕산(338m)이 40여m 높다. 안산은 296m다. 인왕산 전체가 화강암 바위다. 반면 안산은 ‘동네 앞산(安山)’ 같다. 두 개의 봉우리(봉수대와 승전봉)가 완만한 모양으로 서 있다. 마치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말 등에 얹는 기구, 길마를 닮았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길마재다. 한자로 표현하면 안산(鞍山)이다. 

탐방 코스의 들머리는 무악재 하늘다리다. 다리가 있는 곳이 바로 무악재 마루다. 무악재 하늘다리는 안산과 인왕산을 잇는 생태연결로다. 야생동물의 이동을 돕기 위해 2017년에 건설된 아치형 오버패스다. 무학재 하늘다리가 놓인 후 안산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산양이 나타났다. 2018년 4월에 이어 2021년 10월 두 차례나 주민 신고가 있었다. 산양이 무악재 하늘다리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한다. 인왕산과 용마산 등에서 사는 산양은 멸종 위기의 천연기념물이다. 

무악재 하늘다리는 단지 동물이동을 원활하게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북한산과 인왕산 그리고 안산과 백련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기맥을 이었다. 1972년 서울과 임진각을 잇는 통일로가 건설되면서 막힌 한북정맥이 재결합하게 됐다. 

무악재는 안산과 인왕산 골짜기가 만나는 움푹 들어간 곳이다. 꽤 가파른 고개를 이룬다. 그곳에 길이 있었다. 의주대로(1,080리)라고 했다.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 하나다. 말이 ‘대로’이지 실제 길은 좁고 험한 산길이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안산 일대를 그린 ‘서교전의(西郊餞儀)’를 보면 무악재 고갯길이 두 갈래였다.

안산 중턱을 돌아 나오는 사현(沙峴)과 인왕산과 안산이 만나는 소현(小峴·무악재)이다. ‘서교전의’에도 소현은 하나의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좁은 길이라는 의미다. 일제 강점기에 무악재 고갯길은 신작로로 바뀌었다. 신작로가 만들어진 뒤에 사현은 사라졌다. 

무악재는 서북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었다. 우리나라 사신이나 중국 사신이 오가던 사행로였다. 1488년 조선을 다녀간 명나라 사신인 동월(董越)이 남긴 ‘조선부(朝鮮賦)’에 무악재의 지세에 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천 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겨우 말 한 필만 지날 수 있겠다”라는 게 그것이다. 당시 무악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안산의 명물 메타세쿼이아
안산의 명물 메타세쿼이아

무악재는 조선시대 9대 간선도로 중의 하나 

험준한 고개에는 겹겹이 애환과 고달픈 역사가 쌓이기 마련이다. 특히 호환(虎患)이 적지 않았다. 호랑이가 출몰이 잦은 탓이다. 조선 조정은 이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무악재 입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일명 ‘유인막(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고갯길을 여럿이 넘기 위해서 행인들을 모으던 장소)’이다.

이곳에 모인 행인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무악재를 넘었다. 사람을 모아서 재를 넘는다고 해서 ‘모아재’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호환보다 더 무서운 게 따로 있었다. 호위 병사가 호송을 명목으로 원치전(越峙錢)이라는 통행세를 받았다. 이를 두고 “무악재 호랑이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라는 말이 생겼다. 얼마나 갈취가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무악재 하늘다리에서 안산둘레길을 향해 걸었다. ‘안산 북카페’가 나타났다. 안산 자락길 산책 중 ‘무악 동봉수대’를 오르고 ‘봉원사’로 내려갔다. 안산 자락길은 안산 허리를 두른 순환형 둘레길이다. 길이는 7km다. 특히 전 구간이 목재 데크와 흙길로 이어져 있다.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다. 

북카페에서 왼쪽으로 가면 능안정, 오른쪽으로 가면 무악정이 나온다. 무악정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자락에는 젓나무, 소나무, 산딸나무, 쉬나무, 팥배나무, 잣나무, 벚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당느릅나무, 아까시나무, 뽕나무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이름 모르는 나무와 풀이 아름다운 안산을 만든다. 산벼랑에는 화단 펜스처럼 가꾼 황매화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안산은 거대한 식물원이다. 

자락길을 걷는다. 인척도 없다. 홀로 산책을 즐긴다. 발걸음 소리마저 빗소리에 묻힌다. 빗물에 젖은 나뭇가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 간간이 부는 한 줄기 바람이 한 조금의 소나기를 만든다. 굽이굽이 돌아가던 자락길이 닿은 곳은 ‘안산길 전망대’다.

정면에 보이는 산이 인왕산이다. 울퉁불퉁한 속살 근육을 구름에 감추고 있다. 맑은 날에 기차바위, 선바위, 호랑이 바위 등 기암괴석은 물론 인왕상을 둘러싼 한양 도성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인왕산 뒤의 먼 산이 북한산이다. 아리랑 가락처럼 이어지는 보현봉, 문수봉, 형제봉, 나한봉, 나월봉,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 족두리봉 능선은 한편의 파노라마다. 

“산에도 운명이 있는 것일까?” 인왕산 한양 도성이 필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사실 안산도 한양의 주산이 될 뻔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한양 천도를 결정했다. 도성을 어디에 두느냐는 천도 결심만큼 중요한 일이다. 신하들 사이에 팽팽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정도전은 백악산(북악산), 무학도사는 공주 계룡산, 하륜은 무악산(안산)을 주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조는 공주 계룡산을 선택했다. 10개월 동안 공사가 진행됐다. 이 공사를 가로막은 것은 하륜의 ‘지리신법’이라는 새로운 풍수 이론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정도전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하륜은 무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신촌 일대에 도성을 지으려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종수와 김미경이 함께 쓴 ‘서서울에 가면 우리는’에는 “무엇보다 무악의 조운(漕運), 즉 물류를 주목했다”라면서 “강화도를 통과한 세곡선(稅穀船)이 인접한 양화진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세계 중심이던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위해 교통이 편한 곳에 도성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태조의 분신이던 정도전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촌 일대는 땅이 좁아 도성이 들어설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방원의 오른팔이 된 하륜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1차 왕자의 난 뒤 이방원의 도움으로 권좌에 오른 정종은 개경으로 환도했다. 다시 도성 입지와 관련한 논란이 재개됐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안산주산론을 수용했다. 하륜의 편을 든 것이다. 하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하륜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서울에 가면 우리는’은 그 이유를 “경복궁을 둔 채 새로운 도성을 지을 만큼 재정적 여유가 없어서”라고 설명했다. 도성이 되지 못한 신촌은 나중에 사학의 전당이 됐다. 서울에 입성 1호 목사인 H. G. 언더우드는 형인 존 언더우드 도움을 받아 당시 고양군 연희면(지금 연희동)에 연희전문을 세웠다. 선교사 스크랜턴이 창설한 이화학당도 1935년 신촌으로 이전했다. 안산의 좋은 기운 덕일까. 이화여대는 한국 1호 종합대학이 됐다. 이 밖에도 서강대, 경기대, 명지대, 홍익대, 추계대 등 유수한 대학이 신촌에 자리하고 있다. 

자락길 전망대를 벗어났다. 다시 안산 자락길을 따라 20여 분 걸었다. 봉수대로 안내하는 표식이 나왔다. 너와집 쉼터와 안산 ‘초록숲길’을 지나 봉수대에 도착했다. 1km 남짓이다. 봉수대의 정식 명칭은 ‘무악 동봉수대’다. ‘무악 동봉수대 터’라는 푯말이 보였다. 푯말은 “동봉수대는 동, 서 두 개의 봉수대 중 하나”라고 적혀 있다.

봉수대는 조선시대 군사 통신시설이다. 봉수대를 이용해 변방의 위급한 상황을 전달했다. 봉수대에서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웠다. 봉수대는 똑같은 신호를 이웃 봉수대에 전했다. 전국에 673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목면산(남산)에서 집결했다. 목면산에는 5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이는 5개의 봉수 노선이 있다는 의미다. 무악 동봉수대는 그중 3노선이다. 남산으로 가기 직전의 봉수대다. 평안도 강계에서 국경 따라 의주로 온 뒤 황해도와 경기도 내륙을 관통하는 노선이다. 

안산 정상에 있는 동봉수대
안산 정상에 있는 동봉수대

인조반정 때 군사를 총지휘한 이괄은 안산에서 패퇴 운명 맞아 

하얀 벽돌로 쌓은 무악 동봉수대에 올랐다. 등고가 높아질수록 구름이 짙어진다. 서울 전경은 고사하고 겨우 눈에 서 있는 나무들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왜 이곳에 봉수대가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안산 정상은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입지다. 남산은 지척이다. 또 사방으로 시야가 틔어 있다. 구름이 걷히면, 동쪽으로는 잠실롯데월드타워가, 서쪽으로는 일산 위브더제니스가 선명하게 보인다. 산지가 많은 자연조건을 역이용한 유용한 통신시설인 셈이다. 

필자는 봉수제도의 한계를 몸으로 확인했다. 그렇다. 날씨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약점도 앉고 있다. 봉수 담당자의 일탈이 그것이다. 통신수단인 봉화가 작동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괄의 난도 이런 허점을 드러낸 사건이 있었다. 이괄의 난은 조선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대사건이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지방 반란군이 잠시나마 도성을 점령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반란군이 평안도 영변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한양 도성까지 도달하는 데 17일이 걸렸다. 순식간에 평양(황주전투)과 개성(마탄전투) 방어선을 뚫었다. 

파죽지세로 한양에 도착했다. 민심은 이미 인조를 떠났다. 부패하고 무능한 조정에 민심이 돌아선 탓이다. 당시 민심 이반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백성은 반란군 기마병이 지나는 길에 황토를 뿌려줬다. 반면 인조와 조정에 대한 눈길은 싸늘했다.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공주로 파천하려고 했다. 단 한 명의 뱃사공도 인조를 위해 배를 띄우지 않았다. 뱃사공의 마음이나 봉수군의 마음이나 다를 바 없던 셈이다. 그런 지경에서 봉화가 제대로 작동됐을 리 만무하다. 

이괄의 운명은 안산에서 끝이 난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다. 인조반정은 군사쿠데타였다. 군사를 총지휘한 사람이 바로 이괄이다. 그는 적절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2등 공신이 됐다. 심지어 평안도 영변으로 쫓겨났다. 부원수 겸 평안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탓이다.

이에 불만을 가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이괄의 난, 1624년). 반란군은 한양 도성에 입성한 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에 지휘부를 차렸다. 반란군을 추격하던 관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됐다. 그게 바로 안현(무악재)전투다. 이괄은 기고만장했다. 백성에게 “인왕산 산성에서 관군과의 싸움을 구경하라”라고 호언장담했다. 

장만 대원수를 중심으로 한 관군이 안산 고지를 선점했다. 그곳이 바로 무악 동봉수대가 서 있는 가파른 산기슭이었다. 불리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군사력에서 관군을 압도했다. 톨스토이의 말처럼 불행은 하늘에서 오는 것일까. 반란군이 1624년 2월 21일 이괄의 공격 개시 명령만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때 산꼭대기에서 산기슭으로 돌풍이 불었다. 한순간 순풍(동풍)이 역풍(서풍)으로 바뀐 것이었다. 반란군은 세찬 바람 때문에 조총과 화포에 불을 댕기지도 못했다. 화력이 부족했던 관군은 ‘신무기’를 활용했다. 고춧가루를 뿌렸다. 반란군은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다. 이괄을 향한 민심도 바람에 날리는 고춧가루처럼 사라졌다. 관군이 포진했던 안산 바위 능선이 바로 승전봉이다. 

‘만약’ 이괄의 난이 성공했다면 조선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니 이괄의 난의 원인이 됐던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만약’이란 단어를 떠올린 것은 인왕산 자락에 있는 홍제원 힐스테이트 때문이다. 아파트 이름으로 사용된 ‘홍제원’은 조선 역사의 변곡점이 된 역사의 현장이다. 이괄이 배반한 부하들에게 목이 베이기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제원이 바로 이괄과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능양군)를 왕으로 만든 정변(인종반정, 1623년)을 획책한 장소다. 

홍제원(弘濟院)의 ‘원(院)’은 공무 수행자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편의시설이다. 한양 도성 밖에 원은 4곳(홍제원, 이태원, 보제원, 전관원)이 있었다. 전국에 1,310개가 있었다. 그중에서 무악재에 있던 홍제원은 격이 다른 시설이었다. 의주를 통해서 오는 중국 사신의 숙소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왕이 중국에 보내는 사신을 직접 전송하기도 했던 중요한 국가시설이다. 물론 함경도와 평안도 등에서 일하던 관리도 이용을 자주 이용했다. 북방 방어책임을 맡았던 이괄과 한명련 등 그의 추종자가 홍제원에서 만나 반정 거사를 꾀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봉수대에서 무악정 방향으로 내려왔다. 안산의 자랑인 메타세쿼이아 군락지를 지났다.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절로 고개가 젖혀진다. 심호흡도 터져 나온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봉원사로 내려왔다. 

대한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위엄 있고 장중한 맛이 없다. 서민 친화적이다. 사찰의 정문 격인 일주문도 없다. 민가에 접해 있다. 민가처럼 보인 가옥은 승려가 기거하는 요사체이다. 태고종은 승려의 결혼을 인정하는 불교 종파다. 본당 격인 삼천불전 앞에 앙상한 뼈대를 드러낸 고목(느티나무 수령 450년)은 스산한 느낌을 줬다. 봉원사 느티나무는 수려한 멋이 없다. 꼬이고 휘어 있다. 봉원사의 기구하면서도 끈질긴 역사를 닮은 듯하다. 봉원사는 889년 도선국사가 연세대 터에 세웠다. 

당시 이름은 반야사였다. 조선시대는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숭유억불의 정책을 폈던 조선, 그것도 한양 인근에서 당당하게 명맥을 유지했던 이유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1651년(효종)에 중건했다. 1748년 안산으로 옮겨 복원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현란한 빛을 발했다. 개화파의 선구자인 이동인 선사가 수행한 곳이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가 이동인 선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1908년 봉원사에서 한글학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봉원사는 한국 불교의 전통 의식인 범패와 영산재가 전승 보전되는 절이다. 특히 영산재는 석가모니가 영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재현한 행사,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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