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실종된 정치권의 '민생'
[심층분석] 실종된 정치권의 '민생'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4.10.0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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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취업에 실패한 27세 청년 A씨는 친구의 권유로 2년 전 서울로 올라와 택배기사를 시작했다. 열심히 한 결과 어느 정도 수입을 얻었고 3년 정도 더 해서 목돈을 마련하면 고향에 내려가 하우스 재배를 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던 A씨는 근로자는 월세공제 혜택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올해 자신의 종합소득신고를 할 때 기대를 가졌다. 서울에서 매달 50만 원가량 월세를 냈던 A씨는 그러나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월급을 받는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같은 직업은 월세 공제를 받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세무서를 찾아갔다가 이해할 수 없는 설명만 들은 A씨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냈고 이에 기획재정부는 “근로소득자는 자영업자 같은 사업소득자에 비해 소득이 대부분 노출돼 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높은 점을 고려해 근로소득자에게만 별도의 공제 혜택을 준다”는 같은 답을 들었다. A씨는 원천징수를 제외하고 입금 받으며 성실히 세금 신고를 했지만 그의 프리랜서 소득은 불투명하다는 것이 정부의 시각인 것이다. 

A씨는 분통이 터졌다. 택배를 하는 자신을 자영업 변호사나 의사와 같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019 근로소득 분포’에 따르면 근로소득자는 1916만 명,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68%다. 소득활동을 하는 인구 중 약 30%는 월세 세액공제 대상이 아니다. 이들 가운데 A씨와 같은 택배기사, 학원강사들이 있고 특히 IT 개발자들이 있다. 청년층들 가운데 이러한 이들이 모두 불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민생고를 겪고 있다. 

최근 민생이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정쟁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다. 서민들의 생활고를 높이는 물가와 이자율은 방치되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1월 3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3 대한민국 소상공인대회 개막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 연합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해 11월 3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3 대한민국 소상공인대회 개막식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 연합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올해 3월 발표한 ‘엥겔지수 국제 비교 및 시사점’ 보고서에 의하면 2021년 한국의 엥겔지수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에 비해 1.4%포인트 증가했다. 같은 기간 미국·영국·독일 등 G5 국가 엥겔지수 상승 폭은 평균 0.9%포인트로 한국이 이들에 비해 엥겔지수가 더 가파르게 올랐다. 이 상황은 올해에도 계속됐다. 

'정쟁'에서 '민생'으로

나라별 엥겔지수 상승 폭은 영국 1.2%포인트, 독일 1.0%포인트, 일본 0.9%포인트, 프랑스 0.8%포인트, 미국 0.4%포인트 순으로 모두 한국보다 작었다. 한국은 엥겔지수가 작게 오른 미국과 비교했을 때 3배 이상 크게 올랐다. 

식품 가격 급등 등으로 엥겔지수가 높아지면 저소득층의 생계가 특히 어려워진다. 가처분소득의 크기가 작은 저소득층은 식료품 지출 비용이 증가하면 다른 목적의 소비로 사용 가능한 자금의 비율이 고소득층에 비해 더 크게 하락하기 때문이다. 

실제 코로나19 이후 식료품 지출 비용 상승률은 저소득층(소득 1분위)이 고소득층(소득 5분위)의 1.1배 수준이지만, 식료품비 증가에 따른 가용자금 감소율은 저소득층(5.7%)이 고소득층(1.5%)의 4.8배 수준에 달했다. 

추광호 한경연 경제정책실장은 “생계 유지와 직접 연관된 식품 가격이 오를 경우 저소득층의 피해가 커진다”라며, “농산물 자급능력 확충,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한 식품 물가 상승 폭을 최소화하여 취약계층의 생활비 부담을 완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통계청의 분석도 다르지 않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최근 도소매, 숙박음식업 등이 부진하면서 지난 10월 서비스업 생산 증가 폭이 전년 동월 대비 기준 32개월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소매 판매도 4% 이상 줄면서 상품 판매 쪽도 위축되고 있다. 고금리·고물가로 실질소득이 줄면서 향후 소비 회복 전망도 밝지 않아 소상공인 등 서민경제의 어려움이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문제는 고금리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물가도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어 향후 소비 전망도 밝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0.2%(3분기 기준)로 높은 상황에서 먹거리를 중심으로 물가 상승세도 이어지고 있어 민간 소비 여력이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도 최근 “고금리 영향으로 소비 등 내수 회복 속도가 생각보다 많이 느려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최근 소비 위축이 도소매업·숙박음식업 등을 중심으로 심화하고 있어 소상공인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에도 우리 경제는 민생고를 겪었다. 민생고는 정치에 막강한 임팩트를 만들어 왔다. / 연합
과거에도 우리 경제는 민생고를 겪었다. 민생고는 정치에 막강한 임팩트를 만들어 왔다. / 연합

고금리로 인한 심각한 민생고

과거에도 우리 경제는 민생고를 겪었다. 민생고는 정치에 막강한 임팩트를 만들어 왔다. 아마도 건국 이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개의 슬로건을 꼽는다면 ‘못살겠다 갈아보자’와 ‘꺼진 불도 다시 보자’일 것이다. ‘꺼진 불’은 불조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시대를 뛰어넘어 온 정치구호였다. 

이 구호는 1956년 5월 15일 3대 대통령 선거와 4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만들어 냈다.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이기붕 부통령 후보에 맞서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 후보-장면 부통령 후보를 내세웠다. 당시 혁신계인 진보당은 조봉암 대통령 후보-박기출 부통령 후보로 레드콤플렉스 속에서 분투했다. 이 구호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펼쳐졌던 신익희 후보 유세에 무려 30만 인파가 몰려 들었다. 

당시 서울인구 150만 명(서울시 통계자료 150만3865명)의 5분의 1 이상이 몰려들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왔다’는 말까지 나왔다. 

당시 우리 경제는 6·25 전후 복구 사업을 가까스로 이뤄낸 후였고 미국으로부터 원조에 의지해 경제를 꾸려가고 있었다. 문제는 미국이 당초 약속했던 원조 물자의 공급이 크게 달렸다는 것이고 그나마 분배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생경제는 급격히 어려워졌고 여기에 군 내부의 물자 유통 부조리가 알려지면서 4·19혁명이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관료들이 망친 대동법과 균역법의 교훈

민생과 관련해서 조선 왕조의 대동법과 균역법 개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사회가 양반제도의 폐해 속에서도 500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나름 국가적 위기에 대응해 제도 개혁에 대한 의지와 실행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관료 사회와 양반의 특권이 그러한 개혁의 성공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갔다는 점이다. 이는 민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관료 사회와 권력층 사회부터 철저한 개혁이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조선 중기 이후에 왕권이 약해지고, 정치의 실권이 양반 관료에게 넘어가면서 조선 사회는 날로 보수화되어 갔다. 양반들의 정치 싸움은 백성들의 생활 문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정부의 시책에 잘 따르지 않았으며, 나라의 부역 노동에 대해서도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대동법은 국민에게 큰 부담과 괴로움을 줬던 공납을 현물 대신 대동미라고 하여 쌀로 바치게 하는 제도였다. 지방 토산물로 바치는 공물 세납은 납입, 운반, 보관 등에 어려움이 있었을 뿐 아니라, 관리들의 부정이 끼어들기 쉬워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동법은 왜란 직후,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우선 경기도에 시행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이 바람직한 것으로 밝혀지자, 숙종 때에는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확대, 실시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로 국가의 수입이 늘어나고, 농민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그리고 상품 교환 경제의 발전을 돕는 등 당시의 사회 경제 발전에 새로운 자극을 줬다. 그러나 그 후, 이 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부정을 함으로써 폐단이 나타나게 되어, 농민들의 생활은 다시금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아울러 농민들이 특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군역의 문제였다. 조선 사회에서 양인은 장정이 되면 군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군역 의무자가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에 군포를 바쳤는데, 군포는 장정 한 사람당 1년에 2필씩이었다. 그 후,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군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 사람의 몫은 다른 농민들이 떠맡아야 했다. 또, 일부의 관리들은 군포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에, 영조 때에는 그와 같은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균역법은 군포를 1년에 1필로 줄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군포를 내지 않던 일부의 사람들에게도 부담시켰다. 그리고 종래의 권세가와 왕실에서 받아 오던 어장세, 염세, 선박세를 국가가 받아들임으로써 재정을 보충하였다. 균역법의 실시로 국민의 부담은 어느 정도 가벼워졌으나, 관리들의 부정이 그치지 않아 역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윤 대통령은 최근 대부분의 일정을 ‘경제’와 ‘민생’ 분야에 할애하고 있다.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6명의 장관을 교체했는데, 그중 5명이 경제부처 장관들이다. 문제는 국회다. 국민은 정쟁에 지쳐 있다. 민생 살리기에 여야 모두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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