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세계] 르네상스와 인상주의 교차로 프로방스
[예술 세계] 르네상스와 인상주의 교차로 프로방스
  • 오재학 전 주호치민 총영사
  • 승인 2024.01.0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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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불 프로방스(Provence) 지방은 13세기 중반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였다가 15세기말에 프랑스왕가 영토로 편입됩니다. 이 지역은 목가적이면서 역동적이고 차분하면서도 때론 화려합니다. 라벤더 꽃과 자스민, 미모사 향기가 하늘을 뒤덮고 올리브와 해바라기 꽃이 거대한 파도를 이룹니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미스트랄(mistral)이 지중해를 향해 불어 내리고, 원형경기장에선 콘서트가 열립니다. 북쪽 오랑쥬(orange)부터 남쪽 마르세이유(marseille)에 걸쳐 로마시대부터 전해오는 2000년 역사의 유적지가 즐비합니다. 아름다운 숲과 해안절경, 습지와 초원이 줄지어 펼쳐집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환경은 수많은 예술가의 호기심과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상상력과 감성을 살찌웠습니다. 

고흐 작 '별이 빛나는 밤'
고흐 작 '별이 빛나는 밤'

‘아비뇽 포수’로 유명한 아비뇽(Avignon)에는 14세기초부터 교황청이 옮겨왔고 ‘르네상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머나먼 이곳 아비뇽으로 이주했습니다. 인근 아를르(Arles)에는 1888년말 고흐(Vincent van Gogh)와 고갱(Paul Gauguin)이 함께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고흐의 정신병원이 있던 지척의 쎙.레미(Saint Remy)에는 의학.철학.점성술의 대가이자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가 살았습니다.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는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Paul Cezanne)의 고향으로,후기 인상주의 3인방(고흐,고갱,세잔)이 모두 프로방스에서 작품 활동을 한 것이 이채롭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마티스(Matisse), 피카소(Picasso), 르느와르(Renoir),샤갈(Chagall), 블라멩크(Blaminck)등의 화가들과 소설 <별>로 유명한 도데(Daudet), 에밀 졸라(Zola),<이방인>의 까뮈(Camus)등 문인들도 프로방스에 집결하였습니다. 

특히 고흐는 자신이 있는 아를르에서 불과 30여km 인근 아비뇽에 르네상스(휴머니즘)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트라르카가 550년 전에 살았다는 사실에 신비한 전율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생 테오(Theo)에게 보낸 편지에서 “550년전 아비뇽에 살았던 페트라르카도 사이프러스와 아카시아 나무를 보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과 페트라르카 사이에 수백 년을 뛰어넘는 공간적 동질성에 대한 느낌을 적었습니다. 

4세기부터 시작된 중세가 1000년의 수명을 다하고 끝나가던 14세기, 이탈리아 북부 꽃의 도시 피렌체(Firenze)엔 걸출한 3인의 시인이 나타났습니다. 중세의 끝자락에 나타난 단테(Dante)는 신곡(Divine Comedy)을 통해 그리스, 로마철학, 문학, 스콜라철학의 융합을 도모하여 우주의 근원적 에너지를 ‘사랑’으로 규정했습니다. 천국 연옥, 지옥개념을 원용해 이상적인 인간사회 실현과 지상의 평화를 열망했습니다. 단테의 제자 보카치오(Boccaccio)는 데카메론(Deca meron), 필로콜로(Filocolo)등의 작품을 통해 피렌체 대표 문인으로 평가받았고 페트라르카를 인생의 멘토로 삼았습니다. 그는 “시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학의 3대 왕관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페트라르카는 피렌체 소읍 아레초(Arezzo)에서 태어났으나, 아비뇽 포수를 계기로 멀리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단테,보카치오와 달리 파도바, 아비뇽, 몽펠리에, 베네치아,밀라노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세계시민(cosmopolitan)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학보다 인간적 감성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컸고,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삶에 몰입하여, 여가와 고독과 평화적 일상을 추구하였습니다. 

단테와 페트라르카, 보카치오를 르네상스 이탈리아 문학의 ‘3대 왕관(tre corone)’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모두 시를 아름다움과 열정, 창의성의 근본으로 규정하고 시문학이야말로 인간성을 최고로 고양, 발현시키는 장르라 천명하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들 3인방에게는 각자 자신들이 지극히 사랑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단테에게는 베아트리체(Beatrice), 보카치오에겐 피아메타(Fiammetta),그리고 페트라르카에겐 로라(Laura)가 있었습니다. 

특히 페트라르카의 로라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기로 유명했습니다. 1327년 4월 6일.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쎙트.클레어(Sainte Claire) 성당예배에서 로라를 처음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집니다. 무려 366편에 달하는 사랑의 시를 '칸초니에레(canzoniere)'라는 형식으로 썼는데 14행 sonnet의 결정판으로 평가받았고 이로 인해 '근대 서정시(lyrics)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로라는 흑사병이 창궐하던 1348년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사망한 날짜가 그녀가 페트라르카를 처음 만난 4월 6일로, 이들에게 1348년 4월은 매우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고전문학과 기독교정신을 융합시키고, 유럽 인문주의·르네상스의 창시자로 불렸던 페트라르카는 근대 서정시의 최고봉에 오르면서, 로마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열었던 중세 1000년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젖힌 선구자로 등극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550년 후에 프로방스로 내려온 고흐에게 엄청난 예술적 영감과 창의성을 전수해준 멘토(mentor)가 되었습니다. 

고갱 작 '타히티의 여인들'
고갱 작 '타히티의 여인들'

단테, 페투라르카, 보카치오 피렌체 3인방의 화합과 교류를 눈여겨봤던 고흐는 화가들의 이상적 공동체(uto-pian community)를 갈망했습니다. 고흐는 1888년 2월 아를르(Arles)로 내려가면서 고갱을 초청하고 고갱이 이에 응함으로써 남불 작업실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고흐는 “예술의 미래는 프랑스 남부에서 찾을 수 있다(Future of art is to be found in the south of France)”라고까지 언급하였습니다. 

당시 고흐,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은 “덧없는 세상을 그린 일본 판화 우끼요에(ukiyo-e)”에 심취하여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였는데, 이런 현상을 “자포니즘(japonism)”이라 했습니다. 고흐는 아를르를 위요한 프로방스 지역을 일본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는 동시에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사이의 긴밀한 관계가 자신과 고갱 사이에 그대로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흐는 고갱과 함께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출할 이상적 공동체를 염원

고흐는 고갱에게 선물하기 위해 해바라기 그림과 '시인의 정원(poet's garden)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페트라르카가 보카치오의 멘토 역할을 했던 것처럼 고갱이 자신의 멘토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고갱은 고흐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고갱이 도착한 후 두 사람의 관계는 화합과 우정보다는 질투와 적대감이 높아졌습니다. 고갱은 시종일관 고흐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고흐는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이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암흑기(dark age)의 중세가 휴머니즘에 눈뜬 것처럼, 자신과 고갱의 결합과 협력으로 파리 예술계를 뒤흔들 만큼 새로운 예술 장르를 창출해내리라 믿었습니다. 고흐는 고갱을 19세기에 프랑스에서 환생한 페트라르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고갱은 자신이 앵그르(Ingres), 라파엘로(Rafaello), 드가(Degas)를 좋아하는데, 고흐는 이들 예술가를 배척하고 도비니(Daubigny)와 루소(Rousseau), 소설가 도데(Daudet)만을 좋아한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곤궁한 삶으로 일관했던 고갱은 페루, 파나마, 덴마크, 타이티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목민적 삶에 길들여져 소도시 아를르에 갇혀 지낼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고흐는 자신을 수도사(monk), 사도(disciple)라 지칭하며 새로운 예술(new art)의 전파자임을 자처했지만 고갱은 자신을 혁명적 방랑

페트라르카
페트라르카

자(rebe-llious bohemian), 사회의 희생자(victim of society)라고 비하하기 일쑤여서, 두 사람은 화합하지 못하고 어긋나기만 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간 갈등은 깊어갔고 마침내 고흐는 자신의 귀를 칼로 자르는 극단적 행동까지 하였습니다. 
이로써 고흐의 ‘이상적 공동체(utopian community)’에 대한 환상은 고갱을 만난 지 63일만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를 두고 두 사람의 관계는 로망스(romance)가 아닌 샷 건 매리지(shotgun marria-ge)라고 평가절하 했습니다. 아를르 이후 고흐와 고갱은 서로 만나지 못했으나 두 사람은 아를르에서 상당수의 그림을 그렸고 특히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 입원 시절까지 합하면 200여 점에 가까운 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페트라르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예술은 14~16세기 동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16세기말부터 주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16세기의 매너리즘(mannerism : 왜곡, 과장), 17세기의 바로크(baroque : 합리성, 감각, 역동성, 빛), 18세기의 로코코(rococo : 화려함, 쾌락)등의 과도기적 예술사조가 출현해 1000년간 지속된 중세의 엄숙하고 경건한 신본주의를 타파하였습니다. 

이를 경험한 서양미술은 19세기 들어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으로 그 시야와 폭을 넓혀갔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조들이 19세기 인상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미술의 현대성을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르네상스에서 시작하여 고전미술에서 강조되어온 단순한 아름다움보다, 진실된 인간성과 색채인식을 통한 주관적 인상과 자각이,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신화적 전설을 넘어선 인간적 현실 등이 그림에 광범위하게 나타났습니다. 

다양한 화가들이 참여한 인상주의 화단이 19세기 중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화풍을 지배하였으나, 프로방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후기 인상주의 3인방(고흐,고갱,세잔)시대에 들어오며 기존 인상주의 틀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기존 화풍의 전형을 깨고 사물의 겉모습과 색채묘사에 치우쳤던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보다 자유로운 감성과 인간애, 그리고 평면적 공간묘사에 치중하여 철학과 미학, 문학 등을 통합하는 예술양식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고흐는 현실적 삶을 중시해 삶의 세세한 과정과 맥락, 순수한 자연체험, 별(희망), 햇살(격정), 인간성 회복을 강조하였고, 고갱은 곡선을 통한 청조성, 원시적 색상, 추상적 상징성 등에 몰두했습니다. 세잔은 평면성과 공간과 부피, 상징적 조형을 추구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덧없는 인생'을 노래한 일본판화 '우끼요에(ukiyo-e)에도 심취해 강렬한 색채와 파격적 구도를 중시한 '자포니즘(japonism)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인간 내면의 정서적,감각적,상징적 표현에 무게를 둠으로써, 회화를 객관적이고 촉각적인 영역에서 주관적이고 시각적인 영역으로 옮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로방스는 고대 로마유적을 비롯해 라벤더의 향기와 푸른 하늘, 서늘한 미스트랄과 해바라기 물결, 밝은 햇살 등 풍성한 예술환경으로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집결하는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다양한 작품활동이 기존의 전통적 화풍과 접목되면서 20세기 초엽에 들어와 서양미술이 인상주의를 뛰어넘어, 아르 누보(art nouveau)와 야수주의, 입체주의, 상징주의, 미래주의, 표현주의, 추상주의 등 수많은 스펙트럼으로 분화해 나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로방스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위대한 예술가들의 숨결과 작품이 살아 있는 아를르(Arles : 고흐, 고갱)와 앙티브(Antibes : 피카소), 그리고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 세잔), 까뉴.쉬르.메르(Cagnes-sur-Mer : 르느와르), 니스(Nice : 마티스), 생 폴드 방스(Saint Paul de Vence : 샤갈)등을 꼭 돌아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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