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박정희 정부의 ‘수입자유화’가 낳은 기적
[포커스] 박정희 정부의 ‘수입자유화’가 낳은 기적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3.07.3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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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애쓰모글루 교수에 의하면 한 나라의 경제성장은 지리적 요건이나 부존자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포용적 경제(Inclucive economy)제도’에 의해 이뤄진다. 이때 포용적 경제란 경제활동에 수반되는 자원을 특수그룹이 배타적으로 점유하고 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자유롭게 접근해서 이를 활용해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자유와 관용을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아울러 여기에 사유재산을 제도로서 보장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정희 정부의 수입자유화는 바로 애쓰모글루 교수가 말하는 ‘포용적 경제’에 해당하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애쓰모글리 교수에 의하면 쿠데타와 같은 군사혁명이 발생한 나라에서는 대개 군부가 경제 자원을 독점하고 군부 내 인맥을 기업 책임자로 내려 보내 이익 독점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 아프리카와 중동과 같은 나라들에서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며 그는 이러한 경제를 ‘비포용적 경제’라고 정의했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혁명 세력은 충분히 애쓰모글루 교수가 지적한 ‘비포용적 경제’의 운용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부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했고 기존의 기업들을 신뢰했으며 특히 능력이 있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경제정책을 제안하고 주도하도록 경영과 생산의 자율권을 부여하고 격려했다. 그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박정희 정부는 자유시장경제를 제도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부의 수입자유화정책은 시장을 지향하는 수출정책과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유와 관용의 철학이 담긴 정책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수입자유화, 경제정책 그 이상의 의미박정희 정부의 수출정책 성공신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수입자유화정책의 의미와 그 의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76년부터 시작된 수입자유화정책은 우리 경제가 처음으로 다자간 무역 질서인 GATT 체제에 들어섬으로써 대한민국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고양되고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에 이르는 초석을 마련한 계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수입자유화를 통해 국내 기업들의 체질이 해외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단계로 상승했고 수출과 외화가득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잡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수입자유화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이후 정부들에서 경제 자유화와 민영화 등이 추진되는 중요한 당위와 규범을 이 수입자유화 조치에서 찾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입자유화는 한편으로는 경제민주화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당연히 처음부터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1년 금본위제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에 1973년 1차오일쇼크로 침체를 겪었던 한국 경제는 1975년 하반기부터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1976년에 이르면 경제성장률이 급속히 높아지고 경상수지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중동 붐에 의해 엄청난 달러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통화가 증발되고 경기과열이 일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가했다. 여기에 중화학공업과 건설업이 붐을 이루면서 임금은 치솟았고 인플레이션은 그만큼 더 기승을 부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부동산과 주식 시장도 과열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되었지만 성장 위주 정책을 펴온 입장에서 적실한 대책을 수립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보호주의에 대한 선호가 증대되고 있었다.

여기에 한국경제를 국제질서에 편입하고자 하는 미국과 IMF가 박정희 정부에 수입개방을 촉구하고 있었지만, 민족주의 성향과 수출 지향의 박정희 정부 안에서는 이 문제를 ‘외래품 범람’이라는 관점에서 거부감이 높았다. 그런데 이를 설득한 관료가 있었다. 

80년대 한국경제의 성공신화를 이뤄낸 주인공, 자유주의 경제 관료인 김재익 경제수석이었다. 당시 그는 경제기획원에서 기획국장을 맡고 있었다. 김재익 국장은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자유화 정책의 결여는 무역 전쟁이나 한국 수출에 반발을 불러 올 수 있음’을 설득하는 한편 ‘수입자유화로 국내 공급을 늘리면 인플레이션이 해결되면서 동시에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와 국민 후생도 늘릴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김정렴 실장은 이를 이해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재가를 득하게 된다.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 제2고로에 불을 붙이는 박정희 대통령.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 제2고로에 불을 붙이는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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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일단 수입자유화가 결정되자 한국 정부가 미국 카터 행정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를 밀어붙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카터 행정부는 GATT와 같은 다자간 무역질서를 선호하고 있었지만 미국 내에서는 보호무역을 지지하는 여론이 월등히 높아 미국 정부는 한국에 수입자유화를 강력하게 요구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재익 당시 기획국장과 장예준 상공부 장관, 그리고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은 카터 정권이 교체될 경우 미국에 보호무역주의가 불어닥칠 것이고 이때 대미무역에서 흑자 폭이 큰 한국이 타겟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중시했다. 

이미 미국 정부는 한국의 철강을 비롯해 몇몇 부문에서 보복관세를 부가하려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7년 박정희 정부는 수입자유화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은 그 해 2월 스나이더 주한 미대사에게 “한국은 올해 단계적인 무역자유화 정책을 개시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어 4월 장예준 상공부 장관은 대미구매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면서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우려를 밝혔다. 하이라이트는 여기에 동행한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인 김재익 기획국장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한국 정부가 무역자유화를 원칙적으로 결정했다고 표명했다. 

이 사건은 아이러니했다. 미국으로서는 보호무역주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나는데 한국이 자유무역을 결정해 수입개방을 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이익이 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국제질서의 정당성에 비춰볼 때 한국이 미국보다 국제경제 레짐의 정당성과 합리성, 호혜성에서 앞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이 미국보다 자유와 관용의 제도적 이념이 한 차원 높다는 평가이기도 했다. 

수출의날 기념식에서 트로피를 수여하는 박정희대통령(1973)
수출의날 기념식에서 트로피를 수여하는 박정희대통령(1973)

이러한 점은 당시 김재익, 장예준, 김정렴과 같은 관료들의 안목과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경제가 당면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수입자유화로 해결하는 지혜를 발견하고 미국에서 곧 기승을 떨칠 보호무역주의 공세에서 한국이 타겟이 되지 않는 묘수를 실행해 낸 것이다.

실제로 77년에 시작된 수입자유화 정책은 80년대 일본을 상대로 한 미국의 거센 무역적자 반발과 저항으로부터 한국이 비켜가는 길을 예비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한미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1978년 4월 박정희 정부는 제1차 133개 품목, 9월 제2차 299개 품목, 12월 제3차 349개 품목을 수입자유화 품목으로 선정했다.

국민들은 이 시기에 해외로부터 수입된 제품들을 구매하면서 소비자 후생과 안목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동안 수입금지로 국산만 공급되던 치약에 충치를 예방하는 불소가 없었다는 점이 회자되기도 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적 성공신화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잘 해결되지 않는 논쟁이 존재한다. 과연 박정희 정부가 시장경제에 충실한 결과로 경제가 발전한 것인가, 아니면 국가주도의 계획경제에 의해 경제가 성장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과연 유일한 경제성장의 제도적 수단인가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 정부의 수입자유화를 이끈 김재익 경제수석과 전두환 대통령
박정희 정부의 수입자유화를 이끈 김재익 경제수석과 전두환 대통령

동시에 경제 운용에 정부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리로도 종종 동원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부는 자유시장경제가 아닌 국가주도 경제 모델로 한강의 기적을 달성한 것일까. 

자유시장경제란 자유자본주의 경제를 의미하는 것인데, 박정희 군사정부 시기에 자본은 민간에 축적되어 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외자를 도입해 이를 민간에 자본으로 불하한 것이 박정희 경제 개발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과 기업에 충분한 자본이 축적되기 이전의 민관협력 경제 운용에 대해 이를 시장경제나 관치경제의 어느 한 관점에서 분석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따라서 국가 안에 배태된 시장으로 분석하는 제도주의 접근이 본질을 더 잘 설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박정희 정부의 수입자유화 조치는 시장제도로서 자유와 관용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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