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의료보험(이하 실손보험)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국민건강보험에서 보장하지 않는 의료비를 보장해주는 보험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2022년 3월 기준으로 의무가입인 국민건강보험(공보험)의 가입자가 5135만 명인데 실손보험에 가입한 국민이 3977만 명이다.
이렇게 대다수 국민이 실손보험에 가입한 이유는 공보험만으로는 충분한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실손보험은 환자(피보험자)가 치료비를 먼저 의료기관에 지불을 한 후에 영수증과 진단서 등 관련 증빙서류를 갖춰 실손보험사에 청구를 하면 실손보험사가 환자가 지불한 비용 일부를 환자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실손청구 간소화 방안’이라는 것은 환자(실손보험가입자)와 실손보험사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맡는 ‘보험중개기관’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환자가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은 후 의료기관에서 발급받아야 할 증빙서류를 의료기관이 환자를 통하지 않고 보험중개기관에 직접 전송을 하고, 보험중개기관에서는 이를 받아 보험사에 전달하여 보험사가 환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개념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실손청구간소화를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고 윤석열 정부의 인수위원회에서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국민들이 기대하는 새 정부 생활밀착형 과제 해결 1순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 설문조사에서 실손보험의 가입자 중 약 절반이 “청구를 안한 적이 있다”라고 응답했고, 그 중 다수가 ‘절차의 복잡성’을 그 이유로 꼽았다. 일반 국민이 실손청구간소화에 찬성하는 것은 절차의 간소화가 주된 이유인데, 실손청구간소화는 민간실손보험사의 숙원사업이기도 하다.
민간실손보험사는 왜 실손청구간소화를 숙원사업으로 여길 만큼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것일까? 그 핵심적인 이유는 지출절감이다.
보험중개기관이 민간실손보험사에 진료 기록 전달하려는 것
현재 실손보험사들은 의료기관의 전문적인 의료행위에 대해 그 적정성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일부 비윤리적인 의사들은 이것을 악용하여 환자에게 불필요한 의료행위를 하고 과도한 비용을 책정한다.
실손보험사들은 보험회사의 위탁에 따라 보험금 청구를 위한 전산시스템 구축·운영 사무를 수행하는 전문중개기관으로 공공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을 지정하고, 심평원을 통해 비급여 진료를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심평원은 원래 국민건강보험의 급여청구를 심사하는 공기관이다. 의료기관은 진료비의 5~30%만 받고 나머지 건강보험공단의 부담금은 공단에 직접 청구를 해서 받게 되는데 이 때 청구심사를 맡는 곳이 심평원이다.
의료기관이 청구한 비용을 심평원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깎는 것을 ‘삭감’이라고 하는데, 건강보험공단은 심평원이 삭감한 대로 지불하기 때문에 심평원의 결정은 의료기관이 저항할 수 없는 강제성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심평원은 의료기관과 의사들에게는 슈퍼갑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실손보험사들은 이 슈퍼갑인 심평원에 청구심사를 맡김으로써 의사들의 비급여 진료를 억제하고 그를 통해 지출을 줄일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실손보험사들이 심평원에 이러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은 심평원이 권력을 가진 공기관이고 삭감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이 계획은 이미 현실화 되고 있는데 배진교 정의당 의원이 2022년 5월 9일 실손보험사가 실손보험 청구절차를 심평원에 위탁하고 의료기관이 관련 증빙서류를 심평원에 제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지난 3월 실손보험사들은 백내장 수술을 하는 전국 100여 곳의 안과를 고발했다. 백내장 수술 관련, 과장·허위 광고를 낸 혐의로 보건당국에 신고한 것이다. 최근에는 경찰이 서울 시내의 유명 안과와 브로커들의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한 일이 있었다.
경찰은 이 브로커들이 3년간 안과로부터 건네받은 수수료가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료를 알선하고 대가를 받는 것은 불법이다.
이처럼 실손보험사들이 백내장 수술을 대표적인 과잉진료의 사례로 꼽고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서는 배경에는 백내장 수술 관련한 지출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2021년 손해보험사에 청구된 백내장 수술 관련 보험금은 9514억 원으로, 생명보험사를 합치면 총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안과의사회에서도 그 심각성을 인지하여 올해 4월 5일에는 금감원이 대한안과의사회와 함께 전국 안과 병·의원에 대해 최근 백내장 수술보험금 청구 급증과 관련한 우려 사항을 전달하고 협조를 당부하는 공문을 보냈다.
당시 금감원은 올해 1월1일부터 70일간 백내장 수술 지급 보험금이 2689억 원에 달했고 실손 지급보험금 중 백내장 수술 비중이 지난 2020년 6.8%에서 2022년 12.4%로 급증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비급여 진료비 지출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의료행위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보험사가 의료행위의 적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실손보험사들은 실손청구간소화가 된다면 이미 의료행위에 대한 심사체계를 갖추고 있는 심평원을 통해 의료비를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 지난 4월 20일자 조선일보에는 “수술하고도 보험금 못 받아”… 인수위에 ‘백내장’ 민원 폭주라는 제하의 기사가 게재됐다.
국민이 윤석열 정부에 제안하는 의견을 취합하여 정책화하는 ‘국민이 당선인에 바란다’ 코너에 150여건의 보험 관련 민원이 올라왔는데, 이 중 50여건이 백내장 수술 후에 실손보험사들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당시 민원인들은 “보험사들이 실손보험 가입 당시 약관을 뒤집고, 백내장 수술 보험금 지급을 보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사에 따르면 ‘백내장 실손보험 지급하지 않는 흥국화재 및 보험사들 고발합니다’라는 글을 작성한 박모 씨는 “모든 보험사가 똑같은 행태와 변명으로 실손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수술한 환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금융감독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백내장 수술이 급증하면서 수술을 받고도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하거나 보험금 지급이 보류되는 등의 사례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정당한 보험금 청구에 대해서는 권리를 적극 보호할 것이다”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실손청구간소화가 되면 이런 민간실손보험사의 횡포가 사라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보험사의 이익 증대는 곧 환자의 손실
언뜻 생각하면 실손청구간소화는 환자가 의료기관으로부터 영수증과 증빙서류를 받아 제출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어 환자에게 편리성이 크게 증대될 수 있고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잉진료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커 보인다.
그러나 실손청구간소화에는 큰 함정이 숨겨져 있다. 바로 ‘과소진료’의 위험이다. 우리 사회는 ‘과잉진료’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폐해가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과소진료의 위험은 과잉진료보다 훨씬 크다.
과소진료란 꼭 필요한 진료를 하지 않거나 최선의 진료가 아닌 최소한의 진료만 하는 것을 말한다. 의사들은 종종 ‘의학 교과서에 나온 대로 진료하지 않고 심평원이 세운 진료의 기준대로 진료하는 이른바 심평의학을 따라 진료한다’라는 자조 섞인 말을 한다.
심평원은 최선의 진료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인 진료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일부 부도덕한 의료기관에 의해 과잉진료라는 부작용이 횡행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공보험 밖의 영역인 민간실손보험은 의사들이 정부의 과도한 규제를 피해 ‘최선의 진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왔다. 그리고 최선의 진료의 혜택은 환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필자의 업무영역인 하지정맥류를 예로 들어보자. 판막이 고장난 큰 정맥을 치료하는 방법은 피부를 절개하고 정맥을 제거하는 수술적인 방법과 주사바늘을 통해 정맥을 폐쇄하는 시술적 방법으로 나뉜다.
수술적 방법은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 외에는 시술적 방법에 비해 장점이 거의 없고 흉터, 출혈, 신경손상 등 단점이 크다. 따라서 환자들은 시술을 절대적으로 선호하지만 현재 건강보험은 수술적인 방법에만 적용되고 있고 시술적 치료는 실손보험의 적용을 받아왔다.
시술적 치료방법은 레이저/고주파/베나실 등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방법은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고 비용도 다르다. 환자들마다 혈관의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의사들은 이 다양한 시술방법 중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시술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술적 치료가 공보험화 된다면 실손보험의 청구심사를 대행하는 심평원은 가장 저렴한 시술 방법을 강요하게 될 것이고 환자는 선택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즉 최선의 진료를 받을 권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건강보험에는 곳곳에 일반 국민이 잘 모르는 함정들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얼마 전 필자의 병원에 50대 여성환자가 다리의 불편감을 호소하며 내원했다.
다리정맥의 판막 고장으로 인한 증상이었고 간단한 치료를 통해 증상이 호전될 수 있었는데, 환자는 심장에 구멍이 나 있는 ‘난원공 개존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난원공 개존증이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열려 있다가 태어난 후 닫혀야 하는 심방 사이의 구멍이 태어난 후에도 닫히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를 말하고 성인 4명 중 1명이 갖고 있을 정도로 흔하다.
살아가는 데 큰 위험은 없지만 정맥으로 들어간 공기나 혈전이 폐에서 걸러지지 않고 뇌혈관 등 직접 동맥을 통해 날아가 뇌졸중 등을 일으킬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병이다.
정맥시술은 혈관경화요법이라는 약물의 주사치료 과정에서 약물에 공기를 섞어 주입하기 때문에 이 환자처럼 진단을 받은 환자는 난원공 개존증 치료를 먼저 한 후에 다리의 정맥치료를 하는 것이 안전하다.
난원공이라는 심장 속의 구멍을 막기 위해 과거에는 모두 심장을 열고 수술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피부를 통해 정맥 속으로 관을 집어 넣어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 이를 경피적 중재술이라고 한다. 이 환자는 그렇게 치료 받기를 원했지만 여러 대학병원을 전전했으나 결국 심장 치료를 받지 못했다.
건강보험에서 허용을 안해주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에서는 증상이 없는 난원공 개존증 환자는 경피적 중재술 시술을 받을 수 없고 뇌졸중이 왔거나 뇌졸중의 발생이 임박한 상태에서만 경피적 중재술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환자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환자는 대학병원 교수에게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않고 내가 돈을 낼 테니 시술을 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그건 불법입니다”라는 답이었다.그렇다. 믿기 어렵지만 불법이 맞다.
건강보험에서 ‘급여’ 대상이 된 치료들은 그 대상을 엄격하게 규정해 놓았고, 그 규정에 맞지 않으면 ‘환자가 돈을 내고 치료를 받는’ 비급여로 치료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내 돈을 내고 내가 치료를 받겠다”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현행법이다.
사실상 치료의 선택권에서 매우 큰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리가 너무나 불편했던 그 환자는 결국 공기색전의 위험을 안은 채 다리정맥 치료를 받았고 천만다행히 잘 회복되었다.
현재 실손보험사들은 실손보험의 사실상 공보험화를 추진하고 있다. 공기관에 청구심사를 위탁하는 것은 손쉽게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보험사의 지출이 줄어든다는 것은 환자가 받는 혜택의 축소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손청구간소화는 결국 환자가 최선의 진료를 받을 기회를 박탈 당하는 현실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실손보험 소비자들인 국민이 알아야 할 텐데, 기대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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