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을 생각한다... 자주국방의 조건, ‘골든 가디언’
자주국방을 생각한다... 자주국방의 조건, ‘골든 가디언’
  • 허화평 전 국회의원
  • 승인 2019.03.2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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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을 점령군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철수를 바라는 친북좌파 인사들과 세력들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환수함으로써 자주국방이 마무리되고 주권국가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은 국제 환경에도 맞지 않고 시대 흐름과도 상반되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정치·이념적인 형식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국방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인식이 중요하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한 시기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봐야 한다. 상무정신(尙武精神)을 중요시했던 통일신라가 망한 이후 고려시대 이래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진정한 의미의 자주국방 정신과 자주국방 태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는 몽골군의 말굽 아래 유린당했고 조선은 종주국 명(明)과 청(淸)의 보호에 의존해야 했다. 고려조 이후 왕조의 지배자들은 상무정신은 커녕 문존무비(文尊武卑)라는 통치 방식에 집착함으로써 무신(武臣)반란에 직면했거나 외침 시 종주국에 의한 구원에 매달려야 했다.

고려 왕조가 쇠락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1170년 일어난 무신의 난(亂)이다. 문존무비 풍조가 만연했던 상황에서 문신들로부터 공공연한 모멸과 조롱을 당하고 심지어 문신지휘관 밑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던 무신들이 정중부(鄭仲夫)를 앞세워 수많은 문신들을 학살하고 왕까지 바꿔치기하면서 정권을 장악, 무신정권을 수립했고 뒤이은 최씨 무신정권이 국정을 좌우함으로써 왕조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더 이상 한미연합훈련은 없다. 올해부터 키리졸브 (KR:Key Resolve) 연습과 독수리훈련(Foal Eagle)이란 이름의 연합훈련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국방부는 공식 발표했다. 사진은 3일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 모습.
더 이상 한미연합훈련은 없다. 올해부터 키리졸브 (KR:Key Resolve) 연습과 독수리훈련(Foal Eagle)이란 이름의 연합훈련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국방부는 공식 발표했다. 사진은 3일 경기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 모습.

사대주의로 약화된 조선의 국방력

이소사대(以小事大) 정신에 충실했던 조선에서는 자주국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543년 일본에 표착한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조총을 입수한 일본인들이 국산화에 착수하고 1549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조총부대를 창설하여 전국시대 주도권을 장악할 무렵, 1554년 일본인이 조총을 들고 조선으로 귀화했을 때 명종은 ‘조총 제작’을 금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인 1589년 대마도주가 조선에 조총을 헌상했으나 선조는 ‘무기보관’을 명하여 쓸모없는 고철로 만들었다.

1592년 조총부대를 동반한 왜군이 침공했을 때 조선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선조는 의주로 줄행랑을 쳐야 했으며 한양 도성은 폐허가 되었다. 심지어 전쟁 중에 이순신 장군을 감옥에 가뒀다는 사실을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는 그토록 처참했던 7년 전쟁을 치르고 난 후에도 임진왜란을 교훈으로 삼거나 전쟁에 대비하여 실효성 있는 자위 대책도 세우지 않았고 망해가는 종주국 명(明)에 기대어 기세등등하게 일어나고 있던 청(淸)을 얕잡아 보다 1637년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다.

명을 대신하여 새로운 종주국이 된 청은 조선으로 하여금 성(城)을 신축하거나 심지어 기존의 성을 수리하는 것조차 금지했을 뿐 아니라 청나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청과 일본을 제외한 어떠한 외국과도 접촉을 할 수 없게 했고 해양활동을 금지했다. 조선은 외부 정세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서 안으로 피로 점철된 당쟁과 권력투쟁에 몰입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 하에서 창군 준비가 이뤄지고 1948년 8월 15일 건국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었으나 여군단을 포함한 육, 해, 공 3군 체제가 완전히 갖춰진 것은 1970년이다. 6·25 전쟁과 월남 참전을 통해 단련되고 실전 경험을 축적하면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현대식 강군 체제를 갖추게 된다. 1978년 7월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유엔군사령부에 속했던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한미연합사로 이양되었고 1994년 평시 작전지휘권만이 한국군에 환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정한 자주국방은 ‘국방비’

자주국방과 관련해 진정한 의미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국방비다. 국군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우리가 전액 부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주국방 태세를 갖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1950년대는 원조경제시대였고, 1960년대는 차관경제시대였으며, 1980년대 후반에 가서야 원조수혜국에서 원조공여국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국방비 조달에 있어서도 상당 기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해야 했다.

6·25 전쟁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후속조치로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 및 군사원조에 관한 합의 의사록’이 작성되고 1957년 미 국무장관이 발표한 ‘한국군 현대화에 관한 성명’ 등에 근거해 1954~1961년 사이 한국군에 제공된 군사원조는 13억 8000만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한국 정부에 대한 무상원조는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고 이 무렵 국방비 전액을 우리 스스로 부담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주국방 태세를 갖추게 된다. 정부가 자주국방 태세를 갖추기 위한 정책을 본격화한 것은 1974년 미군의 군원이관과 함께 방위세법이 마련되고 ‘한국군 현대화 계획’의 토대 위에서 전략증강계획(율곡사업)을 수립하면서부터이고, 1975년 월남 패망과 미국의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이 이를 가속화시켰다.

1974년 제1차 율곡사업으로부터 1996년까지 약 23년간 국방비 중 31.8%에 달하는 34조 4787억 원을 군사력 건설에 투입했고 지금은 방위력 개선사업으로 미래형 전력 확보에 중점을 두면서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와 노력이 의미하는 것은 경제적인 한강의 기적 못지않게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최소한 조선조 이래 독립주권국가로서 자주국방을 내외에 천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것은 민족사에 기록할 만한 또 하나의 이정표다. 지금은 1991년 이래 주한미군의 주둔비를 분담하고 있고 그 액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자주국방은 가시적인 물질적 요소와 비가시적인 정신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작용할 때 완벽한 태세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총과 대포, 비행기와 탱크와 군함을 갖추는 것만으로 자주국방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가시적 요소보다 이것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과 정신 같은 비가시적 요소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 중국 성리학 문화 영향을 크게 받아온 우리 민족 심성에는 아주 나쁜 유전자라고 할 수 있는 문존무비(文尊武卑)라는 DNA가 뿌리깊이 박혀 있다.

우리 역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이후 국가와 국민 차원에서 상무정신(尙武精神)을 고무했던 시기는 없었다. 자주국방 기치 아래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학에서 군사훈련이 일상화됐던 1970년대도 지금은 하나의 과거사가 되었다. 상무정신이란 천박한 무존문비(武尊文卑)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국가의 주권자로서, 자유시민으로서 자유를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말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민간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군을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고 2017년 이후에는 노골적이고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반군(反軍) 정서가 곳곳에서 표출하고 있다. 이 경우 남한은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김일성은 1962년 4대 군사노선을 제시하면서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를 강조했고 김정일은 선군(先軍) 정치를, 김정은은 핵으로 무장한 강성대국을 지향함으로써 군을 노동당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물론 이것은 대남적화통일을 위한 것인 데 비해 남한에서는 정상적 임무를 수행한 장군을 잘못된 정치적 여론을 구실로 참기 어려운 심적 고통과 모욕을 가함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가 하면, 책임 있는 정치지도자가 군 복무를 청춘을 허비하는 것인 것처럼 공공연히 폄훼하고, 일반 대중은 군 시설을 혐오시설인양 자신들의 거주 지역 부근에 오는 것을 반대하고, 일부 정치권력 집단의 보이지 않는 엄호를 받는 소수 친북세력들이 반미와 미군 철수 구호를 외치며 주요 방어 무기 배치를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명예를 목숨처럼 아끼는 군의 간부들에게 명예를 안겨주기는 커녕 구실만 있으면 명예를 깎아내리고 모욕을 주려는 곳, 6·25 참전 용사가 거리투쟁에 참여했다는 소위 민주 투사보다 홀대를 받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의 판단 착오는 국가안보에 치명상을 가져올 수 있다.
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의 판단 착오는 국가안보에 치명상을 가져올 수 있다.

대통령은 군 통수권을 이해해야

분단국가, 북의 위협이 점증하고 있는 국가에서 군대의 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군 통수권자가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친북 성향을 지닌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시민단체, 노동단체들은 국방비용을 아깝게 생각할 뿐 아니라 엉뚱한 곳에 수조원의 국가예산을 낭비하면서 주한미군 주둔비용 분담금에는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국민에게는 자주국방의 강도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은 없다. 주한미군 주둔비 부담 액수가 많을수록 자주국방의 강도는 그만큼 높아지고 주권국가로서 위상 역시 그만큼 올라간다. 이것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미국 측이 100을 요구할 때 우리가 200을 내놓는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군사적 측면 외 정치, 경제,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간접적 수혜가 돌아올 것이며, 국민들의 자존감과 자신감도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견고한 자주국방 태세 유지를 위해 유념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군 통수권 관리다. 대통령이 군 통수권자 위치에서 명령과 지시만 내리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군 통수권 관리는 군 인사관리, 한미동맹 및 군사외교 관리, 전력증강 및 개선 관리, 전투 태세 유지 관리 등 광범위하고 전문적이다.

병역을 필하지 않고 군을 잘 모르는 군 통수권자일수록 그 중요성은 증가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고 수준의 능력과 역량 있는 군사전문가들의 보좌가 필요하고, 끊임없는 노력과 학습이 요구된다. 최근에 청와대 풋내기 행정관이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내 인사 문제를 논의했다는 것은 놀랍고 우려스러운 일이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 장개석軍이 모택동軍에 패하고 중국 대륙을 상실한 원인 중에는 군 통수권 관리 실패가 있다. 정치화 되고 부패한 군 간부들, 빈약한 통수권 발휘가 결정적 요소였다. ‘장개석 군대’라는 오명이 생겨난 배경이다. 한국군의 과거에도 유사한 교훈이 있다. 자유당 말기 군은 정치적으로 오염되고 부패했으며, 군을 몰랐던 장면 정권은 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거나 통제하지 못해 5·16 군사혁명을 자초했다.

건군 이래 군 통수권을 확립했던 최초의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는 군 통수권자인 자신 이외 그 어떤 누구도 군 인사 문제에 끼어들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았으며, 특히 정치인들의 군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지나칠 정도로 경계함으로써 군으로 하여금 주어진 임무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군을 관리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 이후 친인척들과 측근 인사들이 군 인사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해 군을 모르는 김영삼 대통령 이후 더 심화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관리에 누수 현상이 생겨나도록 해서는 안 되고 군을 신뢰하고 사랑해야 하고 군의 명예를 고양시키는 데 인색해서도 안 된다. 지금은 한미동맹과 군사외교 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지혜로운 관리가 요구되는 시기다. 젊은 날 군복을 입고 조국에 헌신한 장군의 죽음이 길거리에서 반려견이 사고사를 당하는 것보다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자유를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날 수 있을까?
 

허화평 전 국회의원
허화평 전 국회의원

진정한 ‘수호자’의 조건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주국방은 포기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이것은 주권자인 국민에게 주어진 신성한 책무이자 당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국가의 준엄한 명령이다. 이와 관련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는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BC469?~BC399)는 승리한 스파르타(Sparta)와 패배한 아테네(Athens)를 포함한 그리스 세계의 몰락을 초래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431~BC404) 시대를 살면서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했고 아테네 패배로 인해 아테네 민주주의와 시민사회가 타락해가는 것을 목격했던 그는 특히 전쟁과 군인(수호자, guardians)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피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신탁(oracle)을 인용했다.

“만약 철(iron)급 수호자나 청동(bronze)급 수호자에게 의존하면 아테네는 폐허가 될 것이다. 반면에 금(gold)급 수호자와 은(silver)급 수호자들에게 명예(honor)를 안겨주고 수호자로 삼는다면 아테네는 건재할 것이다.”

여기서 금, 은, 철, 청동이란 시민의 수준을 구분해서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군과 이광요 총리가 만들어낸 싱가로르군이 소크라테스 기준을 따르고 있다면 북한군도 이에 근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자주국방의 궁극적 본질은 군 간부와 병사의 질에 있고, 국민이 이들을 존중하고 이들에게 명예를 안겨줄 때 최상의 자주국방 태세를 유지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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