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지난 3월 25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 시진핑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부터 ‘한반도 비핵화’를 둘러싼 구도가 다시 한 번 흔들리고 있다. 시진핑과 김정은 간의 ‘합의’ 이후에 문재인 정부까지도 딴 소리를 하고 있어서다.
김정은은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과 정상회담과 환영 만찬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미국 대통령 정도가 아니면 함께 만날 수 없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들까지 함께 했다.
14억 중국인들의 권력 정점에 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앙위 상무위원들이 김정은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는 점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한국, 미국 정상과의 회담을 앞둔 시점에서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중국 관영 CCTV와 북한 조선중앙통신 등을 통해 알려진 시진핑과 김정은 간의 회담 내용 가운데는 ‘단계적 조치’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지난 3월 28일 중국 외교부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김정은은 시진핑과의 정상회담에서 “현재 한반도 정세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며 “우리는 자발적으로 긴장 완화 조치를 취했고 평화적 대화를 제의했다”고 밝혔다.
김정은은 이어 “우리는 남북 관계를 화해와 협력 관계로 바꾸기로 하고 남북 정상회담과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다”면서 “한국과 미국이 선의를 갖고 우리 노력에 응답해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단계적-동시적 조치’를 취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또한 한반도 비핵화를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이므로, 실현을 위해 주력하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한반도 정세에 적극적인 변화가 있었고 북한이 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면서 “우리는 북한의 노력에 찬성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안정을 유지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화답했다.
김정은과 시진핑의 대화에서 나온 “한국과 미국이 단계적-동시적 조취를 취해야 한다”는 말은 사실 북한과 중국이 사드 배치 논란 때부터 주장한 ‘쌍중단-쌍궤’를 살짝 비튼 것이다.
사드 갈등 때부터 중국이 계속 주장했던 쌍중단-쌍궤는 북한이 핵 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면 한국과 미국은 연합훈련을 중단하고(쌍중단 시작), 한반도와 주변에 미 전략자산을 배치하지 않으며 주한미군뿐만 아니라 주일미군까지 철수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어 다음 단계로 미북 간 불가침협정(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한반도 내에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하면 미국이 아니라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감시 아래 핵무기를 폐기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빠진 내용은 “핵무기와 함께 핵무기 개발 시설 및 장비를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완전히 폐기하는 것”과 “탄도미사일 및 관련 시설 폐기”다. 즉 김정은과 시진핑이 만나 논의한 ‘단계적 조치’에는 미국과 일본, EU 등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핵무기 개발 기반의 제거 및 폐기는 포함돼 있지 않다.
지난 3월 30일 양제츠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외교위원이 김정은과 시진핑의 정상회담에 대한 내용과 결과를 브리핑하기 위해 방한했다. 양제츠 위원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단계적 조치’와 ‘사드 보복조치 해제’와 관련한 내용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양제츠 위원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북중 정상회담의 결과를 상세히 설명했다”고만 말했을 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날 청와대에서는 “김정은이 언급한 단계적-동시적 조치라는 것은 ‘행동 대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김정은이 만나는 정상과 비핵화 및 그에 따른 후속 조치가 타결되면 실무적 조치가 뒤따르게 된다는 측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부터 주장해 온 포괄적 타결과 별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기자들에게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당선 전부터 북한의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폐기에 대해 ‘포괄적 타결’을 옹호하는 주장을 해 왔다. 일각에서는 미국도 ‘포괄적 타결’을 지지한다는 주장을 편다.
2017년 6월 미국을 방문,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내놓은 공동언론발표에서 “한미 정상은 제재와 대화를 활용한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을 바탕으로 북핵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데 뜻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이를 보면 트럼프 미 대통령 또한 ‘단계적 조치’와 ‘포괄적 타결’에 동의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어진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발언은 결이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어 “트럼프 대통령과 저는 강력한 안보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데 동의했다”면서 “확장 억제를 포함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통해 압도적인 억제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북핵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한미 양국의 확고한 의지를 과소평가 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화 테이블에 조속히 복귀할 것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 공동언론발표에서 “북한 정권에 대한 전략적 인내는 끝났다”면서 “북한 정권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에는 굉장히 확실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협상 결과에 따라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면 한미 연합훈련과 전략자산 배치를 중단하고, 이것이 검증된 뒤에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이 철수하면 미북 평화협정을 맺기로 한 뒤에야 북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폐기한다는 북한과 중국의 주장과는 달리 북한이 조건 없는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폐기를 시작하면 이때부터 협상을 시작할 것이며 북한이 핵무기 및 관련 시설 선제 폐기 등으로 비핵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대북제재는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청와대의 설명은 미국과 북한 간의 정상회담에서 양측이 비핵화에 합의하면 북한과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미동맹의 연결점을 하나씩 풀어버리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청와대의 설명은 한미동맹을 중시하거나 북한의 말을 믿지 못하는 트럼프 정부 관계자들이 볼 때는 “문재인 정부가 우리 동맹인가 아니면 북한과 우리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원하는가”하고 의아하게 볼 여지가 있다.
김정은의 제안으로 한국, 미국이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뒤늦게 뛰어든 중국이 먼저 정상회담을 한 뒤 일본과 러시아도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러시아는 김정은 측에서 먼저 만나자고 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은 아베 측이 만나자고 제안 중인 것이 차이가 있다. 지난 3월 29일(현지시간)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은 마리아 자카로바 외무부 대변인이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을 현재 검토 중이며 (정상회담은) 곧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자카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김정은의 방중에 대해 “우리는 지역 긴장 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어떤 노력도 환영한다”며 “김정은의 방중은 한반도 긴장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러시아는 지난 3월 4일(현지시간) 전직 러시아 군참모부 정보국 스파이를 화학무기 ‘노비촉’으로 암살하려 한 사건 때문에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으로부터 상당한 외교적 압력을 받고 있다. 또한 유엔 안보리와 미국, EU, 호주 등의 대북제재와 관련해 부정적인 입장을 계속 밝혀왔다.
이런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볼 때 러시아는 중국에 이어 김정은의 후견인을 자처할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추측으로만 나왔던 북한-중국-러시아 공동 전선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한국과 미국, 북한 간의 대화 분위기 속에서 김정은이 중국·러시아와 정상회담을 가질 것이라는 소식에 조바심을 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 교도통신은 지난 3월 22일 “일본 정부가 북한에 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고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당시 교도통신에 따르면 아베 일본 총리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을 통해 북한 측에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북한의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문제를 논의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2002년 당시 고이즈미 총리가 약속한 경제적 지원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는 지난 3월 초 고노 다로 일 외무상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 강경화 외교장관을 만나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뒤에 이뤄진 조치였다고 한다.
교도통신은 “아베 총리는 여기에 더해 4월 중순 전에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갖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할 계획”이라는 소식통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일본 정부는 4월에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 5월로 예정된 미북 정상회담 등에서 납북자 문제와 같은 일본 측의 문제가 뒤로 밀릴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미국, 일본이 동맹이라고 믿었던 한국이 ‘우리민족끼리’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를 외치며,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며 일본과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모습까지 더하면 ‘한반도 비핵화 게임’에서 북한이 유리하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유세 때부터 외쳐온 ‘미국 우선주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게는 최대한의 압박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통상 면에서는 중국·한국을 한 묶음으로 보면서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일본 또한 통상 압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국은 또한 북한이나 중국이 말하는 ‘상호 합의에 따른 단계적 비핵화 조치’에 대해서는 “어림도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정부 관계자들은 오는 5월 김정은의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이런 저런 조건이 붙는다면 즉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올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여기까지 각 국가별로만 보면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으로 시작될 ‘한반도 비핵화 게임’은 긍정적인 결론보다는 부정적인 결론을 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다른 변수들까지 더해서 생각하면 불확실성이 다시 커진다. 다른 변수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호주·캐나다·뉴질랜드·영국 등 ‘UKUSA’ 동맹의 존재다.
NATO 회원국들은 푸틴 정권의 화학무기 사용 암살 문제와 신형 핵무기 전진 배치 문제로 러시아에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안보는 셀프”라는 주장과 경고를 들은 뒤 2018년부터는 다시 국방예산을 늘리고 있다. 러시아의 무력 사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NATO가 ‘한반도 비핵화’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보기관 회의체 때문에 ‘파이브 아이즈 동맹’이라고도 부르는 ‘UKUSA’ 동맹은 반중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매우 중대한 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패권주의를 깨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를 비핵화 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미 연합훈련이나 미 전략자산의 한반도 배치 전후나 남중국해에서 ‘자유항행작전’을 실시할 때마다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해군과 공군 등이 이곳에 오는 이유도 모두 반중 정책 때문이다.
이런 다른 변수(플레이어)들이 ‘한반도 비핵화 게임’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된다면 북한·중국·러시아 동맹이 협상에서 일방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는 어렵다. 다만 긍정적인 결과를 낸다고 해도 단기적으로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걸리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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