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바꾸려는 운동들은 대개 역사 다시 쓰기에서 시작한다. 첫 단계는 역사 다시 말하기다.
얼마 전 한 이스라엘 역사학자가 한 말인데 사실 별로 신선할 것도 없다. 이미 까마득한 옛날에 그람시는 문화, 역사 헤게모니 전쟁을 이야기했으며 모든 변혁 운동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과거를 들쑤셔 그들의 노선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발굴하고 분칠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경우라면 ‘해방 전후사의 인식’ 시리즈가 대표적인 역사 다시 쓰기다. 그 결과 자유인의 자랑스러운 나라 대한민국은 실종되었고 그 자리에 친일과 독재와 친미 정권이 들어앉았다.
이 역사 다시 쓰기는 역사의 영역에서만 진행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역사 다시 쓰기는 문화에서 펼쳐진다. 문화에서 구현된 다시 쓴 역사는 나중에 오히려 역사를 압도하며 대중들에게 사실처럼 각인된다. ‘태백산맥’은 그 탁월한 성과다. 이 전대미문의 가짜, 위조, 조작 소설은 해방공간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꿔놓았다.
역사 다시 쓰기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된다. 하나는 발굴하기다. 여러 성공 사례가 있지만 좀 덜 알려진 이야기를 하자면 ‘광해군의 재해석’이다. 광해는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복권이 안 된 인물이다. 노산군이 단종이 되고 사육신과 김종서가 신원, 복권이 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폭군의 지위를 지켰다. 이 광해를 무덤에서 끌어내 띄운 인물이 있다. 한국인 아니다. 일본의 어용학자인 이나바 이와키치다.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을 거쳐 만주건국대학 교수로 일했던 그는 광해라는 인물을 찾아내 당시 조선의 상황과 오버랩 시키며 폭군을 명군 혹은 현군으로 만들었다. 중화사상에 심취해 다들 명나라에 목을 매던 그 시기 외교적으로 탁월했던 광해가 청을 인정하면서 이른바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것이 이와키치의 주장이었다.
광해의 축출은 외교적 감이 떨어졌던 조선이 저지른 가장 멍청한 짓이며 그 결과 조선이 망했다는 얘기인데 그 말을 1940년대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조선인 여러분은 중국만 죽어라 좋아하는데 이미 대세는 일본으로 기울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반항을 멈추고 대일본제국으로 존경을 돌려라. 이 일본인의 주장을 그대로 물려받은 작품이 영화 ‘광해’다. 미국 영화 ‘데이브’의 틀에(아무리 봐도 완벽한 표절이다) 이나바 이와키치의 B급 학술을 그대로 쑤셔 박아 만든 이 영화로 광해는 400년 만에 복권이 되었다.
역사 세탁과 용도 마감 후 폐기
역사 다시 쓰기의 다른 하나는 역사의 재해석이다. 대부분 이순신을 박정희가 띄웠다고 알고 있는데 원조는 따로 있다. 바로 일본 제국 해군이었다. 막부를 타도한 사초도비 4현 중 특히 실력이 좋았던 게 사쓰마와 조슈다. 조슈는 일본 육군의 뿌리고 사쓰마는 일본 해군의 기원이 되는데 1869년 해군이 먼저 창설되고 1871년 육군이 뒤를 따른다.
1872년 병무성은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가 된다. 이때부터 두 조직은 완전히 따로 놀며 평행선을 달린다. 압박은 육군이 해군에 가했다. 제반 환경이 육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1871년 구미로 떠났던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와 내린 결론이 두 가지다.
하나는 러시아가 별 거 아니라는 거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추구해야 할 모델이 프랑스가 아닌 프로이센이라는 사실이다. 프로이센은 보병 제식 훈련으로 유럽을 강타한 나라다. 돈이 없어 기병과 포병을 포기하고 보병에 매달렸는데 이게 오히려 약이 된 것이다. 조슈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육군은 해군참모본부의 창설을 반대하고 다각도로 해군을 짓누른다. 해군이 살기 위해 부풀린 게 넬슨과 이순신이었다. 나폴레옹을 막은 것은 영국 해군 호레이쇼 넬슨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좌절시킨 것이 이순신이라는 주장이었다. 덕분에 인격 파탄이었던 넬슨은 역사상 최고의 해군 사령관이 되었고 이순신은 구국의 신이 되었다.
일본 해군은 역사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는 ‘세계 4대 해전’을 조작하며 해군이 살아야 일본이 산다는 주장을 펴 나갔다. 이순신이 일본에서 폐기된 것은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시아 함대를 잡은 쓰시마 해전 이후부터다. 러일전쟁으로 도고 헤이하치로는 군신의 자리에 올랐고 자연스럽게 이순신에 대한 조명은 불이 꺼진다.
다시 쓴 역사는 그러나 아직은 날 것이다. 해서 여기에 당의정을 입혀야 하는데 그게 바로 문화예술이다. 아무도 천안함에 대한 1000쪽 짜리 보고서를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신 한 시간 반 동안 영상으로 그 사건을 ‘보고’ 싶어 한다.
좌익들이 문화예술에 목을 매는 이유다. 일찍이 레닌은 영화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 간파했으며 제3 제국은 아리안 족의 탁월함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를 선택했다. 그럼 보수우파도 되지 않느냐고? 이건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 보수우파는 성취를 덕목으로 가지며 항전이나 항쟁은 좌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예술의 본질을 알면 금방 이해가 가능하다.
문화예술은 너무 방대하니 대표적인 매체인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를 내 식으로 정의하자면 ‘불가능한, 힘든 일에 도전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다. 영화 ‘록키’는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채권추심업자와 막강 세계 챔피언의 대결이다. 누구를 응원하겠는가.
당연히 채권추심업자 청년이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약한 것이 강한 것과 싸울 때 우리는 약한 것의 편을 들며 결과에 상관없이 그 과정에 감동한다. 인간의 거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강자가 아닌 까닭이다. 학도병 이야기를 다룬 ‘포화 속으로’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의 흥행 성공은 우익 영화라서가 아니다. 약자인 학도병들이 인민군 정규부대와 맞서는 설정이기 때문이다(영화 ‘국제시장’의 성공도 잘 생각해보면 이 논리의 연장선상이다).
보수우익으로 분류되는 필자지만 영화 시나리오 집필 의뢰가 들어온다면 보수 가치 구현 이런 거 절대 안 한다. 그 이야기들은 재미가 없다. 70년대 산업화 이야기 감동 아니냐고? 그건 보수우익에게나 그렇다. 그리고 보수우익도 그런 영화 두 편만 연달아 틀어주면 잔다.
흥행이 보이고 돈이 되는 영화가 있는데 가시밭길 갈 이유가 없다. 아마도 거대 자본과 결탁된 음흉한 정치권력에 맞서는 소시민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왜? 영화의 본질이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영화가 서울대 나와서 삼성 들어가는 얘기니까. 해서 문화예술 전쟁에서 우파가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불손한 것이다. 슬퍼할 필요 없다. 전 세계가 다 그렇다.
우익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리우드에서 유일한 보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하나고 보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익인 일본 영화인은 기타노 다케시가 전부다. 문화예술에서 보수우익의 패배를 인정하자. 그곳은 좌익의 전용 놀이터이고 보수우익의 무대는 정치와 경제다. 이제는 그마저도 빼앗기고 있으니 더 할 말도 없지만.
남정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8기 미래한국 편집위원
숭실대 겸임교수
한국영화기획프로듀서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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