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한국이 서로 동병상련을 앓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미중무역 전쟁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져나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발 미세먼지로 숨쉬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대만과 한국은 이념에 의한 동족 분단이라는 아픔도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두 국가의 국민들이 비슷할 것 같지만, 그 문화와 속내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한국이 중국과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는 반면, 대만은 중국에 대해 항상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7년 6월 대만 싱크탱크 신대만 국책연구소의 조사 발표에 의하면 대만인들의 75%가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을 별개의 두 국가로 여긴다고 대답해 화제가 됐다.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국가라는 대답은 14.2%에 불과했다. 이는 중국이 대만을 향해 집요하게 경제적 당근과 압박, 그리고 군사적 위협으로 ‘하나의 중국’을 관철해 왔지만, 대만 국민들의 독립심을 꺾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같은 조사에 따르면 대만 국민의 75.8%는 ‘대만’ 명의로 유엔 가입을 지지했고, 88.2%는 대만이 정상적인 국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이 추구하는 양안 현상유지 정책 지지는 65.4%, 중국과 현상유지가 안 되면 독립해야 한다는 대답은 54.8%로 조사됐다. 설문에서 80.1%가 자신을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으로 여겼으며, 정체성이 중국인이라는 응답은 12.9%였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도대체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라도 정복할 것 같은 대만의 형편에서 어떻게 대만인들은 중국에 그토록 당당할 수 있을까. 그 비밀은 ‘진정한 중화(中華)의 계승자는 바로 대만’이라는 자부심에 있을 것 같다.
대만 사람들은 청과 명대에 본토 중국에서 건너온 이들의 후손인 본성인(本省人)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에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된다. 대만 정착 역사가 더 오래된 본성인들은 대만인으로서 갖는 정체성이 외성인들보다 강한 편이다. 이러한 본성인들은 차이 총통을 위시한 민진당의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국민당은 외성인과 본성인들이 섞여 있고 6개의 서로 다른 정파들이 뒤섞여 권력 다툼이 강한 편이다. 이러한 대만은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자신들의 공식 명칭을 가지고 있다. 원래 중화민국은 1912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광활한 대륙에 세워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아울러 1931년에는 이미 서구 근대법의 영향을 받은 중화민국 헌법이 쑨원을 대표로 하는 난징 정부에 의해 제정되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민족, 민생, 민권 등의 3민주의와 함께 3권 분립을 넘어 공직자 채용과 독립된 감사원을 포함한 5권 분립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민본주의 사상이 중화민국의 통치이념에 적용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10년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신문화운동은 ‘민주’와 ‘과학’으로 봉건 제도와 미신 관념을 반대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주도했던 천두슈는 <신문화>라는 잡지를 통해 중국의 학생, 청년들에게 ‘자주적, 진보적, 진취적, 세계적, 실리적, 과학적인 청년이 될 것’을 강조했다. 특히 천두슈는 ‘민주’의 제창에 있어선 전근대적 정치, 도덕, 문화의 근간인 공자 학설과 존공 사상을 급진적으로 비판하고, ‘과학’의 제창에 있어서는 자연과학 성과를 비롯해 생물의 기원과 의학 등 여러 분야를 <신청년>에 소개했다.
또 구(舊)윤리와 유교, 구정치에 반대하며 신도덕과 민주를 주장했고 구예술, 구종교, 구문학에 반대해 신문학과 과학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문화운동으로 중국내 지식인들과 청년들은 자유주의적 사상과 가치에 눈을 뜬 사례가 많았다. 동시에 난징을 중심으로 상하이와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홍콩의 영향으로 자본주의와 기업가 정신이 꽃피고 있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28년에 일어났다.
중화민국 국민정부(中華民國國民政府)가 위안스카이 등의 북방 군벌에 승리를 거둔 해가 바로 1928년인데 이로부터 1948년까지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대륙을 통치하기에 이른다. 통상 이 시기를 난징 십년(南京十年)이라 부르는데 특히 이 시기는 이전의 신문화운동의 영향으로 중국에 문화, 경제, 사회는 급속한 발전과 변화를 겪었다. 특히 국민정부 시기 동안 경제는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황금 10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근대적 경제 발전을 이뤘다.
대도시나 해안 인근 도시들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이 두드러졌으며 인구 300만 이상의 대도시로 성장한 상하이 등지에서는 근대적 도시 문화가 활짝 꽃피게 된다. 신문이나 잡지, 라디오 방송 등 대중 매체 역시 양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많은 소비자를 확보했다. 이에 따라 영화나 연극, 가요 등의 대중문화도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중국이 아편전쟁 패배로 서구 열강에 자존심을 잃었던 것을 복구해 가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중화민국은 ‘황금의 10년’과 그 이전의 신문화계몽기를 통해 자유주의와 합리적 근대적 사고를 하게 된 세대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1949년 국공합작의 실패로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베이, 지금의 대만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는 흔히 장개석의 중화민국이 국공합작에 패해서 대만으로 이주할 때 군부대와 정부 요인들만 이주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거부한 자유중국의 수많은 기업인, 지식인, 교육자, 과학자, 예술인들이 중화민국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 숫자가 무려 200만에 달했다. 이들은 대부분 대륙의 중화민국에서 근대적 지성과 자유,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해 눈을 뜬 이들이었다.
당연히 대만은 일본에 이어 그야말로 동아시아 근대성의 새로운 집결지가 되었던 셈. 흔히 한국의 경제성장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1950년대부터 시작된 대만의 경제적 발전은 냉전 시기에 이미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웃돌고 있었다. 이 점에서 한국과 대만의 경제 발전의 숨은 동력을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의 저자 애쓰모글로 교수는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시계열적으로 비교 분석한 결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축적된 근대적 인프라와 인적 자본을 포용적 경제, 즉 사유재산의 보호와 시장경제 형태로 넘겨받은 이유가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대만의 경우 식민지 근대의 유산이 아니라 1910년부터 시작된 근대적 계몽과 황금의 10년간이라 불리는 중화민국 통치 기간에 자유경제와 사유재산 제도가 만든 문화적, 제도적, 법적 인프라가 컸다. 물론 1950년대 이후 싱가포르와 홍콩은 사유재산제도와 자유 자본주의의 성과로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들을 일컬어 ‘아시아의 4마리 용’이라 불렀다. 그러나 한국과 대만 모두 중국의 WTO 가입 이후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의 공세로 세계 시장에 경쟁력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나 대만은 중국의 경제 보복이나 군사적 위협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시장을 세계로 확장하는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대만에는 글로벌 대기업이 없는 대신 기술력이 탄탄한 중소기업들이 많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변신하기가 수월하다. 이러한 점을 이용해 대만은 중국의 문화 전통을 소프트파워로 활용한 창조기업 육성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중국의 정통성을 자신들이 계승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디자인과 기술에서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갖추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제 그러한 대만은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레버리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예상들이 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만과 일본은 우리와 일본의 관계보다 훨씬 가깝다. 대만에는 혐일이 없으며 오히려 한국보다 일본을 선호한다. 동아시아 정세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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