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모든 사람이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스위스이지만 중세의 스위스는 독립된 구심점을 갖지 못하고, 몇몇 유력 가문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훗날 유럽의 맹주가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까지만 해도 알프스 산맥 언저리에 웅거하던 시골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13세기 후반, 강력한 위세를 지닌 교황이 잇달아 황제 파문을 남발하는 상황 속에서, 약 20년간 황제가 선출되지 못하며 대공위 시대의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를 벗어나 유럽의 패권자로 급부상할 계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은 약한 가문을 골라 황제로 옹립하게 됩니다.
산골의 일개 백작에서 독일왕이 된 루돌프 1세는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했습니다. 협소한 스위스 산골짜기를 벗어나 오스트리아 공국의 영지를 장악하게 됩니다. 1291년 스위스 4개 주가 스위스 동맹을 결성하여 독립 투쟁을 일으켰고, 결국 1315년 스위스가 독립에 성공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오스트리아가 되었습니다.
스위스의 독립운동이 태동되고 있던 바로 그 시절,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의 주민들을 억압했습니다. 특히 우리(Uri)주의 총독인 헤르만 게슬러는 광장의 장대 위에 모자를 걸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자에 절을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오두막집에 윌리엄 텔이란 명사수 사냥꾼이 살았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과 같이 살며 매일같이 사냥을 해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사냥꾼이었습니다. 시내에 장을 보러 들어왔던 윌리엄 텔은 모자에 절을 하지 않아 게슬러의 사병들에게 체포됩니다.
게슬러의 사병들은 월리엄 텔을 죽이려들었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을 회상한 게슬러가 만류했습니다. 눈이 많이 온 어느 겨울 날, 외나무 다리에서 월리엄 텔과 게슬러가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월리엄 텔이 게슬러를 죽이기는 커녕 오히려 게슬러가 안전히 건널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일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러나 오만한 폭군이었던 게슬러는 윌리엄 텔에게 그의 아들인 발터의 머리에 사과를 놓고 그것을 활로 쏘라는, 결국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 잔인한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명 사수였던 윌리엄 텔의 화살은 놀랍게도 발터 머리 위 사과의 한 가운데를 정확히 맞췄고 발터는 아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실력을 믿었고 아버지 텔을 믿은 것입니다.
사람들 모두 안도하고 텔 부자가 기뻐할 때 화살 하나가 텔의 품에서 떨어졌습니다. 게슬러는 "그, 그 화살은 어디에 쓰려던 거냐?"고 물었고 텔은 "만약 처음의 화살이 아들의 심장을 맞추면 두번째 화살은 당신의 심장에 쏘려 한 것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두번째 화살이 발각되어 체포된 윌리엄 텔은 배에 태워져 게슬러의 성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호수를 건너던 중 갑자기 폭풍우를 만났지만 배를 운전하는 데 능숙했던 윌리엄 텔은 배를 몰다 몰래 육지로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훗날 게슬러 총독은 의문의 화살을 맞고 최후를 맞게 됩니다. 윌리엄 텔의 화살이겠지요? 윌리엄 텔은 게슬러를 화살로 사살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잔혹한 총독 게슬러의 최후임과 동시에 스위스 독립 혁명의 태동이었습니다.
윌리엄 텔은 가상 인물이지만, 그가 사과를 쏜 날짜는 1307년 11월 18일이라고까지 특정되어 있습니다. 마침내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는 건국설화로 발전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텔의 전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괴테는 이 아이디어를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줬습니다. 실러는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희곡 '윌리엄 텔'을 썼고, 1804년 3월 17일 바이마르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실러의 희곡에 기반해서 1829년에 오페라 '윌리엄 텔'을 작곡했습니다. 이 오페라에 쓰인 윌리엄 텔 서곡은 로시니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를 필두로 뉴튼의 사과 등과 함께 윌리엄 텔의 사과는 인류의 유명한 다섯 사과에 꼽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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