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 법률과 감성적 예술은 연결점이 있다
서양미술사를 섭렵하다 보면 아버지가 법률가였거나 화가 본인이 법학을 공부한 후 미술로 전향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법률이라는 것은 누군가를 심판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매우 이성적인 사고체계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하지만 법률처럼 심리적, 철학적, 문학적 시각을 융합한 종합적 시각이 요구되는 분야도 없습니다. 원고, 피고 양측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얘기를 경청해야 하는 ‘열린 마음(open mind)’이 필수적이고 그들의 얘기가 어디까지 진실을 담고 있는지 심리 상태를 파악하고 그들이 들고 있는 증거 또한 얼마나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지를 증명할 잣대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판단과 정보에 맞추어 최종적으로 이해 가능한 문구들로 판결문을 작성해야 하는 문학적 단계도 필요합니다. 감성적 소통(emotional communication)과 이성적 인식(rational awareness)이 상호공존(mutual coexistence)해야 하는 것이 법률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성적인 법률이 감성적인 예술과 상통하는 연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술의 사회문제에 대한 소통과 인식의 중요한 형태라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합니다.
“Art is a form of communication in which the artist attempts to influence society to take a deeper look into a subject. Art beyond inspiring action, can also be a powerful tool for awareness about social issues”
예술이 논증을 정리하는 데 도움
진보성과 자유성이 강한 예술과 보수성과 구속성이 강한 법률은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로부터 예술과 법률은 서로 무관한 별개의 분야이며 다소 적대적인(hostile)관계에 있다고 믿어져 왔습니다. “법과 예술이 만나면 서로 피하는 것이 최선이다(When law and art chance a meeting, they should do their best to avoid each other.)”라는 말이 예로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stable and conservative) 법률이 창의적이고 역동적인(creative and dynamic) 미술에 맞추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1세기는 사통팔달의 시대, 즉 ‘스키조 프레니아(schizophrenia)’의 시대이자 다양성(diversity), 다방면(multi-direction)의 시대입니다. 또 크로스 오버(cross-over)의 시대입니다. 법률을 공부하는 사람이 외곬수로 법률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미술, 음악, 철학 등을 등을 두루 섭렵하여 다양성, 융통성, 통합성을 함양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언어와 시각을 초월한 소통의 수단으로서 예술은 법적 정의와 정체성에 관한 대화의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의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As a form of communication that transcends words and time, art can be a powerful catalyst for conversations about justice and identity.)
예술과 법률의 관계 (nexus/con-nection between art and law)에 관한 몇 가지 논의를 살펴봅니다.
법학자 스펜스(Gerry Spence)는 이렇게 말합니다.
“40대가 되니까 법률이 공허하고 무의미해졌다. 법률 공부가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예술적 인 감성, 즉 느끼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ability to feel and create)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창의적이지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If we are not creative, we are dead). 우리는 판결의 모든 과정에서 창의적이어야 한다(We need to be creative during every part of our trial). 훌륭한 재판관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성(human nature)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connection between people and nature)를 공부해야 한다.”
어떤 법학자는 이렇게 논의를 이어갑니다.
“법률학자들은 쾌활하고 창의적인 욕구를 너무 억누릅니다. 판결문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그림이나 시에서 찾을 수 있는 ‘백지 상태(white space)’가 필요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판결의 짜임새나 깊이, 리듬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술이 논증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Art can help you put arguments together). 판결의 도입 부분 첫마디는 그림을 그릴 때 첫 번째 붓 터치와 그 의미와 역할이 상통합니다.”
와이릭(Jeri Wyrick)은 아래와 같이 토로합니다.
“법률 공부를 하다가 법률이 너무 지루하고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탈피하려면 미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과 드로잉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법학자들의 위와 같은 소회를 종합해 보면 훌륭한 법관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경우처럼 ‘공감능력(sympathy/empathy)’이 꼭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듯합니다. 그리고 공감 능력의 향상을 위해 3가지 내용이 종종 강조됩니다.
(가)다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기(seeing with the eyes of another)
(나)다른 사람의 귀로 들어보기(listening with the ears of another)
(다)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느껴보기(feeling with the heart of another)
공감 능력 향상의 8가지 전략(strategy)을 논하기도 합니다.
(A)자신에 대한 도전(challenge yourself) (B)평상적인 환경 이탈(get out of usual environment) (C)상대방의 반응 체크(get feed-back) (D)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기(get in others' shoes) (E)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체험하기(explore the heart,not head) (F)편견을 검증하기(examine the biases) (G)호기심 배양하기(cultivate the curiosity) (H)더 나은 질문하기(ask better questions)
미국 법조계에서 강조하는 바람직한 법률가 이미지 역시 공감 능력 향상 방법들과 일맥상통합니다.
(A)판사는 국민의 공복임을 명심하라 (B)노여움을 참고 예의, 배려, 이해를 보여라 (C)법정에 처음 나온 증인을 이해하라 (D)친절하고 겸손하라 (E)유머를 함양하라 (F)법정을 정의와 진실의 전당으로 만들어라 (G)한없는 인내, 균형 잡힌 배려를 실천하라 (H)당사자의 형편과 기분을 파악하라 (I)지혜, 공평성, 성실성을 보여라 (J)인간관계, 사회 현상에 대한 통찰력을 길러라
칸딘스키는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
서양미술사를 살피다 보면 법학을 공부한 후 화가로 전향한 예술가들이 여럿 눈에 띕니다. 법과대학 교수로 있다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화가로 전향한 경우도 있습니다. 법률가인 부친의 강압에 못 이겨 법률 공부를 했으나, 예술 활동에 대한 열망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림에 뛰어든 예술가들도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이처럼 법률 공부를 하고 나서 훗날 화가로 전향한 예술가들의 생애를 들여다 봅니다.
(A)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 러시아 : 1866~1944)
1866년 모스크바에서 차(tea)를 수입, 판매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해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경제학을 전공합니다. 29세가 될 때까지 에스토니아의 도파대학(Dorpat University)에서 법학 교수를 역임합니다. 그는 마티스(Henri Matisse), 피카소(Pablo Picasso)와 함께 세잔 키즈(Cezanne kids)로 불렸습니다. 1896년 모스크바 개최 인상파 모네(Claude Monet) 전시회를 찾은 칸딘스키는 프리즘을 통과한 듯 다양한 색채로 그려진 ‘건초더미(hay stack)’ 그림에 충격을 받습니다.
늦여름 해질녘, 봄기운 녹아 내린 들판, 한겨울 눈 덮인 다양한 풍경에 전율을 느껴 곧바로 법학 교수직을 버리고 미술에 입문합니다. 그는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분리파(Berlin Secession), 팔랑크스(Phalanx), 청기사파(Blue Rider) 활동을 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힙니다. 그는 이때 "예술가는 눈뿐만 아니라 영혼도 훈련해야 한다"면서 이성적, 합리적 사고의 필요성(법률학 공부에서 얻은 영감)을 강조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과 러시아 혁명(1917), 나치(NAZI)의 출현으로 인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sa)를 비롯해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을 나그네처럼 떠돌며 살면서 3개의 국적을 가졌고 3명의 여성과 삶을 공유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전래동화와 민요 등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표현함으로써 추상화 장르(genre)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음악을 들을 때 색채가 눈앞에 펼쳐지는 ‘공감각(synesthesia)’의 소유자로서 바그너(Wagner)와 쇤베르크(Schonberg) 음악에서 받은 감동을 회화로 옮기는 구성을 펼쳐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발돋움했습니다.
1922년 소비에트 연방(USSR) 결성 후 공산당은 그의 추상화가 사회주의 이념에 위반한다며 그림을 금지합니다. 다시 독일로 돌아가 그로피우스(Gropius) 주선으로 바우하우스(Bauhaus) 교수로 초빙됩니다. 1933년까지 유럽문화의 혁신운동을 펼치고 1933년 바우하우스 폐교 후 프랑스로 망명해 다채로운 색의 원(circle)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다가 1944년 작고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구성 8, 무르나우(Murnau)의 교회, 구성 8(바흐의 토카타와 푸카), 동심원과 정4각형, 노랑빨강파랑, 원속의 원, 말을 탄 커플, 구성6.7, 하늘색, 맑은 하늘, 즉흥2.7 등이 있습니다.
(B)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 프랑스 : 1867~1947)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보나르는 프랑스 출신 화가 겸 판화가로 후기인상파 중 아방가르드(avant-garde) 화가단체인 ‘나비 파(Les Nabis)’의 창립멤버입니다. 그는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 연고로 그림이 항상 ‘꿈같은(dreamlike)’ 느낌을 전해줍니다.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소소한 정감을 강조한 그를 정감의 화가라는 뜻으로 ‘앵띠미스트(intimiste)’라 불렀습니다. 1867년 프랑스 국방부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의 요구에 따라 법률을 공부, 1890년부터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동시에 문학, 철학과 함께 그림공부도 병행했습니다. 프랑스 샹퍄뉴(champagne)광고 포스터 성공으로 화가의 길로 접어듭니다.
1891년 로트렉(Toulouse Lautrec)을 만나고, 1893년까지 미술잡지 ‘르뷔 블랑슈(Revue blanche)’편집에도 관여합니다. 뷔야르(Edouard Vuillard)와 함께 삽화를 그렸고, 1896년 뒤랑 뤼엘 갤러리(Galerie Durand Ruel)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엽니다. 20대 때는 상징적, 정신적 본성을 표현했던 젊은 화가모임 ‘나비파(Les Nabis)’의 일원이 되었는데 1888년 아카데미 쥘리앵(Academie Julien)에서 출범한 이 모임에 세뤼지에(Paul Serusier), 호들러(Ferdinand Hodler), 드니(Maurice Denis), 뷔야르(Edouard Vuillard), 발로통(Felix Valloton) 등이 참여했습니다.
나비(Nabis)는 히브리어로 선지자 (예언자)라는 뜻인데, 이들이 새로운 예술의 선도자라는 의미에서 붙인 명칭입니다. Nabi파는 예술과 장식,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인상파 그림이 피상적 묘사와 감각에 치우쳐 있다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보나르의 작품은 서술적, 자전적 특징을 보였고, 특히 아내 마르트(Marthe)를 대상으로 한 그림을 다수 그렸습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모티브에 테두리를 두르고, 경계를 구분짓는 ’퐁타방 방식(Ecole Pont-Aven)’을 사용했는데, 이는 고갱(Paul Gauguin)이 주로 사용한 기법입니다.
잔잔한 파스텔톤(pastel tone)의 색채와 여유로운 일상이 조화를 이루어, 봄날의 나른한 오후를 연상케 하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그는 또한 일본 판화 ‘우끼요에(ukiyo-e)’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1942년 마르트가 후두염으로 작고하자 그는 자화상과 풍경화에 삼취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분홍빛 화장, 정원의 여인들, 지상낙원, 유모의 나들이, 미모사 핀 아틀리에, 프랑스 샹파뉴, 흰 고양이, 카네(Cannet)의 풍경 등이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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