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8월 23일)가 지났다. 여름 땡볕은 여전하다. 올해가 가장 덥지 않은 여름이 될지도 모른단다. 어쩌겠는가. 인간의 오만과 무지가 빚은 죄과인 것을. 폭서에 맞서는 게 상책이다.
홍제천을 걸었다. 홍제천 총길이 13.92㎞ 중 약 9km쯤 걸었다. 홍제천을 택한 이유는 하나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태양 없는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개천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지붕을 인 하천이다. 물길을 따라 내부순환도로가 달린다. 고가도로 그늘이 하늘을 가려준다. 그 구간은 무려 6.5km다. 뙤약볕 없는 개천 산책길을 택한 것이다.
홍제천의 발원지는 북악산 북서쪽 기슭이다. 안산을 지나 백련산을 돌아 불광천을 만난다. 강폭을 넓힌 홍제천은 난지도를 끼고 한강으로 흐른다. 홍제천은 묘한 하천이다. 홍제천은 이중적이다. 상류는 자연친화적 하천이다. 하류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 정비된 하천을 볼 수 있다. 그만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슬픔이 역사가 되어 뒤엉켜 있다.
발원지 근처에는 조선의 대학자(김정희)가 있다. 북한산 발치의 개천가에는 조선 선비가 독서하고 노닐던 정자(세검정)와 놀이터(탕춘대)가 있다. 생업을 위해 나무를 키우고 종이를 만들던 터(조지서)도 있다. 물줄기가 굵어져 물굽이 치는 곳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아픔이 흐른다. 그 모든 게 불사인가. 고려시대의 그려진 부처님 (백불)도 홍제천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유일한 홍제천 복개 구간인 홍제유연을 지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서울의 근현대사의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있다. 사라져가는 재래시장 현장, 서부지역 랜드마크의 변화, 하천 공원의 생태를 볼 수 있다.
물길의 흐름 따라 홍제천 탐방에 나섰다. 북한산에서 내려와 백사실 계곡부터 시작했다. ‘백사실’이라는 이름은 바위에 새겨진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씨에서 유래한다. 동천은 ‘성스러운 장소’를 뜻한다. 풍광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이곳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별서 (別墅) 터가 있다. 백석동천의 정자 주춧돌과 연못(함벽지), 언덕 위의 별서 터 주춧돌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별서(별장)를 ‘계류정원(溪流庭園·산골짜기에서 흐르는 자연스러운 시냇물이 있는 정원)’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다.
서울 근현대사의 빛과 그림자
냇물을 따라 난 산길을 내려왔다. 산길에는 “도롱뇽이 살고 있어요”라는 푯말이 보인다. 도롱뇽은 1급 수지에서만 산다. 그만큼 깨끗하다는 얘기이다. 멀찌감치 절 한 채가 보인다. 현통사다. 현통사 담장 옆으로는 거대한 흰 바위가 계곡을 따라 무리 지어 흘러내린다. 흰 바위는 ‘백석’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계곡을 볼 수 있다. 촘촘히 들어선 집들이 계곡을 감춰버렸다.
비탈길로 된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신영동 삼거리다. 흔하지 않은 나무, 5~6그루가 줄지어 서 있다. 몇 그루의 나무지만 이곳이 옛날 ‘닥나무 군락지’임을 알려준다. 닥나무는 종이 원료다. 이곳에 조선시대 500년 동안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가 있었다. 조지서는 국가문서 및 외교문서에 쓰인 고급한지를 만들던 관청이다. 산업 전통은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1960년대까지 한지 공장의 집결소였다. 종이와 불은 상극이다. 한지 공장에 불이 잦았다. 1944년에도 불이 났다. 인근에 있던 홍제천의 제1 명소, 세검정을 재로 만들었다. 현재 세검정은 1977년에 복원됐다. 사실적 묘사에 뛰어났던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대로 지었다. 세검정은 영조가 인조반정을 기려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완성된 세검정의 모습을 영조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린 그림이 바로 ‘세검정도’다. ‘세검’은 칼을 씻어 칼집에 넣는다는 의미다. 칼을 쓸 일이 없는 평안한 시대를 의미한다.
‘세검정’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이괄의 난(1624년)을 일으킨 반란군 지휘부가 이곳에서 칼을 씻어 반정의 결의를 다졌다는 얘기가 있다. 이괄의 난은 조선에서 일어난 유일한 반란이다. 야사로 전해오는 얘기다.
이것은 정사다. 전례 없는 국가적 수모를 겪은 병자호란, 그 원인은 인조반정이다. 병자호란은 세상의 변화에 무지했던 조선 조정이 부른 참화였다. ‘오랑캐’에게 능욕당했다. 남성은 포로로, 여성은 공물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그 숫자가 60만 명이다. 한양 인구의 1/10이다. ‘공물’이 어떤 고통과 모욕을 당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조선과 조선 사내는 그 아픔과 상처를 외면했다. 한 여인은 두 명의 남편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夫)는 게 그 이유다. 여성을 지켜주지도 못한 ‘양반 사내’는 죽지 못해 살아온 여성을 외면했다. 아니 ‘화냥년(還鄕女)’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였다. 갈 곳을 잃은 수많은 ‘환향녀’는 소복을 입고 남산을 찾았다. 목숨을 끊기 위해서다. 조정은 궁여지책의 방책을 내놓았다. 홍제천에서 목욕한 ‘환향녀’에게는 정절을 문제 삼지 말라는 게 그것이다.
슬픈 사연을 뒤로 하고 걸었다. 상명대 방향으로 큰길을 건넜다. 더위를 피해 서둘러 홍제천으로 내려왔다. 400여m쯤 내려가자 육중한 건축물이 보였다. 홍지문이다. 홍지문은 무지개 모양의 5개 반원형 다리로 만든 오간대수문을 디디고 서 있다. 홍지문은 한양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4km의 탕춘대성 성문이다. 탕춘대성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도성 방위를 위해 지었다. 탕춘대성이란 이름은 연산군의 놀이터였던 ‘탕춘대’에서 따왔다. 탕춘대 터는 세검정에서 100m 정도 아래에 남아 있다. 홍지문이라는 이름은 숙종이 친필 편액을 하사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한북문이던 게 바뀐 것이다. 1921년 대홍수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완전히 유실됐다. 197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저 멀리 사찰이 보인다. 옥천암이다. 옥천암은 고려 불상인 마애보살좌상’ (보물 제1820호)으로 유명하다. 거대한 암석에 양각된 5m 높이의 흰색 불상이다. 흔히 ‘보도각 백불(白佛)’ 혹은 ‘백의관음(白衣觀音)’이라고 부른다. 이 앞을 흐르는 홍제천을 ‘불천(佛川)’이라고 한다. 이 고찰도 하천의 이름을 따라 ‘불암(佛巖)’이라 불렸다. 불암의 마애불(백불)을 모신 누각이 바로 ‘보도각(普渡閣)이다.
백불은 고려시대 불상의 전형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화관을 쓰고 있다. 나발(螺髮·소라 모양으로 틀어 올린 부처의 머리)를 하지 않고 있다.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져 있다. 이게 고려시대 불상의 전형적 특징이다. 그렇다면 흰색 분을 칠한 것도 고려식 양식일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 태조인 이성계가 백불 앞에서 영원한 왕업을 기원했다는 얘기가 내려왔다.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도 이곳에 와서 복을 빌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화해와 조선의 새 출발을 기원했으리라. 이때부터 마애보살좌상에 흰색을 칠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금 더 내려가자 홍제천은 활처럼 휜다. 그 언저리에서 다리 하나를 만났다. ‘포방교’다. 다리로 올라 표지판이 가르치는 대로 자리를 옮겼다. 곧 시골 읍내시장 같은 포방터시장이 나타났다. 노점과 가게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시장의 상징물은 군인이다. 군인이 화포 대신 당근을 들고 있다. 시장 연원을 암시한다.
포방터는 조선시대 때는 중요한 군사기지이자 군사시설이었다. 도성 방위를 책임진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 중 하나인 어여청 군사가 포격 훈련하던 터다. 어영청의 전신은 인조의 친위부대인 어영군이다. 이괄의 난 때 어영군은 공주 공산성으로 파천하는 인조를 호위했다. 인조가 1637년 삼전도 굴욕을 당한 후 조직을 확대 개편, 어영청이 됐다. 역할도 전환됐다. 북벌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어영청은 총과 포로 무장한 조선의 최정예부대였다.
하지만 백성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북벌을 위해 만들어진 군대가 청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3차례나 러시아 군대에 패배한 청은 조선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어영청 군대가 파견됐다. 러시아군을 물리쳤다(나선정벌, 1651년). 적대국 편에서 적군을 물리친 것이다. 청과 관계가 모호해졌다. 주적이 사라진 셈이다. 어영청의 존재 이유도 없어졌다. 거기다가 조정은 재정 부족으로 군인 월급조차 줄 수 없었다. 결국 군란(임오군란)으로 폭발했다. 어영청은 갑오경장이 지난 뒤 최정예부대라는 영예를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넘겨줬다. 백성은 어영청을 ‘어영비영(御營非營)’이라고 힐난했다.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어영비영이 발음이 편한 ‘어영부영’으로 변했다. 아무런 의지도 없이 되는대로 행동하는 모양을 일컫는 말이다.
어영군이 어영청으로 위상이 격상되면서 총융청이 포격 훈련을 대신 맡았다. 6·25전쟁 때도 포병부대가 포방터 부근에서 수도경비를 맡았다. 이 지역은 군사시설로 역할이 꽤 오래 지속된 셈이다. 총융청 군사가 철수한 뒤 이 빈터에 백성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라고 ‘신흥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신흥동에는 최신식 건물이 들어섰다. 1970년 지어진 유진상가다. 한눈에 봐도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진상가는 한때 최고급 주상복합건물의 대명사였다. 서울 서북부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유진상가는 홍제천을 복개된 뒤 그 위에 지어졌다. 복개 부분에 지은 이유가 있다. 유진상가 건물은 서울 서북지역이 뚫렸을 경우 시가전을 대비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홍제유연은 예술가의 전시 무대이자 시민들의 놀이터
복개 부분이 철거된 이후에도 유진상가 하부는 방치됐다. 이것이 ‘지하예술광장’으로 되어 살아났다. ‘홍제유연(弘濟流緣)’이 그것이다. 빛, 소리, 색, 기술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공공미술이 지하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홍제유연은 예술가의 전시 무대이자 시민들의 놀이터가 된 셈이다.
홍제유연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청아하던 물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우렁차게 변했다. 수없이 많은 돌부리에 부딪혀 깨진 물살 때문이다. 내부순환도로의 자동차 소리도 빨아들였다. 홍제천 산책로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유진상가 이전의 홍제천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갖춘 상류와는 달랐다.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거나 멋진 돌과 바위로 꾸며져 있다.
얼마를 걸었을까. 홍제천 폭포마당이 나왔다. 인공폭포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자연과 잘 어우러진 폭포였다. 다시 홍제천변을 걸었다. 고가도로를 떠받친 채 도열한 콘크리트 기둥마다 세계적 명화가 크게 확대되어 걸려 있다. 고가도로의 삭막함을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홍제천과 수초가 잘 어울렸다. 저절로 그림에 눈이 간다. 그림 보는 재미가 있다.
평범한 산책로를 따라 약 2.5km를 내려갔다. 사천교다. 사천교에서 홍제천 산책길을 벗어나면 모래내 시장이다. 모래내시장은 서울에서 가장 인심이 후한 재래시장으로 소문이 났던 곳이다. 영화는 길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모래내시장은 쇠락 일로에 있다. 재개발된 서중시장은 사라졌다. 모래내시장도 겨우 시장의 골목 한두 개만 남아 있다. 명목도 언제까지 유지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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