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8년 전 월간조선(2005년 11월호)에 ‘스승님은 김정일의 인질이 되셨습니다’라는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그 칼럼에서 필자의 고려대 사학과 스승인 강만길 교수의 역사인식론을 비판했다. 그 글은 고대 사학과 동문 교수진은 물론 역사학계에 예상외의 큰 반향을 일으켰기에, 필자는 ‘강만길 역사학 비판’이란 책을 내려는 계획이었지만, 그만 출판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후일 한국근현대사 전공자들이 어련히 알아서 강 교수의 역사인식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해 나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필자의 그런 기대는 환상(illusion)이었음은 후일 역사학계의 더 심화되는 좌경화 풍토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강 교수의 역사인식론에 대한 비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그의 역사관은 우상(偶像)이 되어 더 견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아무리 뛰어난 이론이나 학설이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환경과 정세의 변화로 인해 용도 폐기되는 것이 인간사회의 법칙이자 순리인데 어떻게 강만길의 역사학이 50년 반세기가 넘게 풍미하여 역사학계의 우상이 되었고, 문화권력으로 자리잡은 기가 막힌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강만길의 역사 인식은 오늘날 민중사관의 토대
강 교수의 역사인식론의 골자는 민족, 민중, 통일이 핵심 키워드이다. ①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②‘우리민족끼리’ 남과 북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③평화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역사학을 시민사회의 통일운동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의 역사인식론은 87체제 이후 ‘민주화 광풍’속에서 대세가 되었고, 2011년 다양성을 존중하는 검인정 체제 이후에는 ‘분단체제의 역사인식’을 비롯한 그의 저서들은 좌익운동권의 경전(經典)이 되었고, 전교조 교사들에 의해 중고교 역사교과서에 깊이 분칠되었다. 이런 역사교육의 좌편향을 견제하려고 몸부림쳤던 박근혜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인 국정교과서 채택은 ‘찻잔의 태풍’에 불과했다. 탄핵 이후 복귀한 검인정 교과서는 말이 검인정이지 다양성을 상실한 일사불란한 민중사관식 좌편향 서술이 대세로 깊이 말뚝을 박았다. 심지어 문재인 정권 하의 중고교 역사교과서에서는 촛불집회에서 탄핵을 정당화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가 촛불집회에 참가한 사진기사까지 게재되었고, 심지어 문 정권의 각종 친북정책을 찬양함으로써 문 정권 홍보지 역할을 자임하는 정도로까지 진척되었다.
필자가 다시 강만길 교수와의 얽혀졌던 기억을 재생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제주4·3사건추념사에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꾸었던…” 운운하면서 폭동주동자들의 봉기명분을 민중항쟁으로 거론한 발언 때문이었다. 4·3 주동자들을 희생자로 개명(改名) 시킨 역사인식은 바로 강만길 교수의 민중사관이 토대가 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나? 강 교수가 제1기 제주4·3사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제주 4·3사건을 미군정과 군경 탄압에 저항한 민중항쟁론으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민중항쟁론이 4·3사건조사연구팀의 역사 인식의 기본토대가 되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그동안 잊어버렸던 강 교수에 대한 비판적 글의 추억을 되살리게 된 두 번째 계기는 먼지가 수북한 책장에서 조우석의 ‘좌파문화권력 3인방’(백낙청, 이영희, 조정래)(2019)을 읽어보면서였다. 그 3인방에는 소설가 조정래가 아니라 강만길 교수를 넣었어야 타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는 강 교수에 비해 학계에 그리 큰 영향력을 행세한 인물은 아니었다. 강만길이야말로 백낙청, 이영희와 더불어 70년대 반체제지식인으로 ‘분단체제의 역사인식’이란 역사 칼럼집을 통해 동토의 땅으로 인식된 북한을 후진 학자들로 하여금 ‘우리민족끼리’라는 잣대로 보도록 유인하여 그가 직접 양성하거나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후진 제자들에 의해서 한국역사학계는 완전히 좌경화되었다. 한편 강 교수는 거의 반세기 동안 ‘친일청산’을 외치고 ‘우리민족끼리’를 국민 정서에 호소했다. 그 덕분에 노무현 정권 시절에 각종 위원회(국가기록물관리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의 위원장 감투를 쓰는 영광을 누렸다.
글을 쓰려는 세 번째 결정적 계기는 단골 헌책방에서 강만길 교수의 회고록, ‘역사가의 시간’(2010)을 입수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 책은 강 교수의 삶이 자칭 ‘마산 촌놈’ 식으로 솔직하게 녹아 있었다. 이 글은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끝자락을 경험한 ‘반일’ 선배에 대한 6·25전쟁 끝판에 태어난 ‘반공’ 후배의 비평(批評)이다. 강만길 교수가 쓴 자신의 회고록,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에 언급된 내용을 근거로 기술함을 밝혀둔다.
1933년생 마산 출신인 강만길은 일본의 대동아전쟁 말기의 탄압과 참혹한 민족말살정책에 몸서리를 쳤다. 그가 일제에 가장 증오한 두 가지 탄압정책이 바로 창씨개명과 한글사용을 금지한 것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젊은 역사학도 강만길이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유는 총독부 시절에 만연했던 식민사관을 극복하여, 민족사관을 재정립해보겠다는 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은 한마디로 일본의 조선 진출은 근대학문과 과학기술의 도입으로 봉건조선을 근대화로 만들었다는 것으로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일본인 학자들은 조선 조정의 해묵은 당파싸움을 부각시켰고, 조선인의 단점과 결함을 학문적으로 부각시켰다. 강만길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의 침략 이전에 조선의 자본주의 발달과정을 추적했으며, 특히 조선시대 후기의 상업자본의 발달과 자본주의 맹아(萌芽)를 발견하기 위해 몸무림쳤다.
강 교수의 한국민족주의에 대한 집착은 광적 수준이다. 그는 지도자와 정권이 (북쪽의 우리) 민족에 대해 대화, 협상하려고 노력했는지의 여부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 등의 평양 남북연석회의의 협상과정을 높이 평가한다. 설령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행이 정치적 실패로 결과했더라도. 남북한 협상을 통해 단일정부를 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에게는 민족주의를 근간으로 삼은 좌우합작 내지 통일전선이 ‘절대선’으로 등장한다. 강 교수는 항일운동에서 중국의 서안사건(1936) 이후 국공합작이 이뤄지고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중일전쟁에서 대일통일전선을 수행한 모델을 종전 후 한반도 정부수립에도 적용하였다.
강 교수는 “오스트리아의 경우, 신탁기간이 10년으로 한국의 신탁 5년에 비해 두 배였는데도 좌우합작정부를 구성하여 분단을 막았다”는 것을 예로 들어 좌우합작정부를 구성하지 못한 점을 항상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한국과 오스트리아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는 점을 강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전후 유럽에서 미소영불 승전국들은 독일의 분할에 관심이 지대해서 오스트리아 문제는 부차적 관심사로 밀려났고, 오스트리아 내부의 갈등은 한반도처럼 격렬하지는 않았다. 해방정국의 남한은 오스트리아보다 좌우익의 대결 상황이 훨씬 복잡하고 격렬했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대구폭동(1946.10.1)과 제주4·3사건(1948.4.3.~1957.9)은 오스트리아에서는 찾기 힘든 좌익(공산)폭동이었다. 여기에 미소가 한반도의 남과 북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원심력, 미소의 힘겨루기가 오스트리아에 비해 훨씬 강했다.
강 교수는 해방정국에서 항일투쟁의 법통을 인정받는 김구의 임정 일행이 권력을 잡지 못하고 미군정에서 이승만으로 권력이 이양된 점이 못내 불만이었다. 김구의 임정 일행이 왜 권력을 잡지 못했는가에 대한 책임론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독당으로 향하기보다는 미군정과 이승만으로 향한다. 어쨌든 강 교수의 불만은 중국의 중경임정의 건국강령에 나타난 3대 혁명(토지혁명, 기업혁명, 인간혁명)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명분론’에 사로잡힌 강 교수의 급진적 사회주의자 내지 사회혁명주의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섬찟 놀라게 된다.
“토지혁명은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 무상으로 돌려주는 것이고, 기업혁명은 철도, 은행, 대기업과 일본인 및 친일세력의 기업을 몰수해서 국가소유로 하는 혁명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인간혁명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세력을 철저히 숙청하는 일이다.”(‘역사가의 시간’, p.152~53).
이 세 가지 과업은 어쩌면 남한보다는 소련군정 하에 있던 북한에서만 가능한 혁명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익숙한 미군정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정부 형태를 갖추면서 토지개혁과 대기업의 국유화를 남한에 비해 일찍이 단행했다.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만 확실하게 이뤄졌다면, 강 교수가 언급한 3대 혁명 조건을 북한이 모두 충족하게 된다. 북한에 비해,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토지혁명, 기업혁명이 지연되었으며, 북한에 비해 철저하지 못했으며 친일청산은 반민특위 해체로 못했다고 본 것이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정부 구성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
강 교수는 미군정이 추진한 여운형, 김규식 협조체제로 한 좌우익합작정부도 여운형의 암살로 불발탄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온건좌익세력의 핵심 인물이던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 온건세력 중심의 남북통일임시정부 수립의 길도 막히고 말았다.”(‘역사가의 시간’, p.88).
그런데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 5차례나 북한을 갔다왔고 자녀(1남2녀)들을 김일성에게 바쳤던 공산주의자였다. 강 교수의 회고록, ‘역사가의 시간’에는 치열했던 반탁과 찬탁운동을 기술하면서도 송진우와 장덕수 암살사건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 이 두 암살사건들은 우익에게 큰 손상을 준 사건으로 미군정과 이승만이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의심했지만, 강 교수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김구, 김규식의 평양연석회의 참석은 남한만이라도 5·10 총선거를 통해 건국-정부 수립을 하라는 유엔의 권고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 당시 민심은 명백하게도 김구 일행의 평양행을 결사코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평양행을 반대하는 경교장에 운집한 시민들로 인해 김구의 평양행이 오후로 늦어진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강 교수의 김구, 김규식의 평양행에 대한 지지는 반건국사 역사 인식이다. 그 이유는 ①이승만이 주도한 건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반영하고, 또 ②김구, 김규식의 평양행으로 촉발된 남한 내부의 갈등과 분열상에 대해서는 방관하면서, ③김일성이 주도한 (궁극적 의도가 어떠하든) 평양의 남북연석회의를 통일정부를 위한 노력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산 출신답게 강 교수는 평생 동안 反이승만노선을 견지했다. 이승만이 김구처럼 통일정부를 향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대한민국이 건국하기 2년 전부터 소련군정의 지원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6.2)가 설치되어 정부 형태를 갖추면서 북한의 급진적 토지개혁과 중요 기간산업의 국유화정책을 추진하여 스탈린이 요구한 북한의 ‘민주기지화’한 점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함구한다. 강 교수는 건국절 제정도 국가주의의 견해로 반대하면서,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으로 해석하였다(시사IN: 20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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