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기 개신교는 소위 ‘적대세력’의 중요한 공격 대상 중의 하나였다. 대표적인 피해지역의 하나인 전남 구림 지역의 구림편찬위원회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공산 유격대의 공격 대상을 “우익 쪽에 가까운 군경가족이나 인공치하에서 반동으로 모함을 받았던 사람과 기독교 신자”라고 규정한다. 즉 군경가족, 반동 유지와 더불어 기독교 신자들이 적대세력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정근식 교수도 한국전쟁 당시 “좌익 테러의 대상은 여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나 기독교 교회가 포함되었다”라고 주장한다.
한국전쟁에서 기독교의 피해 문제는 박찬승 교수에 의해서도 지적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마을의 갈등 구조를 신분.계급 간의 갈등, 친족.마을 간의 갈등, 종교.이념 간의 갈등의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하지만 그는 처음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연구는 많았으나 세 번째 문제에 대한 깊은 연구는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더 구체적인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와 더불어 공산주의를 한국 기독교에 대한 박해 세력으로 생각하고 신사참배 거부와 반공 이념으로 인한 순교를 대대적으로 강조해 왔다. 천주교는 긴 역사를 통해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으며 여기에 한국전쟁 기간에 발생한 순교자도 포함된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한국전쟁에서 납북되거나 학살당한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부르며 그들의 신앙을 기념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기간에 대한 민간인 피해를 조사했지만 기독교인들의 희생 문제는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간한 ‘종합보고서 III,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의하면 적대세력에 의해서 희생당한 조사에서 주로 경찰, 공무원, 교사, 각종 우익단체라는 범주로 설명하고 있지만, 기독교나 교회 피해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충남 논산 병촌, 전남 영광 야월, 전남 임자도와 같은 대표적인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도 적시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는 한반도에 공산주의가 등장하는 1920년대부터 반공의 입장을 분명하게 유지하였다. 이것은 기독교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기독교인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기독교 입장은 공산주의와 마찰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한국 기독교는 정치에 대해서 두 그룹의 입장이 있었다. 하나는 정치 참여파이며, 다른 하나는 정교분리파다. 전자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많이 기여했지만 후자는 교회 재건과 신앙을 우선했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 그룹은 다 같이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익의 공격을 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왜 지금까지 정부가 주도하는 피해자 조사에서 기독교가 제외되었는가를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인 피해를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종교적인 측면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의 경우 독립촉성국민회나 대동청년단과 같은 우익단체에 참여하였고 그 결과 이들은 좌익에 의해서 살해당했다. 따라서 피해 원인을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조사자들은 이런 기독교인의 피해를 정치적인 범주 안에 분류해 버린다. 그러나 이들이 왜 이런 우익단체에 참여했는가를 볼 때 결국 이들의 신앙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공산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그들은 정치활동에 참여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 살펴봐야 할 것이다.
둘째, 정치와 관계가 없는 기독교인들의 피해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로 피해 받을 때 정치와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의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근본적으로 반공주의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반공주의는 좌익의 활동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이었지만, 내재된 반공의식으로 인해 그들 역시 피해를 받았다. 이런 기독교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의 피해는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들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이 본 역사적 연구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전쟁 중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과 학살은 처참하였다. 북한이 3개월간 남한을 점령했다가 본격적으로 퇴각하던 1950년 9월 말을 전후로 가장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집단학살이 이뤄졌다. 기독교인들이 좌익세력에 의해서 탄압을 받은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한국전쟁 시기 개신교 피해 분석과 성격
첫째,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공산화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가운데서 일부 신자들이 우익에 가담하여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정치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분명한 반공사상을 가졌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유물론이다. 이런 생각은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입장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좌익에게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충남 병촌, 완주 동상, 신안 임자 등의 신자들을 보면 이들은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집단학살을 당했다. 특별히 병촌교회와 진리교회는 성결교회에 속하는데, 이들은 기독교의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말세에 나타나는 붉은 용의 세력이라고 믿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병촌교회의 김주옥 집사에게 “신자라 사상이 완고하니 너는 사상 문제”로 죽어야 한다며 사형을 판결했다. 전북 완주의 마재교회(현 신월교회) 박용순의 아들 박상락은 당시 14세 나이였다. 그는 그때 적대세력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집사까지는 모두 죽였다”라고 하며 아픈 마음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각종 우익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들에게 반공은 곧 애국하는 것이고 국가를 위한 것으로 확신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인민군이나 좌익들과 대척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중앙 독촉국민회만 아니라 지역 독촉국민회에 대거 참여하며 중요한 임원을 맡았다. 또한 청년단원으로 활동하거나 반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런 행동이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애국 활동으로 확신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기독교인들에 호의적일 수 없었다. 북한군이 내려와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기독교인들을 회유와 협박했으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그 모든 것을 거부했다. 전북 익산 황등교회의 변영수 장로는 익산의 대동청년단장이었으며 전북 완주 봉상교회의 오기영 장로는 이 지역의 독촉국민회 인사였다. 전북 완주의 마재교회 주일학교 교사이면서 소방대장이었던 박용순 집사, 소방부대장이며 대동청년단 대장인 박복수, 동상면장인 김태환 집사도 다른 신자들과 함께 9월 27일 신월 괴비소에서 살해당했다. 9월 10일 김제 내무서에서는 만경교회 교인들의 동태를 조사하다가, 12일 최정렬 집사(신학생), 곽옥진, 류금식, 송은숙 청년은 “면내에 조직된 반공혁명단”에 가입하였다는 명목으로 9월 27일 전후에 전주 형무소에서 살해됐다.
셋째, 좌익들은 월남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이었고 그들을 박해했다. 북한 정권의 기독교 활동의 방해와 핍박을 피해 많은 기독교인은 월남을 택했다. 특히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으며 보수적인 신앙을 지켰던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권의 방해에 조선민주당을 결성하고 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 소군정 하에서 각종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정권을 대적하기 어려웠다. 천주교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반공산주의 입장이었던 교황 비오 13세의 영향에 따라 반공주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세워 모든 기독교를 통합하려는 시도에 보수적인 목회자들과 천주교는 가입을 거부하고 수난을 받거나 월남을 택했다. 그들의 경험은 남한교회가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남한의 좌익 세력은 월남 기독교인들을 무척 싫어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월남 기독교인들을 적발하고 그들을 공격했다. 전북 완주 삼례의 임광호와 김주현은 월남자로서 피해를 당했으며 문준경의 경우도 그가 월남한 양도천을 보호해 줬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넷째, 예배당 사용 문제를 놓고 기독교와 인민위원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인민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하여 남한을 공산주의화하려고 했을 때 이들은 기독교 예배당을 자기들의 사무실이나 강연 장소로 사용하려고 했다. 전남 신안 증도교회는 일제 말에는 일제에 교회를 빼앗겼으나 해방 후 되찾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기간에 다시 교회는 인민위원회로 사택은 그들의 주거지로 변했다. 전북 완주의 마재교회(현 신월교회)의 김성녀 집사는 예배당을 공산군이 본부로 사용하고자 할 때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 이유로 전주교도소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9월 27일 퇴각하던 적대 세력들에 의해 신자들과 함께 신월 괴비소로 끌려가 집단살해됐다. 김제 만경교회의 경우에도 좌익들은 예배당 건물을 시시탐탐 노렸다.
교회를 좌익의 사무실로 사용할 경우 거기에는 예외없이 스탈린이나 김일성의 시진을 걸아 놓았다. 이런 일들은 전국의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섯째, 기독교는 미국 선교사와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친미세력으로 간주되었다. 한국전쟁은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이 참전하였고, 이 전쟁은 공산주의자들과 미국의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미국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미제의 앞잡이라고 주장했다. 대구에서 피란을 가던 이영식 목사가 좌익에게 체포된 이유가 목사는 미제의 스파이로 간주했다. 전북 완주 동상 마재교회의 김성녀 집사도 선교사와 알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하였다. 이들은 신자가 많은 지역을 ‘미국촌’이라고 부르며 집중적으로 감시하였다.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현 백산중앙교회) 오병길 전도사는 인민재판에서 10월 19일 미국과 내통하는 스파이로 판결받고 창으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다. 특별히 이것은 북한이 미국의 폭격으로 완전히 붕괴된 다음 더 강화되었다.
한국 기독교 피해성격, 반공정신과 이웃사랑의 이중주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는 강력한 반공주의적인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사랑으로 포용하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독교인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반대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복음도 실천해야 한다. 우선 한국 기독교는 단지 소극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와 싸웠다.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독촉국민회나 대동청년단과 같은 기존의 정치단체 외에도 스스로 반공 정치단체를 만들어 직접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그중에 몇 가지 경우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 철원은 38선 이북에 속하였다.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철원의 기독교인들은 남한의 민족주의자들과 연계하여 신한청년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서울의 독립촉성국민회 이시영은 그와 잘 알고 있던 33인 중의 한 사람인 김병조의 아들 김윤옥 목사를 철원에 파견하였다. 그는 철원제일교회의 부목사로 일하면서 장흥교회 박성배 장로를 포함하여 많은 청년과 함께 1946년 3월에 46명의 회원으로 신한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 단체의 비밀이 노출되어 그들은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 옥사한 사람이 7명, 도피하다가 사살된 사람이 2명, 피랍된 이가 2명이었다.이후 이들과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가운데 대한수도원을 창설하여 기독교 구국운동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사건 이후 좌익세력들이 경주로 밀려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월 5일 밤 12시를 기해서 밀려오는 좌익과 기존의 좌익이 합세하여 내동면의 우익세력을 제거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을 알게 된 경주 구정교회의 청년들은 이곳의 YMCA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47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여기에 맞섰고, 결과적으로 이곳에서는 좌익 폭동은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이곳 경주 내동면에는 구정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되었고 이 결사대는 독촉의 한 활동으로 이뤄졌다. 구정교회는 이 지역의 우익의 중심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가운데 전북 김제 만경교회와 죽산면 대창교회 등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좌익과 싸운 모습을 보았다. 전남 영광군 염산면에서도 유엔군이 진격해 오자 적극적으로 환영하다가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수동적인 반공보다는 상당한 부분 적극적으로 반공 활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쟁 가운데 한편으로는 대한민국과 자유를 위해서 싸워야 했지만 동시에 억울한 죽음을 피하고 인간의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다. 여기에 그 몇 가지 경우만 예를 들겠다.
제주 4·3사건 당시 조남수 목사의 경우 토벌대장 문형순과 협상하여 300명의 인명을 살렸고 150차례의 선무활동을 통하여 그 외에도 많은 인명을 구했다. 이 같은 중재 화해의 노력은 여순사건에서도 드러난다. 널리 알려졌듯이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해자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손양원 목사는 인민군에게 살해되었다.
한국전쟁 가운데 기독교공동체는 가능하면 복수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일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충남 병촌의 경우 가해자를 용서하고 복수하지 않았다. 전북 정읍 두암교회의 경우도 가해자를 찾아가 용서하고 그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어 같이 신앙생활하였다.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전남 임자면 진리교회이다. 이곳에서 피살당한 이판일의 아들 이인재는 해군이 이곳에 진격하여 보복할 기회를 줬는데, 이것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 동네의 이장이 되어 분열된 마을을 하나로 회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위에서 철원지방의 신한청년회 사건을 언급하였다. 원래 신한청년회 회원들은 나중에 대한청년단이 되었는데 9·28 수복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게 되자 이들에게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좌익을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해당 지역에 공산당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유족들이 100여 명에 달하였다. 대한청년단원들은 이들을 장흥교회 앞 공회당에 모집하고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장흥교회의 서기훈 목사는 청년들에게 자신은 ‘십자가의 사랑’을 가르쳤다고 말하면서 신자가 이렇게 행동하면 자신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은 한국전쟁 기간에 한국 기독교의 행동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다른 사상을 갖고 있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반동세력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물리력으로 훼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의 반공 입장은 분명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가능한 대로 그들을 사랑으로 포용해야 하며,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적대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조남수, 손양원, 이인재, 서기훈과 같은 분들은 분명한 반공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좌익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했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자세는 이념으로 분열된 한국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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