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정신을 세계에 알린 유대인 기자 베네딕트 이야기
3·1운동정신을 세계에 알린 유대인 기자 베네딕트 이야기
  •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2.06.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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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이혜경 교수 다큐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

지난 4월 14일부터 5월 1일까지 서울 광림아트센터에서 다큐멘터리 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관객의 큰 호응을 이끌어내며 연일 객석을 가득 채웠던 이 공연은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를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3일간의 총회 내용과 그 의의를 음악극으로 재연한 것. 이 한인대회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정신의 토대가 되었다.

공연 제작을 맡은 이혜경 국민대 명예교수(공연예술학부 연극전공, 현 아트플랫폼 대표)의 이야기다.

“예스24 4월 연극 예매율 1위를 했고, 총 관람객은 약1만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공연을 본 분들이 친구와 지인, 가족을 데리고 와서 다시 보고, 또 보고하는데 큰 보람을 느꼈어요. 본인들이 홍보대사를 자처해 열심히 알리더군요. 어떤 가족은 세 번 정도 봤다고 해요. 그분 말씀이 ‘이 공연은 온 국민이 봐야 한다’, ‘미국 순회공연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참 재미있었습니다.”

한인대회는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미국 독립선언과 헌법의 발상지인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유학생, 교민, 미국인 목회자, 선교사, 교수 등 150여 명이 모여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이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에 있다고 못 박았던 대회다.

대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태극기와 대한독립연맹(Korean independence league) 깃발을 들고 필라델피아 거리를 행진했다.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서재필 박사를 의장에 선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요청서를 작성했다.

대회를 계기로 한국친우회가 결성됐고 이는 훗날 한미우호협회로 발전한다. 이 대회에서 천명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기본이념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의 기초가 된다.

이 교수가 건넨 공연 팸플릿 첫 장에는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가 작성한 당시 한인대회에 대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가장 간절히 갈망했던 사람들은 미국에서 거주하는 동포들이었다. 이들은 1900년대 초부터 미국에 이민 와서 자기들의 조국도 언젠가는 미국처럼 민주국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이런 꿈을 구체적으로 키워 왔다. 이들은 1918년 11월 11일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이기자 우리 한반도도 미국과 더불어 자유민주질서에 속하기를 원했다.

이렇게 시작된 미주 한인들의 꿈은 전 세계 한인들에게 퍼져나갔고,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포한다는 위대한 민주주의 선언을 하였고, 이런 정신에 기초하여 같은 해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맹에 가입할 것을 천명하였다…

필라델피아 한인의회는 단순한 일본에서의 독립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는 나라가 무엇인지 가장 분명하고, 자세하게 논의한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인 집회이다.

이승만과 안창호는 이런 필라델피아의 정신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했고, 그 정신이 이어져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1919년 4월 열린 필라델피아 한인의회는 대한민국의 요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 삶에 혁명이” 베네딕트 기자를 이끈 이승만의 눈물

이 교수에 따르면, 필라델피아 한인대회가 열리게 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이승만 박사에게 대회 개최를 권유하고 이 대회 회의록과 결의안,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연합통신사(Associated Press)와 UP(United Press)에 제공한 유대인 조지 베네딕트 기자다.

1945년 발행한 그의 자서전은 총 21개장으로 구성된 가운데 이중 11장(The Korean Tragedy)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이 교수가 발굴한 이 자료는 월간조선이 최근 단독 입수로 자세한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자료에 따르면, 1887년 베네딕트는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랐다. 그는 랍비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신약성경을 읽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

키시네프 학살(Kishnev Pogram : 1903년 러시아의 키시네프에서 극단적인 러시아 세력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건) 이후 세계 열강의 비인도적 행위에 분노하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며 취재를 했다.

1910년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기독교 관련 인사들과 많은 친분을 쌓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승만 박사를 만나 마음이 통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승만 박사로부터 일본의 만행을 듣고 사진을 접한 후 ‘내 삶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표현했다. 베네딕트 기자는 고국의 현실에 눈물을 흘리던 이승만 박사를 향해 “대규모 대회를 열어 미국인들에게 알리자”고 설득했다고 한다.

베네딕트 기자가 남긴 기록 <그리스도가 발견한 랍비(Christ Finds a Rabbi)>라는 책에서는 필라델피아 대회의 개막 비사를 소개하고 있다. 팸플릿에 실린 이 책의 11장 ‘한국의 비극(Korean Tragedy) 일부 발췌·축약본을 소개한다.

1919년 3월 마지막 주였다. 문구류가 필요하던 차에 16번가 가까운 체스넛 거리에 문방구가 보여서 들어갔다. 가게 안 계산대 옆에 두 남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둘 다 흥분된 상태에서 키가 작은 남자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국인은 아니었다.

나는 그전에 한국인들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계산대에는 사진, 편지, 전보들이 있었는데 둘 중 키가 큰 남자가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것들을 살펴보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필기구들을 달라고 하기 전에 우선 무슨 문제인지부터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내 삶에 혁명을 일으킨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한국 기독교인들,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일본 군인들에 의해 갇힌 채 불에 타버린 교회들과 학생들이 채찍에 맞아서 몸의 살점이 뜯겨진 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죽어가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런 사건을 미국인들에게 알리지 않습니까? 그들이 알기만 하면 단 한 순간도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않을 텐데요.”

“우리는 돈이 없어요. 일본 홍보담당 기관들은 돈을 많이 씁니다.” “위대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돈이 필요하지 않아요. 신문들은 언제나 큰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여러분 동포를 위해서 큰 일을 벌여보세요.” “큰 일이라니요?”

“우리가 지금 있는 이 도시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곳입니다. 몇 개월 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사리크가 독립기념관에서 자유를 선언하기도 했지요. 미국 전 지역에 있는 한국인들을 불러서 대회를 여세요.

제가 그 대회를 준비하면서 언론에 보도될 만한 유명 인사들 섭외를 도와드릴게요. 독립기념관까지 행진하세요. 이 박사님은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으세요. 행사 사진들과 회의록을 전국에 뿌립시다.

내가 그 자료들을 신문사들에 보낼게요.”…일들이 진행되었다. 1919년 4월 14, 15, 16일에 17가와 들랜시 거리에 있는 리틀씨어터에서 열린 제1차 한인대회에 한국인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남자들과 여자들, 농부들과 학생들, 전문인들과 사업가들, 그들은 모두 신실한 기독교인들로서 조국을 빼앗은 불의를 규탄했다…

준비 과정부터 나는 필라델피아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 담임 목회자인 플로이드 W. 톰킨스 박사의 열렬한 관심을 끌어 내어서 그가 한인대회에서 설교하도록 했다. 그는 후에 메인주부터 캘리포니아주까지 약 50여개 도시에 결성된 한국친우회 전국 회장이 되었다…

4월 14일 대회 첫날, 나는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연합통신사와 UP 편집국에 전송했다.

4월 11일에는 일본의 방해 노력에도 불구하고 파리 평화회의에 이 안건을 보냈다… 어느 날 이 박사와 저녁 식사를 했다.

그가 말하기를 언젠가 한국이 독립하면 국민들이 처음 할 일 중 하나는 수도 서울 저잣거리에 내 동상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명예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위해서 한 일보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한 일이 훨씬 더 많다고 말해주었다….

성황리에 마친 다큐 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 포스터.
성황리에 마친 다큐 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 포스터.

‘건국’의 서사로 국가정체성 회복해야

‘1919 필라델피아’ 음악극은 3일 동안 마련된 6개의 결의문을 극중 주인공을 통해 감동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을 미주 교포들은 민주주의 원칙을 신봉하는 기독교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지지한다고 선언이다. 둘째, 미국인에게 보내는 것으로, 1882년 맺은 조미조약의 거중조정항목을 인용하며 미국이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나설 것을 요청하며, 미국과 한국은 자유, 민주주의, 기독교라는 공동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셋째, 한국인의 국가에 대한 목표와 열망에 대한 것으로, 새로운 나라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본받아 ‘피통치자의 동의’에 기초해야 하며 정부는 입법부와 행정부로 구성되어 권력을 상호견제하고,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여 조약을 맺으며, 신앙의 자유를 비롯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넷째, 일본의 지성인에게 보내는 것으로, 일본이 유럽식 군국주의를 포기하고, 한국에서 철수하면 한국은 동북아 지역의 ‘우호적인 완충국’이 되어 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오게 된다고 주장했다.

다섯째,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것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000만 우리 민족의 의지를 대변하는 정부로 인정해 줄 것과 우리의 꿈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작품을 제작하고 공연을 마치는 데 사재 1억 원을 털었다고 한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나 티켓 판매로 총제작비의 3분의 2는 충당하고 나머지 자신이 부담한 금액이라고 한다.

“공적자금을 신청한다고 받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마냥 기다릴 시간도 없어서 일단 저질렀습니다. 또 저도 은퇴했고 앞으로 이런 일을 할 날도 길지 않은데, 죽은 다음에 1억 원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연금 생활자로서 이 돈이 제게도 가벼운 돈은 아니지만 돈을 써야 할 때 쓸 수 있는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했죠.”

이 교수에 따르면, ‘1919 필라델피아’는 끝났지만 이 공연을 놓친 관객들이 관람할 기회를 다시 갖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한 한국 후원회가 곧 결성되기 때문이다.

“일단 제가 기획하고 자료 조사하고 대본을 쓰는 등 창작과 제작을 같이 했는데 앞으로도 저 혼자 다 할 수는 없고, 그것을 제가 독점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후원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도 기회를 드려야 하잖아요.

또 여기저기서 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많고요. 아무튼 어쩌다 일이 커지게 됐는데, 어떤 섭리가 저를 이끄는 것 같습니다.”

이 교수에게 ‘1919 필라델피아’ 음악극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물었다.

“우리나라가 어떤 정신에 근거해 존재하는가, 우리나라의 기초가 어떤 이념과 사상과 담론의 원칙 위에 서 있는가에 대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거예요. 그동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흔들려 했고 또 일반 국민은 잘 모르는 채로 휩쓸려왔습니다.

그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결국 지금은 역사 해석을 놓고 벌어지는 전쟁 중이니까요. 우리가 중요한 사료를 발견하고 역사를 제대로 해석해, 흔들릴 수 없는 가치, 양보할 수 없는 천부인권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가치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상기시켜줘야죠. 건국이란 우리의 서사예요. 국가서사의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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