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일 KBS를 비롯해 언론들은 일제히 ‘용인에서 풍납토성 와당 출토’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한성도읍기 백제(BC 18~AD 475) 왕성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똑같은 백제 와당(瓦當)이 용인 신갈에서 출토됐던 것이다.
와당이란 기와 건물 처마 끝을 장식하는 원형 또는 반원형 기와를 말한다. 주로 왕궁이나 사찰 같은 고급 건물에만 사용된다는 특징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주거지 2기와 수혈유구(구덩이) 3기, 석실묘 (石室墓) 1기 등의 총 9기에 이르는 삼국시대 유적이 등장했다. 시기는 3-4세기 무렵이었다. 주거지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어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매장 무덤에서 왕궁에 쓰이는 와당이 발굴되었다는 사실은 피장자의 신분이 왕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백제 왕가의 공동묘지임이 분명한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동전 무늬를 새긴 이른바 전문(錢文) 와당 1점이 발굴되기도 했다.
이 문제는 수수께끼였다. 현재까지 풍납토성을 벗어난 곳에서 한성백제의 궁궐 와당이 출토된 것은 용인 신갈 유적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시조 온조가 건국한 왕도, 하남 위례성과 용인 신갈의 와당 유적 간에는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왕도 위례성이 맞다면 위례성의 왕실 유적이 왜 유일하게도 용인의 매장 유적지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학계와 고고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문제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백제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르는 중대한 한국 고대사의 어떤 비밀을 용인의 한성백제 와당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남 위례성이 용인에?
1993년 한국의 고고사학계의 거두 윤내현 교수가 이끌었던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김윤우 수석연구원은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考’였다.
김윤우 연구원은 자신의 논문에서 온조가 부여에서 남하해 잠시 한강 이북에 정착했다가 한강을 건너 내려와 백제의 첫 왕도로 도읍했다는 하남 위례성의 위치들을 고문서에서 찾고 있었다.
윤 연구원은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비정한 고문서들 가운데 조선대말 이연기(李延寄 1814-1879)가 소개한 ‘해동기략(海東記略)’에서 특이한 기록을 찾아냈다.
해동기략은 다산 정약용의 외손이자 제자인 윤정기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다. 역사지리서 해동기략의 용인편에는 ‘온조는 처음에 하남에 천도하고자 보개산(寶蓋山)에서 역사 (役事)를 시작한 후 한산(漢山)으로 이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보이는 보개산(寶蓋山)은 다름 아닌 일명 성산(城山) 혹은 석성산(石城山)이라 불리는 용인 구성동 지역의 471m의 산을 말한다. 이 성의 다른 이름은 고성(姑城) 또는 할미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용인에서 한성백제 왕실과 관련된 특별한 유적이 출토되기 이전이어서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2015년 6월 용인 기흥에서 한성백제의 왕궁에서 사용하던 와당이 매장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렇다면 온조가 백제라는 이름으로 건국하게 되는 한성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은 다름 아닌 용인의 석성산 일대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과연 가능한 가설일까. 이를 위해 현재 한성백제의 위례성이라는 풍납토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은 1~3세기 사이에 지어진 토성이다.
풍납토성의 주인은 근초고왕
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던 위례성이라는 의견과 단순한 방어성이라는 의견이 서로 엇갈리다가 현재는 한성백제의 첫 왕도인 위례성이 맞다는 의견으로 정리되었다. 근거는 발굴 결과 단순 방어성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위치는 몽촌토성의 북쪽에 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크기와 발굴된 많은 유물들의 증거가 오히려 풍납토성이 온조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이 될 수 없는 근거로 주장될 수 있다. 위례성에 도읍할 때 온조 세력은 이미 경기 남부에 토착 세력을 형성했던 범 마한세력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한 이주 세력이 이미 우수한 철기 문화를 생산하고 있던 토착 지역에서 현재의 풍납토성처럼 거대하고 장엄한 왕궁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대에는 이주해 온 세력은 토착 세력과 토지와 수계(水系) 이용을 놓고 적대적 관계에 놓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온조가 남하해서 지었다는 하남 위례성의 크기는 조촐했을 것이며 또한 토착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평지가 아닌 산성 (山城) 형태로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는 미국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올슨이 주장한 국가의 탄생 모델과 부합한다.
즉 모든 고대 국가의 탄생은 이주형 강도(bandit nomad)떼가 정착민을 약탈하다가 정착형 강도(sedentary bandit)로 변화하면서 정착민을 보호하며 공물을 받는 상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주몽처럼 백제의 온조도 초기에는 약탈적 성격의 이동 집단을 이뤄 주변 정착 마을들을 습격하고 정착민들의 반격을 회피하기 위해 접근이 어려운 산정상이나 기슭에 소박하게 꾸며진 왕실과 집단 주거 형태의 움막들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올슨에 의하면 대개 고대의 이러한 이동형 약탈세력은 농사를 짓는 정주민들을 다른 외적들로부터 방어해 주면서 보호세를 받게 되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정착민과 이주민이 결합하여 율령을 가진 국가의 지배세력으로 탄생하게 된다.
백제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면 한성백제의 고대국가적 위상과 모습은 온조가 아니라 근초고왕일 것이라는 데 대부분 역사학자들은 동의하게 된다. 따라서 완성된 왕궁의 규모로 발굴되는 풍납토성은 온조의 위례성이라기보다는 근초고왕의 왕궁성이라고 보는 점에 대개 역사학자들은 동의한다.
다만 이 풍납토성이 온조의 위례성을 계속 썼을지,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조의 위례성은 도읍 초기에 지금의 풍납토성의 규모로는 축성될 수 없다는 것과 적어도 주변의 마한 토착 세력들을 복속시키기 전에는 사방에서 공략이 가능한 평지에 도성을 세울 수 없다는 점이다.
온조의 위례성의 당시 모습은 방어형 山城이었을 것이다. 그 규모도 화려하거나 장대하지 않고 왕실 정도만을 와당으로 장식하고 나머지 건물들은 산채와 같은 형태였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온조의 위례성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폄훼되는 것은 아니다. 용인의 왕궁 와당의 출토와 할미성에 대한 기록, 그리고 용인 구성동과 보정동 일대의 한성백제 유적의 의미는 다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할미산성, 신라 아닌 용인 한성백제인이 쌓았다 용인의 할미산성은 조선 후기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폐성(廢城)된 고모성(姑母城)’이라 기록되었다. 이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고려시대 한 노파가 하룻밤에 쌓았다”라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어 오랫동안 고려시대의 성곽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1999년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지표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에서 남북국 시대에 이르는 유물을 대량 발굴하자 학계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고, 경기도박물관의 시굴 조사를 통해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축조된 성이라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최근 충북문화재연구원 김호준 등의 연구에 의하면 할미산성 신라축조설은 한성백제기에는 석성이 없었다는 단편적 이해와 유물로만 추정한 것이며 한성백제기에도 山城은 석성 형태로 구축되었다는 근거를 제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성기 백제 석책산성에 대한 재논의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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