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직면한 ‘권력’에 대한 인식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보현산으로 피신하신 아버지를 잡으러 오는 일본 순사 죽하(竹夏)에서부터 형성됐다고 하겠다. 그는 매일 헌팅캡을 쓰고 무릎 위는 한복바지 같으나 그 아래는 스타킹을 신은 것 같은 찰싹 붙은 바지에 긴 칼을 차고 위세 있게 걸었다. 우리 집 아래채 문지방에 걸쳐 누워 자면 그의 긴 칼은 항상 문지방에 걸려 있는 모양새여서 내게는 공포였다.
한 번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주재소에 잡혀 가셨다. 피신한 아버지를 찾아내라는 순사에게 아기가 딸린 어머니는 덜 맞았지만 할머니는 몹시 맞고 얼굴이 부어 귀가하셨다. 이런 상황이 내게는 권력이란 너무 큰 두려운 대상으로 의식 속에 자리 매김을 했다.
좀 더 커서는 6‧25를 겪었다. 그 때 낙동강 방어전선 중에서 동부전선인 영천 지역이 최전방이었다. 북진으로 전선이 물러난 뒤 하루는 아버지가 캔 같은 물건을 하나 가지고 와 “이게 뭔가?”하며 만지시는데 갑자기 ‘꽝’하는 소리에 놀라 마당으로 던져버리셨다.
뒤에 알고 보니 그것은 소련제 수류탄이었다. 부식이 돼 뇌관만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만일에 그 흉물이 제 기능을 다했으면 우리 집은 피비린내 나는 참상이 날 뻔했던 아찔한 사건이었다. 그 뒤부터 6‧25=전쟁=수류탄=공산주의의 등식이 늘 두려웠다. 이처럼 일본 순사와 수류탄은 내 의식 속에서 권력의 상징으로 위압하는 검은 정체였다.
그런데 보안법 등 4대 법을 폐기처분하려는 정부권력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또 다시 권력의 거대한 세력과 직면하는 상황을 겪게 됐다. 그 공포의 대상인 권력과 대결해 앞장서서 예리한 필체로 지적하고 자유보수세력을 규합하며 보수시민운동에 매진하는 것은 가히 전투태세임을 보았다. 이 일에 앞장 선 이가 김상철 장로님이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4대 법안 폐기 반대시민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김상철 장로님의 특유의 메시지는 비수였다. 예리한 칼날이 얼굴 앞을 획획 지나가는 것 같더니 그것들이 모여 벌떼처럼 집결해 광화문을 꽉 채워 북쪽을 휘몰아 날아갔다. 참 통쾌했다. 보안법 폐기 주장은 종식됐다. 그즈음 선배 장로님이 “김 장로, 몸조심해야겠어요. 저녁에 일찍 집에 돌아가시고, 세상이 너무 험악하니 각별히 신경 쓰시는 것이 좋을 같아!”라고 까지 하셨다. 김상철 그이의 실존은 자신의 안위보다 조국의 상황을 더 염려하는 사생결단의 자세였다.
신문 발간을 위해 경제적 충족을 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돈이 일을 한다. 한번은 신문사 통장을 책상위에 놓고 모두 손을 포개고 재정 충당을 위해 기도했다. 그런가 하면 주위의 음해세력은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다. 안팎의 대치는 치열했다. 그러나 양보 없는 투쟁으로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김 장로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126 기도회’ 동기 집회가 열렸을 때였다. 이 기도회는 북한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전쟁의 공포를 야기 시킬 때 장로님과 몇 명의 목사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시편 126편을 기도회 명칭으로 삼아 ‘126기도회’라 하였다. 교회와 나라를 위해 지금까지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20년째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기도하는 모임이다. 이 기도회 때 김 장로님의 시론은 예리하고 선명해 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도제목이 됐다.
기도가 창간시킨 미래한국
미래한국신문 창간 배경에는 기도가 있었다. 2002년 늦봄 126기도 회원들 중에 몇몇이 청계산에서 산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김상철 장로님이 기독교 가치관을 기조로 한 신문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부터 장로님은 신문 발간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신문 이름은 ‘미래한국’이었다. 우리는 이 신문을 위해 참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회 인도자의 말씀도 그 때 나라 상황과 적중해 우리 기도를 더 간절하게 하는 메시지였다.
신문 발간 기본자금으로 10억이 필요하다고 했다. 주주 1000명에 주당 100만원으로 하여 10억을 목표로 정했다. 발간 기간 때까지 액수가 충족되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 액수가 채워졌을 때 장로님은 기뻐하며 기도하자고 해서 감사기도를 했다.
나는 미래한국 신문의 사목이 되었다. 신문이 발간되면서 미래하우스(사옥)에서 매주 화요일 신문 마감하는 날 1층에서는 기도를, 2층에서는 신문 제작에 집중했다. 발간이 원활하게 되도록 기도했다. 그리고 주일예배 후 다시 미래하우스에서 그 주간의 신문 발행과 일정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때 누구보다 김상철 장로님은 애간장을 끓는 듯한 강청기도를 했다. 누구보다 나라의 상황과 이에 대치하는 절박함을 아시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됐다.
신문과 시국을 이끌 때 사람이 필요했다. 한 교회가 협력했다. 그 교회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이 교회 기도회를 김 장로님이 이끌었다. 126기도회, 은혜교회 기도회, 화요기도회, 매주 월요일 아침 직원기도회를 나는 미래신문 사목으로서 참여, 인도했다. 우리는 공산주의에 남한을 고스란히 바치려는 종북세력과 대치하는 기도의 진영(陣營)이었다. 기도회 때마다 김상철 장로님의 기도는 절실했다. 이처럼 김 장로님은 기도로 대처하고 난관을 관통하는 자세를 가졌다.
사람은 가치관에 의해 움직인다. 경건한 성도는 성경을 의지하는 ‘계시의존 사상’으로 나아간다. 김상철 장로님이 설교를 들으며 메모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신문에 시론을 쓸 때도 성경을 기준으로 했고 미국에 강연하러 가서도 성경을 확인하는 전화를 하셨다. 장로님은 오로지 계시의존 사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올바른 기준을 정하는 것이 사람의 완전함이 된다. 이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존하는 신앙이다. 김상철 장로님은 성경 진리에서 나오는 조명을 따라 나아가는 확신에 찬 자세를 가지셨다.
성경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성경의 영(靈)은 참 영이다. 성경의 사람은 참 영의 인도를 받았다. 세상은 참 영과 거짓 영의 대결 현장이다. 김상철 장로님의 지혜와 용기는 이 참 영의 인도를 받는 모습이었다. 이 참 영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우리 시대 ‘그 사람, 김상철 장로님!’이라 부르고 싶다. 김상철 장로님의 가치관과 이를 구현하려는 자세는 어느 목회자에 못지않고 투철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밝혀주던 그 예리한 메시지, 그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울린다. 교회사와 역사는 불의 세력을 가로막고 선 하나님의 사람들의 진리 투쟁의 현장이었다. ‘권력의 위협’에 항거불능하다고 여겼던 내게 거대 권력을 막아 보안법을 지키고 서울을 북한의 자유로운 활동무대로 내주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현장 경험은 참으로 통쾌했다. 이는 하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5년간 미래한국미디어의 사목으로 섬긴 나로서는 답답한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며 마음이 밝아진다. 미래한국신문의 편집 방침 중의 하나인 ‘하나님이 한국을 사랑한다는 믿음 위에 선다.’ 이는 분명 영감을 담아 어두운 현실을 밝게 하는 좌표이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또 다시 시청 앞 그 메시지를 듣지 못하는 것이 그지없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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