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메피스토(Mephisto)에게로?
다시 메피스토(Mephisto)에게로?
  • 김운회 동양대 교수
  • 승인 2016.12.0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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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한국 주류 좌파, 어디로 가고 있나?

진보의 공공의 적은 봉건적 북한 정권이어야 한다. 진보는 봉건주의와 적대적 모

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북한 체제의 모순에 눈감는 한국의 진보좌파는 제 정신이 아니다. 

발문 1

만약 당신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무엇보다도 북한을 철저히 궤멸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왜 그럴까? 이미 북한 정권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객관적 모순이자 적대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발문2 

현재 북한에 대해 가장 분노해야 할 그룹은 좌파 지식인들이어야 한다. 이것은 진보를 꿈꾸는 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의 일부이기도 하다.‘인간의 해방’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가장 저급한 형태의 ‘사이비 종교국가’가 된 북한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좌파들의 지적·도덕적 수준이 의심스럽다. 
 

▲ 촛불시위와 탄핵운동에 앞장선 문재인 전 대표. 북한 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한국 주류 좌파는 늘 청와대의 안보 정책에 딴지를 걸었다. / 연합

도대체 왜? 

최근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국정이 표류하고 좌파들은 호기를 맞았다. 순풍이 부니 여기저기서 돛을 달고 배를 띄우고 있다. 김정일의 결재 여부 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강남의 돼지엄마와 그녀에 빌붙은 잡배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된장녀 딸의 부정 입학으로 이대(梨大)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렸다.

극심한 경제 제재와 외교적 고립무원의 김정은으로서는‘굴러들어온 떡’이 생긴 셈이다. 올해 실로 김정은 정권은 매우 위태로운 절망의 해였는데 국면 전환의 호기를 맞았다. 지금 한국은 일본 언론들의 지적과 같이, 북한 정권의 천적(天敵)이 제거되면서(아사히신문) 한반도는 바야흐로 패망 직전의 베트남화(산케이신문)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남북 관계는 국내 정치 상황과 분리시켜야 한다. 역사적으로 민족 통일은 대화나 타협을 통해 이뤄진 적은 없다. 특히 평양 정권은 대화나 타협이 될 수 있는 정권이 아니다. 이미 국제적으로 기소된 불량 정권이자 악의 축이다. 지난 5천년 역사상 이렇게 자기 동족을 학대한 정권은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국민이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평양 정권에 유리한 국면으로 사태가 역전되는 상황부터 막아야 한다. 국정을 농단한 돼지엄마와 이와 관련된 사람에 대해서는 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하면 된다. 또 박근혜 대통령도 법적 책임이 있다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북한 정권의 저 참담한 상태를 보고서도 요지부동인 친북‧종북 세력들이 명백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종북보다는 종미(從美)가 문제”라고 하는 이석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국정교과서 파동과 같이 참담한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걸까? 공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김정은은 상당한(지도자) 수업을 받아서 늠름하다”라거나 “차라리 북한에 쌀을 보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 말이 과연 전 세계가 북한을 규탄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일까? 

도대체 한국 좌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서경석 목사는 <세상읽기>에서 3대 세습, 극심한 공포정치에, 5차 핵실험과 SLBM 발사까지 하는데,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은 문재인 씨가 참혹한 북한 체제를 보면서도 어떻게 변함없이 친북 입장을 견지할까 하는 점과 그렇게 하면서도 어떻게 20%의 견고한 지지를 얻을까?”라고 묻고 그 이유를 1987년 민주화운동을 성공시킨 학생세력이 김일성 주체사상파(종북좌파)였고 이들이 친노(親盧)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라면 제1의 공적은 북한 정권 

만약 당신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무엇보다도 북한을 철저히 궤멸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왜 그럴까? 이미 북한 정권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말하는 객관적 모순이자 적대적 모순이기 때문이다. 적대적 모순이란 자본주의 자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가장 중요한 좌파의 공리로 반드시 지양(止揚)을 통해서만 해결된다. 이 적대적 모순 안에는 역사적 반동인 봉건주의도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해 한국 좌파들은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현대의 변증법적 인식이란 마르크스의 역사의 종언을 부정하거나 뛰어 넘어 다양한 형태의 테제들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옹위하거나 동반자나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는 현대 한국의 주류 좌파들의 사고가 제대로 된 변증법적 인식에도 도달해 있지 못하다. 사회주의도 모르면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한다? 

한국의 주류 좌파들의 생각은 교조적이고 편협하다. 문명 사회의 공적이 된 북한  정권을 사사건건 두둔하고 있다. 국정교과서 파동과 북한인권법을 외면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도대체 한국의 주류 좌파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변증법은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에서 출발하는데 도대체 이들은 어떤 부분부터 ‘부정의 부정’을 거부했을까? 

‘부정의 부정’은 좌파의 항구적인 원리이자 생활 태도다. 즉 현실의 잘못된 부분을 부정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이전의 긍정적인 부분을 포용하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매우 유연해 “공산주의도 음양의 법칙처럼 일단 만들어 지고나면 언젠가는 또 다른 사회로 변하게 되고 없어지는 것”이라 했다.

이 간단한 진리를 왜 한국의 주류 좌파들은 못 볼까? 아마도 세상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보는 눈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한국의 주류 좌파들은 부정을 폐기해 교조화(敎條化)되고 말았고 세계사에 역행하는 거대한 흐름으로 변질되었다. 

좌파들은 스스로를 진보세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원래 좌파에서 말하는 진보라는 말을 알고 있을까? 만약 안다면 북한 체제를 두둔 옹호하는 말을 할 수 없다. 좌파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대립물의 상호침투(相互浸透)와 지양의 과정을 통해서 진보의 길로 갈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대립물의 대상은 자본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반동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진보는 철저히 변증법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핵심 개념 즉 양질전화(量質轉化)가 있다. 양질전화란 양의 집적(集積)은 질적 변화를 초래하며, 그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적 이행이라는 것이고 사회주의 혁명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문제는 이 양질전화가 역행하는 경우들이다.

북한 정권은 반동적 양질전화(量質轉化)의 전형적인 형태로 역사적 반동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북한을 적대적 모순으로 인식하지 않는 테제들이 한국 좌파들의 뇌리에 암과 같이 퍼져 있다는 점에서 한국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들이 젊은 시기에 주사파의 해괴한 논리에 함몰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현재 북한에 대해 가장 분노해야 할 그룹은 좌파지식인들이어야 한다. 이것은 진보를 꿈꾸는 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의 일부이기도 하다.‘인간의 해방’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가장 저급한 형태의 ‘사이비 종교국가’가 된 북한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좌파들의 지적·도덕적 수준이 의심스럽다. 

양질전화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을까? 

사회주의 혁명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레닌(Lenin)의 한 마디, “여보게, 모든 이론은 회색일세. 그리고 푸른 것은 영원한 생명의 나무라네.(파우스트)”라는 말은 마르크스주의가 레닌주의로 양질전화 되는 결정적인 테제였다. 이 말은 교조주의를 경계하는 가장 인기 있는 인용문으로 유명하지만 실상은 다르다.‘현실에 맞는 공산주의의 건설’이라는 측면이 강조된 것이다.

원래 이 말은 메피스토(Mephisto)가 파우스트 박사로 거짓 행세하며 설교를 해대다가 질문 공세에 시달리자 없는 실력에 대답도 힘드니 내뱉은 소리다. 레닌은 서유럽은 민주적이므로 사회주의 운동이 합법적인 길을 밟을 수 있을지 몰라도 러시아는 아시아적이고 후진적이어서 혁명은 강철 같은 조직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이상에 대한 완전한 결별 선언이기도 하다. 즉 추상적 이론에 매달리지 말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을 때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러시아적 변형은 사회주의 운동 자체에 커다란 양질전화를 초래했다.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후진 지역의 변방 혁명이 성숙한 토대의 미완의 혁명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을 통제·지도하는 형태의 이상한 양질전화가 형성되었다. 원래 사회주의혁명은 가장 선진화된 곳에서 성립하는 것인데, 최빈의 후진국들을 중심으로 공산화가 선도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혁명 역량이 집중되면서 ‘농민전쟁’이라는 중세적 개념이 새로이 등장해 현대 공산주의 이론화되었다.

이로써 캄보디아의‘킬링필드’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은 엉뚱하게 세계 최빈, 최악의 반동 국가인 평양 정권이 종북세력들과 모의해 선진 한국의 혁명화를 선도하고 있는 형태다. 이를 보완하려는지 10여 년의 걸친 좌파 정권은 막대한 돈을 북한에 퍼주고 NLL을 북한에 넘겨주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북한은 근대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채 김일성 교단, 김일성 민족이 형성되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고 말았다. 현대 북한 체제는 체제 성립 이전의 일본 천황의 아라히또가미(現人神 : 살아 있는 신)와 결합해 가장 완벽한 형태의 ‘사이비 종교국가’가 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측면에서 북한 체제는 이중적 적대적 모순이 중첩된 형태이다. 즉 봉건적, 종교적, 반민중적 관료독재, 반인권적 통제 구조 등이 중첩된 구조로 봉건 반동성, 반프롤레타리아적 관료주의, 왕조적 폭압과 독재라는 이중 삼중의 적대적 모순을 가진 체제다. 이것은 변화하는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적대적 모순은 김성주(김일성)의 행적이 가진 극히 일부 항일적 성격으로 상쇄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사를 김일성을 중심으로 주도한 것처럼 날조한 것은 민족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악랄한 범죄로 심판받아야 한다.

더구나 김일성의 항일 독립 행각이라는 것이 대부분 허구로 밝혀졌다. 일찌감치 김성주는‘가짜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졌고,‘청산리대첩’인양 대대적으로 선전하는‘보천보 전투(1937)’는 5인의 주재소(파출소)를 파괴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그것은 김일성의 작품이 아니라 박금철 등의 갑산파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주체의 객체화, 객체의 노예화 

루카치(Lukacs)를 비롯한 대부분 좌파 이론가들은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이 인간‘주체’에 있다고 봤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같은 생각이 역사상 최악의 정치철학인 주체사상으로 양질전화 되었다. 이 양질전화에 대해 가장 분노해야 할 사람들은 좌파 지식인인데 그것을 분노할 만큼 한국의 주류 좌파들의 지적 수준이 이르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양비론(兩非論)이라는 가면을 쓰면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거나 결과론적으로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일을 자처하고 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가장 종교적인 정치사상이며 인간 구속을 극대화한 정치적 종교다. 주체사상은 민중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수령을 중심으로 한 종교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구조가 유지되려면 구성원들에 대한 끝없는 세뇌(洗腦)와 탄압이 필요하다. 결국 북한에서의 인간은 철저히 객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객체화된 민중들은 중세의 노예나 농노와 유사한 형태가 된다. 

파멸 직전의 마르크스주의의 구원자로 칭송을 받았던 알뛰제(Althusser)는 ‘구조’가 주체의 우위에 있다고 보고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했다. 한편 ‘객체의 가장(假裝)된 주체화’는 알뛰제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핵심 개념 중의 하나인데, 주체사상은 아예 주체를 객체화, 노예화하고 있으니 북한 정권은 진보주의적 적대성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햇볕정책은 숨이 끊어져 가는 북한 정권을 회생시켜 민족 파멸의 핵무장이라는 부메랑으로 다가 왔다. 햇볕정책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외형적으로는 ‘경제통합’의  한 단계로 선전하지만, 실상은‘계급동맹’이나‘통일전선’등의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즉 개성공단은 선·후진국 사이의 분업 구조에서 나타나는 학습효과나 경제파급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도 않았고 경제적 잉여가 다른 지역의 공업화를 촉진하는 역할도 없었으며 대부분 민족 파멸을 핵무기 제작에 유입되고 말았다. 

북한 체제는 일반적인 시스템의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성격을 띤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테제(These)는 ‘가변성’을 가지게 되는데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반발 탄성(elasticity)을 상실할 정도의 가공할 폭력에 의한 살해와 숙청이 나타나게 되면 그 사회는 지속적으로 정체하게 된다.

북한은 반발 탄성이 상실한 체제로 자체적인 쿠데타나 혁명의 발생은 매우 어렵다. 철저한 상호 감시와 사회 통제, 공포정치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북한은 새로운 체제의 외부적 이식(移植)만이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좌파는 문명사회의 공적(公敵)인 북한과 공립(共立)할 수 있을까?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한국 좌파들 가운데 북한 체제에 적응하거나 생존할 만한 자들은 거의 없다. 한국의 좌파들은 외형적일지라도 자유와 민주 등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좌파들은 북한에 의해 통일 된 후 숙청될 것이다. 종교인은 제1의 숙청 대상이다.

실제로 6.25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고생했던 많은 남로당 전사(잔당)들을 빨리 북한으로 귀환시키지 않고 추위와 기아로 몰아 죽인 것도 김일성이다. 그들 대부분은 해방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보급투쟁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아마도 정치적 부담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베트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남베트남인들의 적화주도세력이었던 베트콩(민족해방전선)과 민족주의자 등은 북베트남 공산당원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으나, 베트남이 통일되는 그날, 그들의 모든 희생과 헌신은 사라지고 예외 없이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숙청당했다.(<배반당한 베트남 혁명>) 

이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북한 정권과 대화나 협력을 모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허황된 일인지를 그간의 역사가 증명한다. 북한을 달랜다는 식의 논리는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 그런 평화는 더 잔혹한 미래를 초래할 뿐이다. 한국의 좌파들도 현실을 직시해 북한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긋고 국민 앞에 떳떳하게 나서야 할 때이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 

한국외국어대 경제학 박사
국민경제자문회의 ‘지역균형 발전기획단’ 전문가 참여 
전 문화관광부 정책자문위원
<왜 자본주의는 고쳐 쓸 수 없는가> 등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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