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내 먼저 떠나보내
사랑하는 아내 먼저 떠나보내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8.05 01: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탄생 100돌] 박정희 정신의 창조적 계승을 위하여(9)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박정희,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며 지은 詩)

1974년 8월 14일, 국내 각 대학 유네스코 학생회원들은 10여 일 간의 조국순례 대행진을 마치고 최종 목적지인 부여 백마강을 향해 도보로 행진했다. 정오 무렵 땀에 흠뻑 젖은 학생들에게 서울서 내려온 모 제과 냉동차가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배급했다. 육영수 여사가 고된 행군을 하는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곳까지 아이스크림 배달을 시킨 것이다. 

다음날인 8월 15일 아침. 육영수 여사는 구겨진 옷고름을 펴느라 시간을 빼앗기는 바람에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덩그러니 식은 미역국을 밥상에 놔두고 광복절 행사를 위해 장충동 국립극장으로 나서면서 청와대에 와 있던 어머니 이경령 여사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니. 제가 오늘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잘 보세요.” 

이경령 여사는 근영 양, 지만 씨와 함께 딸이 나온다는 광복절 기념식 행사 TV 중계를 지켜봤다. 

오전 10시 23분, 장충동 국립극장.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절 29주년 축사를 낭독하고 있었다.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순간, 객석에서 “꽝”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격범 문세광이 허리춤의 38구경 스미스웨건 권총을 더듬다 방아쇠를 잘못 건드려 오발을 한 것이다. 제1탄은 문세광의 허벅지에 박혔다. 

저격범은 권총을 빼들고 절룩이며 단상을 향해 11m를 달려 나가 2탄을 쐈다. 총알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 있던 방탄 연설대의 상단부에 박혔다. 

3탄은 불발. 네 번째 총성과 함께 단상에 앉아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오른쪽 머리에 총알이 박힌 것이다. 범인은 7.5초 동안 다섯 발을 쏜 후 관객의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체포됐다. 

연단 아래 엎드린 박정희는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지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호원에게 “저기 우리 내자한테 가봐!”라고 낮게 말했다. 청와대에서 TV로 광복절 기념식 중계를 보던 근영 씨는 갑자기 “탕” 소리와 함께 화면이 꺼지는 것을 모고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육 여사가 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후 박정희 대통령은 보리차 한 잔을 마신 다음,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라면서 중단됐던 경축사의 바로 뒤 문장을 정확히 짚어내 끝까지 낭독했다.  퇴장 때 박정희는 아내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자신이 직접 주워 갖고 나오다가 경호원에게 넘겼다. 

대통령 제2부속실 행정관 김두영은 서울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영부인은 의식불명 상태에서 헉, 헉 하며 불규칙적으로 가쁜 호흡을 몰아쉬고 있었다. 영부인이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옮겨진 직후 광복절 기념식 공식행사를 모두 마친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의대 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핏기가 가신 박정희의 검은 얼굴은 샛노랗게 변해 있었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박정희는 의사들에게 “최선을 다해주시오” 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전날 육 여사가 보내준 아이스크림으로 용기백배한 유네스코 학생회원들은 백마강에서 광복절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그 시각 육 여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긴급 뇌수술에 들어갔다. 혈액이 모자라 비서실 직원이 총동원돼 영부인의 수혈을 위해 채혈을 했다. 

김두영은 영부인이 끼고 있던 반지와 총상으로 떨어져 나온 이마의 뼛조각을 의료진으로부터 받았다. 머리에 총탄을 맞을 때 머리뼈가 부서지면서 떨어져나간 파편을 수습한 것이다. 의료진들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육 여사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도중 육영수 여사가 저격 당하는 장면. 문세광이 쏜 제4탄이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박혔다.

하늘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오후 4시께. 내리던 비가 잠시 그치더니 하늘이 일부 개면서 영롱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서울대병원 일대가 갑자기 환하게 변해 그곳을 지나던 시민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김두영은 병원 창밖으로 하늘을 내다봤다. 하늘이 영부인이 입었던 황금색 물방울 무늬의 한복 색깔처럼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영부인의 시신을 수습한 서울대 부속병원 간호사들은 육 여사가 입었던 속치마가 낡아서 기워진 것을 보고 눈물을 쏟았다. 우아한 한복 속에 그런 것이 가려져 있을 줄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그 때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박 대통령은 청와대 2층에 서서 해 질 녘의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뒤에 서 있는데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7시, 육 여사가 운명(殞命)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에 박 대통령이 엉엉 큰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이었다. 강인하고 속이 깊은 박 대통령이 그렇게 슬피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59>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육영수①, 중앙일보, 2015. 7.20)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영부인의 유해가 청와대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검은 양복을 입고 지만, 근영 두 자녀와 함께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영부인의 유해는 대접견실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프랑스 유학 중이던 근혜 씨(박근혜 대통령)는 방학을 이용하여 세미나 참석차 프랑스 니스를 방문하기 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부쳤다. 세미나가 끝나면 서울에 와서 어머니를 뵙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대사관에서 ‘즉시 귀국하라’는 긴급 연락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 대통령께서 즉시 귀국하라는 전문이 도착했다”는 메시지였다. 

부랴부랴 세미나를 취소하고 차에 타려는 순간, 신문 가판대에서 한복을 입은 사진이 실린 신문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끌려 그 신문을 펴 보니 ‘한국의 퍼스트레이디 마담 박이 암살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쉽게 표출하지 않는 박정희였기에 문상객들 앞에서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녀들에게도 이 점을 각별히 일러두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져 문상객들의 발길이 뜸해지면 혼자 육 여사 영전에서 분향을 하고 통곡을 했는데, 그 울음소리가 맹수의 울부짖음을 연상케 했다. 박정희가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을 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눈짓을 했다. 

“이 손 좀 잡아보세요” 

“우리가 공식행사에 참석할 때는 언제나 내가 걸음이 빠르니 앞서 걸어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사람은 나보고 혼자 먼저 가지 말고 ‘나와 같이 가자’고 그랬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나보다 먼저 가버릴 줄이야…” 

그리고는 말을 잊지 못했다. 침묵을 깨고 박정희가 다시 말했다. 

“지금도 그 사람이 두 손을 내밀며 저 문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이 손 좀 잡아보세요. 한센병 환자들과 악수한 손이에요’ 라고 웃으면서 말이야.” 

박정희는 유학 중인 큰딸이 너무 놀라고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귀국길에 오른 큰딸에게 편지를 써서 외교행낭으로 급히 주일 한국대사관으로 보냈다. 근혜 씨는 도쿄를 경유하여 장례식 이틀 전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가 큰딸을 태우고 돌아오면서 차내에서 저격사건의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근혜 씨가 어머니에게 부친 편지는 서울 도착 후 본인이 받았다. 

8월 19일, 육영수 여사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전통 관례에 따라 남편 박정희는 사랑하는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청와대 정문 옆에 있는 작은 문 뒤에서 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아 나갈 때까지 지켜서서 보았다. 

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자 신직수 정보부장이 박정희를 모시고 본관으로 올라왔다. 김두영이 뒤따라가면서 보니 대통령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 방울이 연신 떨어지고 있었다. 박정희는 집무실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장례식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8월 20일)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지난 제29주년 광복절은 우리 겨레가 모두 기쁨과 희망으로 맞이했어야 할 겨레의 축제일이었습니다만, 뜻하지 않게도 충격과 슬픔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된 데 대하여 진심으로 국민 여러분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중략) 

생애에 있어서 사랑하는 내자를 여의는 것처럼 더없이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슬픔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본인은 국민 여러분이 보내 주신 애끓는 애도와 정중한 조의에 보답하는 길은, 대통령의 직책인 국가 보위와 국민의 자유, 복리 증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믿고, 이 땅에서 폭력과 빈곤을 몰아내고, 사랑과 희망이 가득 찬 행복한 생활을 우리 모두가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성실히 노력할 것입니다.” 

돌연한 아내의 죽음은 박정희의 삶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박정희는 늦은 밤 거실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다가 의자에 앉아 잠이 들곤 했다. 대통령이 소파에 누워 자는 모습을 본 부속실 당직 비서관이 깨워 침실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 잦았다. 

박정희는 어느 날 싱싱한 오렌지를 들고 서 있는 아내의 꿈을 꾸었다. 너무 반가워서 “여보” 하고 외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자녀들이 재혼(再婚)을 권했으나 박정희는 “난 네 어머니 밖에 없다”며 물리쳤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박정희는 일기를 쓰고, 노래도 만들었다. 아내 없는 침실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시(詩)를 한 수 남겼다.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의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 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 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 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 수가 있으리.’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육영수 여사 국민장(國民葬)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naver.me/F01XEl4S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