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산정권 실체 인정하고 통일정책을 현실적 방향으로 전환
2016년 8월 15일은 광복 71주년인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하여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남북 간 모든 형태의 왕래와 교류가 단절된 시기를 마감하고 대화 개막을 연 46주년이다.
1998~2008년 좌파정권 10년을 지나면서 우리 사회가 극도로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고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배치에 대한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시점에서 ‘선(先) 평화, 후(後) 통일’ 취지의 이 선언의 의미를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의 기초를 다진 1960년대를 민족중흥의 전진 대열을 정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규정하고, 1970년대에 개발도상국, 1980년대에 중진국, 1990년대에 중진국 선두 및 선진국 진출 준비를 하여 20세기 말에 선진국 대열에진입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각종 국가정책의 초점을 이 비전 실현에 맞췄다.
박 대통령이 이러한 국가 발전 비전에 따라 197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발표한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핵심은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북한이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 정책 포기를 선언하고 행동으로 실증하면, 평화통일 기반 조성을 위해 남북한 간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으며,
둘째, 자유민주주의와 공산독재 중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 것이었다.
따라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은 북한 공산정권의 실체를 인정하고 해방 이후 종래의 소모적이고 비현실적 통일정책을 현실적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계기였다.
국내외 정세 변화와 안보위기 속에서 내린 결단
또 이 선언은 통일 이전에 긴장완화, 전쟁방지, 평화정착과 같은 중간단계의 설정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남북한 간의 인위적인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할 용의를 밝혀 남북한 간의 대화와 교류를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은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군 감축과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 당면한 북측의 무력도발로 가중된 안보상의 위협과 남북한 체제 경쟁 등 3중의 도전에 직면하여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통일문제에서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전략적 구상이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反戰) 여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1970년 2월 18일 의회에 보낸 장문의 ‘1970년대의 미국 외교정책: 평화의 구축’에서 미군 개입 축소와 동맹국들의 자국(自國) 방위책임을 강조하면서 소련, 중국 등 공산진영과의 적대관계 완화와 협조관계 모색을 포함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독트린에 의거하여 미국은 1970년 4월 10일 확정된 대한(對韓) 군사원조액을 전년 대비 3000만 달러를 삭감한 1억 4049만 달러로 조정하고, 7월 6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주한미군 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명을 1971년 6월 30일까지 철수할 것임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북한은 1960년 대 초반부터 강화해온 전쟁 준비를 기반으로 하여 1960년대 후반 대남 폭력전술을 노골적으로 구사했다. 김일성은 1967~68년 인민군 부대를 방문하여 “내 환갑잔치를 1972년 4월 15일 서울에서 하자”고 말하고 다녔으며 1960년대 후반 대남 무장 게릴라 침투 활동과 간첩활동을 증가시켰다. 이 기간 중 적발된 통계는 1966년 50건, 1967년 543건, 1968년 1247건으로 급격히 증가되었다.
또 박 대통령은 1962년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적 추진에 자신감을 갖고 1969년을 계기로 향후 10년 동안만 고도경제성장을 계속한다면 동서독 관계처럼 한국이 북한을 압도하게 되어 북한의 ‘남조선 혁명노선’을 제압하고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1년 여 치밀한 준비, 관계부처 의견 반영
한편 1969년 10월 17일 실시된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전후하여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이끄는 야당이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공격하고 남북한 간 교류를 주장하고 나서자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통일문제 논의에서 이니셔티브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은 1969년 추석 후 대통령의 정책비전과 구상 준비 지시, 1970년 1월 연두교서 발표(1970년대 통일 방법 적극 모색 천명), 1970년 3월 초부터 학계와 언론계의 자문을 받으면서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실의 ‘8·15 경축사’ 연설문 초안 작성, 6월 말 경 대통령에게 연설문 초안 보고, 7월 25일부터 차관급으로 구성된 관계부처 실무회의 검토, 8월 초 대통령에게 최종 초안 보고, 8월 9일 대통령 주재 장관급 정책결정 회의 검토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총 소요 기간은 1년 정도 걸렸다.
이 과정에 청와대 비서실과 관계 부처(외무부, 통일원, 법무부,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각기 맡은 바 소임과 역할을 다하고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마지막 회의에서 언성을 높이고 갑론을박을 하는 토론 후 이견(異見)을 수용, 종합하는 시스템으로 정책을 협의·조정했다.
박 대통령은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 발표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과 파장을 우려하여 관계부처와 중앙정보부로 하여금 주한 외교단, 정계, 경제계, 언론계, 종교계, 예비역 장성, 대학 총·학장 등을 대상으로 사전 설명을 하도록 지시했다.
요약하면, 박 대통령의 정책결정 과정에는 미래 국가비전에 입각한 정책 수립, 국내외 정세 및 북한 정세 변화 파악, 정부 부처 간의 활발한 토론을 유도하여 이견을 수용, 정책을 협의·조정한 특징이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비밀 유지를 위해 야당과의 조율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이 선언 발표 이후 1971년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위한 남북적십자사 간 회담이 개시되고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로 정치적 대화의 물꼬를 튼 후 1990년대 총리회담과 2000년대 정상회담까지 개최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간 대북 햇볕정책으로 ‘선 평화, 후 통일’의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 정신은 실종되었다.
수많은 대화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협의가 부족했고, 또 진전도 없었다. 북한은 국내외 정세가 그들에게 불리해지면 대결과 혁명의 자세에서 대화로 돌아온다.
대화가 재개되면 그동안 우리가 해 온 대화 자세를 자성(自省)하고,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첫 의제로 삼아야 하며, 섣불리 ‘합의에 의한 통일’이나 온정적 지원을 논의하지 않아야 한다.
사드는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 수단
좌파정부의 대북 온정 지원에 힘입어 되살아난 북한은 2006년 이후 네 차례의 핵 실험과 헤아릴 수 없는 중거리 미사일, 대륙간 탄도 미사일,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발사 실험으로 대남공격 능력을 고도화했다.
백척간두 위기의 우리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과거와는 다른 근본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맹방과 연합하여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우리를 공격하려고 할 때 자신들도 선제공격을 받거나, 즉각 반격을 받아 절멸될 수 있다는 위협을 주는 ‘공포의 균형’에 의한 억지력으로 저들이 극단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북한의 대량살상 무기에 대한 최소한의 자위방어 수단으로 발표된 성주 사드 배치에 대한 반대 선동이 끓고 있다. 국가 명운이 달린 사활적 안보 문제는 다른 가치와 바꿀 수 없다. 사드 배치의 원인이 된 북한 핵 폐기를 중국 측에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정부가 무방비 상태로 해이해진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확고한 안보 대책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제시한 ‘선 평화, 후 통일’의 정신을 계승·구현하고 통일을 이루는 첩경이다.
이 선언 발표 46주년에 즈음하여 앞으로 우리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정치와 경제 질서를 따르기만 하는 종속체가 아니라 국내외 정세 변화 추이와 상대방의 수를 잘 읽고 판을 주도해간 참 지도자를 따를 것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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