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기적의 드라마 기획·연출한 경제기획원 설립
경제 기적의 드라마 기획·연출한 경제기획원 설립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6.07.2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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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돌 역사 속의 오늘] 경제기획원 출범(1961년 7월 22일)

장면 정부 시절 기업가들이 건의했던 ‘경제계획원’ 설치 아이디어 박정희가 현실화하다

박정희 시대 18년은 한 마디로 초고속 성장의 시대였다. ‘박정희 패러다임’으로 불리는 관치(官治) 경제·금융 하에서 산업정책을 시행하여 연평균 8%라는, 지구상 전무후무한 성장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박정희는 어떻게 이처럼 기적과 같은 고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첫째 철저한 차별화 전략, 둘째 경제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부 조직인 경제기획원을 설립하고, 이 조직을 통해 국력을 총동원하여 경제 제일주의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좌승희 이사장(박정희기념재단)의 연구에 의하면 박정희의 차별화 전략이란 산업정책이나 새마을운동 추진 과정에서 뛰어난 실적이나 업적을 달성한 우수 기업이나 마을(혹은 개인)을 격려·지원하고,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한 것을 말한다.

수출을 예로 들면 기업들의 그 해 수출 실적에 따라 등수를 매긴 후 상위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참여한 수출유공자 표창대회에서 훈장이나 표창을 줬다. 대통령 표창을 받은 기업은 최고 우량기업으로 인정받아 각종 금융이나 세제상의 혜택, 정부 지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이처럼 확고부동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차별화 전략을 통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발전 정신을 가진 경제 주체들이 우대받는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강력한 동기부여를 유발하고, 발전의 역동성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이 남한보다 1인당 소득 4배 높아 

5·16이 일어난 1961년은 6·25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지 10년도 안 된 시기여서 남북은 생사(生死)를 건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제력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간의 우열을 가리는 지표로 인식됐기 때문에 경제 발전은 안보를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였다. 

박정희가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1961년, 세계개발은행(IBRD)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의 독립국가 125개국 중 101번째였다. 한국의 1인당 소득은 우간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토고, 파키스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반면에 북한은 1961년 1인당 국민소득 320달러로 세계 50위, 1인당 소득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4배나 높았다. 박정희는 북한보다 형편없이 못 사는 대한민국을 북한보다 잘 사는 나라로 변모시키기 위해 국력을 경제로 총결집시켰다. 이것이 경제 제일주의의 핵심이다. 

박정희는 공산 체제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핵심은 경제라고 판단했다. 낙후된 경제를 단 기간에 발전 궤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이를 관장할 ‘힘 있는 기구’가 필요했다.  혁명정부는 5·16이 단행된 지 불과 40일 후인 1961년 5월 29일, 경제정책을 관장해오던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편했다. 

혁명정부의 건설부 설치 의도는 건설행정이 목적이 아니라 국민경제를 총체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재정계획 수립 등 경제발전정책의 기획 및 입안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건설부 출범 한 달도 안 돼 부서 명칭과 설치 목적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당초 건설부 설치 목적은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 및 전략을 주도적으로 기획 입안하고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경제개발을 적극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경제개발계획을 수립 조정하고 투자 우선수위를 고려하여 정부 예산을 편성하고, 필요한 외자를 조달하는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건설부 조직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박정희는 경제 분야에서 부처의 칸막이를 뛰어넘는, 보다 강력한 권능을 가진 부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설립 한 달도 안 된 건설부를 폐지하고 건설부의 일부 기능과 재무부 예산국, 내무부 통계국을 통합하여 5·16 두 달 후인 1961년 7월 22일, 경제기획원을 발족하고 그 산하에 외청으로 국토건설청을 설치했다.

그리고 혁명정부가 경제기획원에 국가경제 전반에 대한 재건계획과 발전계획 수립에 착수할 것을 지시하여 탄생된 것이 1962년 1월 초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다. 

경제기획원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예산을 편성하며 경제정책을 조정 통제하는 박정희의 경제 사령탑이었다. 경제정책에 대한 막강한 권한이나 영향력 면에서 경제기획원 같은 기구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박정희가 민정 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한 후 경제기획원 장관은 부총리로 격상되었다. 경제기획원은 다른 경제관련 부처들을 조정 통제하면서 정부 예산을 편성·집행했고 투자계획과 기술개발계획을 조정했으며 대외경제협력 업무도 담당했다. 

흥미로운 것은 경제기획원 창설이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박정희 혁명정부의 독자적 작품은 아니라는 점이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뿌리는 이승만 정부, 경제기획원 창설은 장면 정부 시절 기업가들이 정부에 제안했던 정책 아이디어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했다. 1959년 12월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의 전반부인 3개년계획(1960~62)이 완성되었고, 1960년 4월 15일 이 계획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으나 나흘 후 터진 4·19로 시행이 무산됐다. 

1961년 3월, 장면 정부의 산업개발위원회는 이승만 정부의 경제개발 3개년계획을 토대로 새롭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완성하고, 부흥부 고문으로 내한한 미국의 찰스 울프 박사에게 관련 계획을 브리핑했다. 이 계획도 두 달 후 발생한 5·16으로 인해 시행되지 못하고 관계자의 책상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한 경제기획원, 국가경제 재건 및 발전을 위해 수립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각각 장면 정부와 이승만 정부의 아이디어를 모티브로 한 것이었다.

필요한 것은 누구 아이디어든 상관없이 받아들여 

경제기획원 설치 아이디어는 장면 정부 시절인 1960년 12월 15일부터 5일간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를 비롯한 정부 부처의 장·차관, 그리고 당대의 재계·기술계·학계·언론계 등 최고 엘리트 200여 명이 총 집합하여 열렸던 종합경제회의에서 처음 제기됐다. 

당시 종합경제회의 간사를 맡았던 김입삼(전경련 부회장 역임)의 증언에 의하면 장면 정부 시절 열렸던 종합경제회의에 참여했던 기업가들이 이구동성으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경제 분야의 비상대권을 갖는 정부기구 신설이 필요하며, 이 기구 명칭을 ‘경제계획원’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제기했다. 또 농어촌 고리채 정리, 태백산 종합개발 구상, 국토건설사업 등 수많은 아이디어를 정부에 건의했다. 

5·16 이후 혁명정부는 장면 정부 시절 종합경제회의에서 논의됐던 내용을 정책의 교본으로 삼다시피 했다. 그 예가 군사정부 출범 직후 설립된 경제기획원 신설, 농어촌 고리채 정리, 신5개년 계획, 국토건설사업 계획, 태백산 종합개발 구상 등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5·16 거사 이틀 후인 5월 18일 장면 정부의 핵심 사업인 국토건설사업을 중단 없이 추진하겠다고 발표했고, 5월 25일엔 농어촌 고리채 정리계획을 공포했다. 7월 22일에는 부흥부를 폐지하고 출범시켰던 건설부를 경제기획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장면 정부 시절 기업가들이 제안했던 ‘경제계획원’ 명칭이 ‘경제기획원’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동일했다. 

혁명정부의 사령탑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7월 6일 종합경제재건 5개년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이승만·장면 정부 시절 경제개발계획 수립 부서인 산업개발위원회 멤버로 활동했던 김성범·백용찬·정소영 등이 참여하여 민주당 정부가 수립했던 5개년 계획 중 목표성장률을 높이고 계수조정을 하여 만든 것이다. 바로 이것이 1962년 1월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경제기획원 설치가 이승만·장면 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은 경제기획원이 발간한 <개발연대의 경제정책: 경제기획원 20년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경제개발계획 입안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부흥부는 전후의 경제적 피폐에서 시급히 탈피하기 위하여 산업경제의 부흥에 관한 종합적 계획과 그 실시의 관리 조정에 관한 사무를 담당케 했다. 이에 따라 부흥부 산하의 부흥위원회는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정부주도적인 경제개발을 이끌어 가기 위한 경제개발계획인 ‘경제개발 7개년 계획 중 전반 3개년 계획’을 작성하여 1959년 3월에 발표하였다.

이는 자유경제체제에 계획성을 가미한 최초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 계획은 그 후의 4·19 및 5·16 등 정치상의 변동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 후 부흥부는 5·16 혁명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령 제14호에 의하여 1961년 5월 26일에 신설된 건설부에 그 기능이 승계되면서 폐지되었다. 건설부는 국민경제의 효율적인 운용을 위한 종합적 계획의 수립과 그 실시의 관리조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나 불과 2개월 후 그 기능이 신설된 경제기획원에 이관되었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추진되었으며 특히 50년대 말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기에 까지 이르렀으나 당시의 거듭되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 등으로 실시에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1961년 7월 22일 경제기획원이 발족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립 작업에 착수하여 1962년 1월 5일 이를 확정 발표하였다.’ 

이런 자료들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국민들의 ‘밥’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전임 정부가 만들었건 누가 제안했건, 국가 발전에 필요한 아이디어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다 받아들인 다음, 국가의 전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성공시켰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의 사령관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듯이 군사혁명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은 오직 경제개발이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제기획원을 설치하고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면 경제기획원장 임명 관련 동영상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222&mediadtl=1602&gbn=DH&qualit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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