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실패 바로잡아야 규제개혁 성공한다
정치실패 바로잡아야 규제개혁 성공한다
  • 조동근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4.13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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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제언] 20대 국회에 바란다

규제개혁이 성공하려면 “시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표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타성적 사고 버려야

한국적 현실에서 규제개혁은 ‘시지프스의 바위’다. 규제완화, 규제혁파 등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규제개혁은 언제나 국정 최고 과제의 위치를 차지했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새로 원(院)이 구성될 때마다 규제개혁은 늘 중요한 아젠더였다. 하지만 규제개혁은 시지프스의 바위가 되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20대 국회는 규제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여건은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다. 올해는 미국의 금리인상과 중국의 경착륙 가능성으로 압축되는 ‘G2 리스크’가 보다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경제 활성화를 위한 규제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도 자신의 잔여 임기를 규제개혁을 통한 경제 활성화에 다 걸 것(all-in)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낙관적인 사니리오는 여기까지다. 20대 국회의 규제개혁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정책 사고는 관성의 지배를 받는다. 이를 ‘이력현상’(履歷現象, hysteresis·물질의 물리량이 현재의 물리적 조건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이전부터 그 물질이 겪어 온 상태의 변화 과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현상)이라고 부른다. 

19대 국회는 규제개혁 측면에서 봤을 때 최악의 국회였다. 19대 국회의 규제 행태와 정책 사고를 철두철미하게 단절하지 않으면 20대 국회도 19대 국회의 전철을 밟을 개연성이 높다. 실패가 ‘실패학’이라는 ‘논리의 옷’을 입지 않으면 시행착오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19대 국회의 규제 행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근원적 오류 : 투표로 해결할 일 vs 시장을 통해 해결할 일 

현상 뒤에는 본질이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실패에는 ‘근원적 오류’(mother fallacy)가 있기 마련이다. 공공선택론(theory of public choice)을 창시한 뷰캐넌의 핵심적 메시지는 의사결정을 할 때 가급적이면 “투표에 의존하지 말라”는 것이다. 투표를 위한 의사결정을 최소화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모든 것을 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규제개혁 실패는 ‘투표로 결정할 일’과 ‘시장을 통해 결정할 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투표를 통한 의사결정은 ‘의사결정비용’을 요한다. 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사전에 정해진 동의율을 얻어야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시간비용’(time cost)을 지불해야 한다. 또 다수결로 ‘사회적 의제’를 정하면 소수의견은 자신의 의사에 반(反)해서 다수의견을 쫓아야 한다. 내키지 않음에도 투표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소수 투표자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만을 반영하는 ‘외부비용’(external cost)을 지불해야 한다. 각자의 선호가 다른 경우 합의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투표의 의사결정 비용은 급격히 올라갈 수밖에 없다. 

시장을 통해 해결할 문제를 투표(입법)를 통해 해결하려 한 것이 우리 국회의 고질적인 문제다. 시장은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의 실현을 도와 줄 뿐, 어떤 의도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시장에서는 서로 다른 가치관, 지식, 선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로운 협상과 계약을 통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시장 참가자들은 ‘시장과정’(market process)을 통해 각자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를 최선의 방법으로 추구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조화로운 손’은 이렇게 작동한다. 시장을 통한 자원 배분은 시장 참가자 모두를 승자로 만든다. 이른바 윈-윈(win-win)이 가능하다. 

반면 투표를 통한 문제 해결은 다수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분에 포획되기 싶다. 투표를 통한 문제 해결, 즉 입법(立法)은 ‘보이는 선(善)한 손’을 표방하는 규제로 구체화된다. 규제는 인위적 질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국가개입주의와 설계주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설계주의는 ‘지식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는 시장을 통하지 않고서도 개인의 이해를 조정할 수 있는 계산능력을 가진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의 개입이 최대화 된 사회주의 체제가 소멸한 것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그러면 투표 결과로서의, 또는 집단지성으로서의 사회적 합의는 신뢰할 수 있는가? 생각과 이익이 충돌하는 인간 밖에 초월적 절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적 합의도 이런저런 이해관계의 이끌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중과 정치인은 ‘광범위한 이익’ 대신 ‘집중된 손실’에 이끌린다. 아주 공평한 사람들조차 공급증가와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퍼진 이익보다 집중된 손실을 더 잘 본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거간꾼 역할을 수행한다. 집중된 손실은 이해관계자의 조직화를 가져와 각종 규제로 구체화된다. 이처럼 규제는 특정집단의 이익을 추구할 개연성이 높다. 

공공성: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해주는 요술지팡이 

‘글로벌 인사이트’(Global Insight)가 2005년에 분석한 월마트 출점 효과는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지는 “월마트 출점이 저소득층에게 가장 큰 혜택을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2004년 기준으로 하위 20% 소득계층의 소비 절약액은 553달러로 세전소득(9168달러)의 6%이며, 최상위 20% 소득계층의 절약액은 2595달러로 세전소득(13만2158달러)의 2%라는 것이다. 소비자가 싼 가격에 좋은 품질의 소비재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소비자 후생’이 그만큼 증진됐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와 유수한 연구를 수행했다면 그는 ‘공공의 적(敵)’이 됐을 것이다. 대형 마트를 보는 한국과 미국의 눈은 극과 극이다. 미국은 ‘소비자 후생 증진’에, 우리는 골목상권 ‘피해’에 방점을 찍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15년 11월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 휴일을 지정한 지방자치단체의 처분이 적법하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판결 요지는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 등 영업규제 처분으로 달성될 수 있는 공익”은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공익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공익을 입에 올리는 많은 사람들은 실제 공익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서로 경합하는 이익을 추구할 뿐이다. 그들은 규제당국 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정통하며 그 이익에 근거해 행동한다. 따라서 비(非)인격적 시장 말고 그 누구도 경합하는 이익의 균형을 잡아 줄 수는 없다. 

공익은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 식으로 밖에 정의될 수 없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판결)이 정당화되려면 누군가 법을 위배해 유통질서를 어지럽혔음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대형마트가 위법을 저질렀다는 정황적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규제는 ‘재량적 처분’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유리하게 하고 다른 누군가를 불리하게 함으로써” 건전한 유통질서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라면 이는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이다. 공공성은 그동안 정치권의 재량적 시장개입을 합리화시키는 방패로 기능해 왔다. 

변화는 그것이 좋은 의미의 변화라 하더라도 반드시 어떤 사람에게는 불이익을 초래하게 된다. 누구에게는 순풍이고 다른 누구에겐 역풍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모든 산업이 동시에 확장될 수는 없다.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오래된 사업들이 축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고속도로의 하이패스 차선은 검표원을 해고 시킨다. 하지만 검표원 고용유지법을 발의한 국회의원은 아무도 없다. 정치적 소득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의 영업규제로 “소비자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이는 착각이다. 골목상권의 본질적 문제는 ‘과밀과 밀집’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골목으로 뛰어든 것이 문제다. 골목상권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영업 이외의 다른 취업기회를 제공해줘야 한다. 300명이 들어가 장사하기 딱 좋은 골목에 500명을 불러들이고, 국회는 ‘을(乙)의 눈물’을 닦아줬다고 생색을 낸다. 골목상권은 오히려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 19대 국회는 기업들의 활동을 옭죄는 반기업적 법률들을 양산했다. 사진은 지난 19대 국회에서 기업 규제 정책 양산에 앞장섰던 더불어민주당 내 乙(을)지로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20대 총선 출마를 공동 발표하는 모습.

경제민주화: 규제를 통한 경제의 정치화 

19대 국회는 경제민주화에 취했다. ‘단가 인하, 부당한 발주 취소, 부당 반품’ 등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가해행위로 그 자체를 숨기거나 은폐할 개연성”이 높을 때만 정당화된다. 

일반적으로 하도급 거래는 그 자체가 은폐되지 않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부당한 납품가격 인하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무리하게 적용하면 하도급 거래 자체가 축소된다. 대기업이 필요 부품을 자체 생산하거나, 상대적으로 분쟁 가능성이 적은 해외 조달을 선택할 수 있다. 

협력업체가 대기업과 협력관계를 맺는 이유는 서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안정적으로 납품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면 오늘 손해를 감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적(私的)자치 영역에 규제가 들어갈 이유는 없다. 부당한 발주 취소, 부당 반품은 마땅히 근절돼야 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예컨대 표준계약서 작성 등을 의무화하고, 이에 기초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이 해결할 수 있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는 최악의 규제다. 자율협약의 형식을 취해 규제가 아닌 것으로 가장한 것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동반성장위원회는 “대·중·소기업 간 합리적인 역할 분담을 이끄는 제도”라는 논리를 펴지만, 어떤 명분을 붙여도 특수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경쟁을 제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업종이 중소기업에 적합한지 알 수 없다. 진정 중소기업 적합업종이 존재한다면, 정부가 개입하지 않더라고 대기업은 망해서 시장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이유는 없다. 적합업종제도는 다음의 3가지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의 이익에 부합되는가, 경쟁촉진을 통해 산업경쟁력을 제고시켰는가, 보편적 무역규범과의 충돌 가능성은 없는가”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적합업종제도는 폐지돼야 한다. 

‘합법적 약탈’ 수단으로서의 규제 

사회, 인격, 재산은 ‘법’ 이전에 존재했다. 인격이 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재산도 법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재산권은 인간이 자연에 노동을 더해 창조한 가치에 대한 권리로서 자연권이다.

따라서 재산과 노동의 자연적 질서에 인위적 수정을 가해 이를 균등하게 조직하는 것을 입법자의 책임으로 여기게 되면 ‘설계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공공선과 형평성 제고라는 명분은 입법자에게 무한대의 활동 공간을 제공한다. 경제민주화법이 그런 사례다. 

인간은 가능하면 고통스러운 노동을 피하고 타인의 노동의 결과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약탈이 노동보다 쉬우면 누구나 약탈을 택할 것이다. 법이 규제, 보호, 장려 등의 명분으로 ‘누군가의 것을 덜어내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면’ 입법을 요구하지 않을 집단은 없을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자 프레데릭 바스티아는 일찍이 법이나 정치의 도움으로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합법적 약탈’로 명명했다. 합법적 약탈은 다양한 형태로 자행된다. 산업보호, 장려금, 보조금, 누진소득세, 무상복지, 이윤에 대한 권리, 임금권, 노동권, 생존권, 무이자 대출 등이 그 수단이다. 그러면 시장은 고사될 수밖에 없다. 

국가를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무제한의 국고(國庫)와 무오류의 조언을 나눠줄 수 있다면 그런 국가를 원하지 않을 리 없다. 민간 부문이 아닌 국가가 박애주의의 실천자가 된다면 모두들 입법을 통해 특혜를 받으려 할 것이다. 

국가로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추가하지 않고서 그런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한 손으로 무엇인가를 빼앗아 다른 손으로 나눠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국고는 약탈의 대상이 되고 국가는 ‘만인이 만인을 착취하는 거대한 허구’로 전락한다. 그래서 법치가 필요한 것이다. 법은 인격과 자유, 재산권을 보장하고 모든 것이 정의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개인적 완력을 집단적 완력으로 대체한 것이다. 

좋은 세금의 조건으로 ‘정치적 책임’을 언급한 경제학자는 스티글리츠다. 누가 세금을 부담하고 그 세금의 사용으로 인한 혜택의 귀속이 명백하면 그 세금을 제안한 정치집단에 대한 유권자들의 평가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오히려 정치인들은 부담과 혜택의 귀속을 분명하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형평성과 공동선’ 등의 수사(修辭)는 세금의 정치적 책임을 희석시킨다. 좋은 세금의 조건은 편익과세, 즉  편익을 보는 쪽이 세금 부담을 지는 원칙이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내가 세금을 부담했지만 이익을 전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자체는 으레 중앙 정부의 지원을 요구한다. 특정 지역의 사업을 수행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의 일정비율을 그 지역에 부담시키는 대응(matching) 원칙을 준수하면 낭비적 지출을 줄일 수 있다. 

맺는 말 

규제는 공익을 목적으로 합법적 수단을 통해 민간의 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는 ‘중립적 권력실체’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규제는 사적 자치보다 국가 개입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발전국가모델의 유산이다. 하지만 ‘중립적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성은 표방된 명분일 뿐 실제로는 자기 이익이 우선이다. 

황수연 교수의 논리는 이렇다. 한·미 FTA에 반대한 정당은 자유무역에 대한 이해(理解)가 부족해서 일까?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정당은 다른 국가들 예컨대 칠레, 유럽, 중국 등과의 FTA에 대해서는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 정당의 한·미 FTA 반대는 이해(理解)의 문제라기보다는 타산적인 ‘이해(利害)의 문제’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이 싫은 것이다. 북한인권법에 대한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파적 이익에 함몰된 정치세력이 ‘법’을 빙자해 찍어낸 것이 규제다. 

규제개혁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규제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규제비용 총량제, 규제 일몰제, 규제 등록제, 규제 신문고, 규제심사청구제 등 나올 수 있는 정책 아이디어는 이미 다 나왔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굵은 규제 하나를 만들고 곁가지 규제 2개를 줄이면서 규제총량이 줄었다고 스스로 자화자찬한 것이 정치권이다. 

불필요한 규제를 만들지 않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그러려면 규제의 본질을 좁게 정의해야 한다. “시장질서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재산권을 보호하고 불법행위가 발생하면 원인을 제공한 쪽에서 원상회복 책임을 지도록” 강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규제다. 규제개혁이 성공하려면 “시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표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타성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규제를 좁게 정의하면 “모든 규제를 다 없애자는 것이냐”라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선주(船主)가 돈을 벌 욕심으로 적정 인원 승선시키는 것을 규제하지 말자는 것이냐는 항의도 그 일환이다. 규제의 상당부분은 기준(standard)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안전기준, 시설기준이 맞는 용법이며 안전규제, 시설규제는 틀린 용법이다. 

규제가 소비자 선택을 근본적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값이 싸지만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 안전하지 않지만 값이 싼 상품,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차별이 존재하는 일자리를 악(惡)으로 간주하고 이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 운전자 보호를 명분으로 에어백이 10개 달린 고가의 경차 제작을 의무화해서는 안 된다. 시장은 다양한 기회와 선택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규제는 그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헌법 제 119조 2항은 경제민주화론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조항이다. 2항은 다음과 같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국회에게 무소불위의 입법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바보들은 119조 2항에 기초해 시장권력을 쥔 재벌을 손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의 권력은 상수(常數)가 아니다. 소비자가 특정기업의 생산품을 외면하는 순간, 그리고 투자자가 그 기업의 전망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보내는 순간 그 기업은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졸면’ 망하는 게 기업이다. 시장권력은 규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가공의 개념이다. 견제되어야 할 것은 시장권력이 아닌 정치권력이다. 혹여 헌법 119조 2항을 규제권을 정당화 시키는 근거로 인식한다면 안전장치를 둘 수밖에 없다. 운전면허, 의사면허처럼 의원의 자격을 묻는 것이다. 의원 출마자들에게 의원자격 시험을 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규제는 곁가지여야 한다. 규제가 ‘자유의 본질’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헌법 37조를 늘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헌법 37조는 다음과 같다. 

“헌법 37조 ①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한국 경제가 활력을 잃고 저성장이 구조화된 데는 정서법, 떼법, 특수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는 각종 처분법 등이 횡행하면서 근로 동기와 투자유인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규제개혁은 한국 경제를 미래를 좌우할 시금석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연방판사 브랜다이스의 경귀는 지금도 신선하다. 

“정부가 선한 뜻에서 일을 벌일 때 가장 큰 경계심을 갖고 자유를 지켜야 한다. 자유에 대한 더 큰 위험은 열정적 인간, 좋은 뜻은 가졌으나 그들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은밀한 침해 속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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