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을 인권에 관심이 많은 미국 미네소타 주로 난민 정착시키기 위한 캠페인 벌이는 미네소타의 여장부
이근미 작가·미래한국 편집위원
지난해 10월 19일 미국 미네소타주립대 험프리 대강당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북한 난민들의 미국 내 정착’이라는 제하의 심포지엄에서 ‘미국인들에게 탈북자들의 실상 알리기,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중국 고발, 탈북자들의 미국 내 정착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 마련하기’ 등 세 가지 주제를 논의했다.
한국 교민도 많지 않고, 더욱이 탈북자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미네소타 주는 10월 19일을 ‘북한 난민 인권의 날’로 정해 이 모임을 후원했다.
이 심포지엄은 사재를 털어 ‘북한 난민 자유수호를 위한 미국 미네소타 위원회’(Free For North Korean Refugees MN·FNKR)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한 김현덕(미국명 Hyon Kim) 대표의 주관으로 열렸다.
▲ 탈북자들을 환경이 좋은 미국 미네소타주에 난민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김현덕 대표는 “미네소타주에 소말리아, 라오스난민 22만여명이 있는데 탈북자는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
오전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진행된 심포지엄에 한미 양국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고 연사들이 열띤 토론을 진행했다. 심포지엄에는 미 국무부 차관을 지낸 에릭 슈워츠(현 오바마 대통령 인권특사, 미네소타주립대 험프리 행정대학원장), 마크 데이튼 주지사, 샌디 패퍼스 상원의원 등 미네소타 주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의견을 개진했다.
한국에서는 김진호 남북문화교류협력위원회 위원장, 김창수 코리아재단 연구원장, 이상훈 동아방송예술대학 교수(영화감독), 주찬양(서울거주 탈북여성) 등이 참가하여 남북한의 상황과 탈북자들의 실상을 전했다.
올 10월에 열릴 예정인 제2회 심포지엄 준비 차 한국을 방문한 김현덕 대표는 미네소타에 정착한 난민 숫자부터 소개했다.
“미네소타 주에는 소말리아 난민 8만여 명과 라오스 몽족 14만여 명이 살고 있어요. 한국인 입양아도 2만8000여 명이나 되죠. 그런데 탈북자가 단 한 명도 없어요. 미국 전역에 살고 있는 탈북자를 다 합쳐봐야 190명 정도입니다. 미국은 난민을 잘 보살피는 나라인데 그동안 탈북자들에게 소홀했습니다.”
인권에 관심 많은 미네소타 주
미 국무부의 난민재정착 프로그램(USRAP)에 따르면 미국은 연간 7만여 명의 난민을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내 북한 난민 숫자가 적은 것은 중국이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북한 주민이 중국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힘들고, 태국이나 라오스 등지로 탈출해도 미국으로 오기까지 2년여를 기다려야 한다. 중국만 벗어나면 한국에 쉽게 올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한국행을 선택한다.
“2014년에 한국에 와서 탈북자들을 많이 만났어요. 고생하며 사는 분들이 많더군요. 탈북자가 한국에 오면 대한민국 국적을 갖기 때문에 미국으로 오기가 쉽지 않아요.”
김현덕 대표는 미국의 여러 주 중에서도 특히 미네소타 주가 인권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미네소타에 있는 미국 교회 150개가 연방정부 국무부의 지원을 받아 난민들을 돕고 있어요. 난민들이 오면 집도 제공하고 영어공부도 시켜주고 지원을 많이 해요. 난민들이 회사에도 들어가고 농사도 지으면서 교육을 잘 시켜 변호사, 엔지니어, 의사, 국회의원, 시의원이 된 자녀가 많아요. 탈북자들도 이런 지원을 받아야지요.”
김 대표는 미네소타주립대 출신으로 1994년 동양인 최초로 미네소타주립대 평의원에 당선됐다. 미네소타 주 상하 의원이 12명의 평의원을 뽑는데, 경쟁률이 43 대 1이었다. 평의원은 총장 해임권을 비롯하여 실질적인 살림을 운영하는 힘 있는 자리다.
그동안 주지사 자문위원, YWCA 연방 상임이사, 미네소타 여성경제인협회 이사, 주지사 자문위원, 무역협회 상임이사 등을 거친 그녀는 미국 주류사회와 친분이 두텁다. 현재 엔지니어링 회사 ‘미네소타 베스트’를 맡고 있는 여성경영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인맥을 탈북자 지원에 활용하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김 대표가 나서면서 미네소타 주의 주요 미국인들이 탈북자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몇 년 전까지 탈북자들의 실상에 대해 잘 몰랐다. 사업으로 바쁜 데다 한국인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2014년 어느 날 한 종편에서 방영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하 이만갑)라는 프로그램에서 탈북자들의 실상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탈북자들이 출연하여 북한 실상을 알리는 이만갑은 CNN, NBC, BBC에서도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프로그램이에요. 그 방송을 통해 북한을 탈출한 분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한국에 와서 이만갑을 만든 이상훈 감독을 만나 탈북자들의 실상을 자세히 알게 되었죠. 미국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잘 사는지, 탈북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런 거 잘 몰라요. 1회 심포지엄 때 비로소 북한 실상을 알았다는 분들이 많았어요.”
월북한 ‘빨갱이’ 아버지
김 대표는 한국을 다녀간 뒤 사재를 털어 비영리단체 FNKR을 설립했다. 1970년에 도미하여 45년간 미국에서 생활한 그녀가 탈북자들 얘기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1946년생이라는 나이도 큰 몫을 했다.
그녀는 한국을 거의 잊고 살았다. 경성제대를 나와 삼성물산 매니저로 일했던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가족을 데리고 월북했다. 그녀는 외할머니 따라 충남 부여의 외가에 가 있어서 남쪽에 홀로 남았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이모에게 얹혀살다 무학여고 1학년 때 쫓겨났다.
여군에 들어가 복무하면서 학교는 야간을 다녔다. 1965년에 미8군 헌병대로 옮겼고, 그때 만난 미군과 결혼하여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정착하자마자 이모를 초청하여 95세로 세상 떠날 때까지 모셨다.
미국에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빨갱이’가 되어 월북한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다. 그녀는 10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한 후 32세라는 늦깎이로 미네소타주립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주 30시간 씩 일하면서 아들 둘을 키우느라 까무러치기 일쑤였다. 졸업 후 증권사에서 일하다가 무역회사를 설립해 한국녹십자제약 약품을 주로 수입했다. 2003년 건설회사를 설립해 경영하다가 2008년에 엔지니어링회사로 변신했다.
“미국은 소수민과 여성에게 혜택이 많아요. 공무원에게 5달러 넘는 식사를 대접할 수 없게 규제하니 사업하기 좋은 환경이죠. 세계적인 토목 엔지니어링 회사 AECOM과 함께 해 우리 회사는 탄탄합니다. 아들들과 열심히 일하고 있죠.”
▲ ‘북한 난민 자유수호를 위한 미국 미네소타위원회(FNKR)’의 탈북자 구호 활동을 홍보하는 티셔츠를 입고 있는 미국 여성. |
아버지에게 따지기 위해 북한 방문
그녀는 1990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가족들을 만났다.
“아버지한테 왜 빨갱이가 되어 집안을 풍비박산 냈는지, 왜 나를 외국에서 외롭게 살게 했는지 따지려고 갔습니다. 친척 중에서도 아버지 영향으로 빨갱이가 됐다가 죽거나 월북한 사람들이 있어 자랄 때 친척들에게 눈총을 많이 받았거든요. 함흥에 가서 어머니와 오빠, 남동생들, 조카들을 만났는데, 어렵게 살지만 다복해보이더군요. 박헌영 파였던 아버지는 1956년경에 숙청되어 결국 따지지 못했죠. 숭실여전 출신인 어머니는 학교가 있던 평양에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하더군요.”
북한에 다녀온 후 더 이상 돈이나 물건을 보내지 않았고 이후 가족들도 만나지 못했다. 북한 쪽에서 돈을 보내라고 압박 했지만 과연 그 돈이 가족들에게 전해질지 의문이 들었고,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가족들과 정이 없었기 때문이란다.
70세가 가까워오면서 가족들 생각이 났고, 탈북자를 돕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한국에 와서 탈북자들을 많이 만났다. 한국에 가면 탈북자들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대화를 나눴다.
“제가 이민생활 45년을 해봤으니 그분들 심정을 알죠. 힘들게 북한을 탈출하여 죽을 고생 수없이 겪은 뒤 한국에 왔지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으니 물 위에 떠 있는 배처럼 허망하죠. 미국에서 외롭게 살았던 기억이 나서 탈북자들과 붙잡고 많이 울었어요.”
예전에 혼혈아를 미국으로 보내는 일에 동참한 적이 있는 김 대표는 이번에도 잘 될 거라고 낙관했다.
“1983년 대학 다닐 때 미국 TV에서 한국 기지촌에 대한 뉴스가 나왔어요. 그걸 보고 당시 유명한 풋볼선수와 그 애인이랑 셋이 한국에 왔어요. 전국을 다니며 혼혈아를 만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어요. 미국에 가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며 ‘한국은 부계사회다. 아버지 없는 혼혈아는 홀대받고 여성들은 힘들게 산다. 미국이 뿌린 씨앗이니 미국이 거둬야 한다’고 호소했어요. 레이건 대통령 때 법이 바뀌어서 누가 스폰서만 하면 성인들까지 다 데리고 올 수 있게 됐지요.”
그녀는 최근 미네소타 인터내셔널 센터(MIC) 명예회장을 맡았다. 65년 된 이 모임의 회원은 미네소타 주의 상류사회 사람들이다. MIC는 매년 한 나라를 정해 홍보하는데 2015년 독일에 이어 올해는 대한민국이 선정되었다. 경제 교류는 물론 필름 페스티벌 같은 문화 교류도 이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2월에 안호영 주미 대사가 미네소타 주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녀는 앞으로 탈북자 구출에 지속적으로 나설 예정이라고 했다.
“1회 심포지엄이 끝나고 많은 분들을 만났어요. 수잔 솔티를 비롯해 북한인권 운동하는 사람들과 다 연결이 되었어요. 1회 때 미국 미디어에 보도가 많이 되어 탈북자들의 실상을 미국 주류사회에 많이 알린 게 소득이고 보람이죠.”
올 10월에 열릴 2회 심포지엄에서는 ‘탈북 난민들을 어떻게 미국으로 데려 올 것인가’를 심도 깊게 논의할 예정이다. 연사로 이정훈 인권대사(미래한국 회장)와 김성민 대표(자유북한방송)를 초청했고 미국 인권대사도 모실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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