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생(生)의 법칙이다.
그렇다고 ‘그렇다’와 ‘아니다’가 각각 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그렇다’ 그것 홀로는 자기 기만적인 신념의 조언(助言)이어서, 조만간 회색의 세 가지 모습, 즉 허무와 죄책과 죽음의 ‘아니다’에 의해서 뒤흔들려 버릴 것이다.
‘아니다’ 그것 홀로도 그 자신에 대한 감춰진 ‘그렇다’가 그것의 자기 격리 속에 또는 사랑과 교제의 긍정에 대한 반항 속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렇다’와 ‘아니다’는 모든 진리의 법칙이다. ‘그렇다’ 그것 홀로는 자기의 제한적인 진리를 궁극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만이어서, 그 밑바탕에 얼마나 많은 ‘아니다’가 감춰져 있는가를 그의 광신적인 자기 긍정이 드러내고 있다.
‘아니다’ 그것 홀로도 어떤 궁극적인 진리라도 다 부정하는 체념이다. 그러나 무한히 반복되는 ‘아니다’ 뒤에는 얼마나 강한 자신에로 ‘그렇다’가 가로놓여 있는가는 그가 진리의 한 마디의 파고드는 힘에 대해서 저 홀로 좋아하는 핀잔으로 밖에는 맞서내지 못한다는 사실 속에 역력히 나타나 있다.
진리와 생(生)은 ‘그렇다’와 ‘아니다’를 결합하고 초월한다.
다만 ‘그렇다’와 ‘아니다’ 사이의 무한한 긴장을 받아들이는 용기만이 풍성한 생명과 궁극적인 진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과 진리의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 ‘그렇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그렇다’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위대하고 보편적이며 용감한 ‘그렇다’라 할지라도 그 상대로서의 ‘아니다’를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도 철학도 궁극적인 진리라 말할 수 없다.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 다른 신학이나 다른 철학에 의해 반격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와 ‘아니다’가 아니라 ‘그렇다’만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실재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이다.
그리스도 역시 처음에는 다른 사람처럼 ‘아니다’ 밑에 서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다. 예수님의 유한한 인성은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아니다’ 밑에 서신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예수님의 모든 약속이 구현되고 그 안에서 ‘그렇다’와 ‘아니다’를 초월한 생과 진리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다.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멘’한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사람은 그리스도이신 그 분 이외에 무엇에 대해서도 ‘아멘’이라 할 수 없다. 확증을 나타내는 문귀로서 궁극적인 확신의 표현이다.
죽음을 극복한 생명과 과오를 이겨낸 진리와 ‘그렇다’와 ‘아니다’를 초월한 ‘그렇다’ 이외에 궁극적으로 확실한 것은 없다. 그 확신은 역사적 보고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확립되었고 우리 영에 대해서 성령께서 보증해 주셨다.
진실한 사람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단순히 말을 한다. 세상의 진리 문제에서 중도는 없다. 좌파 정권 10년 후 세워진 새 정부에 대해 국민은 많은 기대를 했지만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좌도 우도 아닌 중도파라고 스스로 공언함으로 국민을 실망시켰다.
우리 사회에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옳은 것은 옳다 하고 틀린 것은 틀리다 할 수 있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한 진리의 세계에서 분명한 가치 판단이 이뤄지기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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