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의 원인, 자립정신 부족으로 인한 자업자득(自業自得)
러일전쟁의 원인, 자립정신 부족으로 인한 자업자득(自業自得)
  • 미래한국
  • 승인 2015.09.11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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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독립정신>을 통해 바라 본 이승만의 러일전쟁

“중립이란 그것을 유지할 힘이 있을 때 가능한 것. 조선은 그런 힘이 없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1875년생인 이승만은 만 29세로 감옥에 있었다. 이승만은 1899년 1월에 체포되어 1904년 8월까지 만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가 투옥된 이유는 매일신문과 제국신문 등을 통해 고종 황제의 보수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총대위원으로서 극렬한 반정부 데모를 조직, 선동했기 때문이다. 

▲ <독립정신>은 이승만 대통령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한성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집필한 역사서이며 한국인 최초의 외교사 저술서이다.

이승만이 직접적으로 투옥된 계기는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의화군을 신왕(新王)으로 옹립하여 일본에 망명중인 개혁 정치인 박영효를 영입하여 새로운 내각을 조직, 개혁정치를 시도하려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는 탈옥 미수혐의가 추가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감옥에 있는 동안 이승만은 성경을 자주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고, 도서관을 만들어 동료 죄수들에 대한 교육·교화사업을 병행했다. 1903년 초 영어교육의 대중적 파급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승만은 영한사전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지만 작업 도중 러일전쟁이 터졌다. 

이승만은 한가하게 사전 편찬에 매달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독립정신>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저술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탈고했다. 이는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는 것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그가 옥중에서 꾸준히 제국신문에 투고했던 논설이었다. 이승만의 처녀작 <독립정신>은 비밀리에 감옥 밖으로 반출되어 1910년 3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국문으로 출간되었다. 

이승만의 혐로(嫌露)-공로(恐露)사상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러시아와 관련된 글은 모두 10편(29·30·39·41·43·44·45·46·48·49편)으로 적은 비중이 아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중국(청), 러시아, 일본 3국에 대한 이승만의 인식이 어떠했는가 하는 점이다.

청은 미련하고 우매한 곰이었으며, 러시아는 처음부터 야욕의 나라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굶주린 호랑이로 보았으며, 일본은 동양 3국 중에서 가장 앞서가면서 서양 문명을 배우고 흉내 낸 원숭이로 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본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우호적으로 바라보다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승만은 서양 열강들의 대외 자료를 검토하면서 처음부터 러시아를 경계했다. 이승만의 혐로(嫌露)-공로(恐露)사상(Rossophobia)은 19세기 후반기에 서유럽 외교관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한 것이다.

이승만의 대(對)러시아 인식은 피터 대제의 유언장을 입수하면서 시작된다. 그 유언장은 1857년 주(駐)러 프랑스 공사가 입수했다가 소실(燒失)했는데, 미국이 1896년에 다시 입수하여 공개한 것이다. 이승만의 혐로-공로사상은 <독립정신>의 후반부 도처에 표출되어 있으며, 이러한 그의 대러 인식은 나중에 그의 반공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이승만에게 러시아는 허기에 주린 호랑이였다. 그는 근대화를 추구했던 피터 대제 이후 러시아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러시아 문화에서 야만적 요소를 경계하고 동진정책을 추진한 동기가 부동항 획득에 있음을 간파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서방에서 막은 물이 동양으로 넘치게 되었으니, 위급하다”고 진단한다. 

“아직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깜깜한 밤중에 있던 아시아는 허기에 주린 호랑이 같은 러시아에게 먹음직한 고깃덩어리로 보였다.”(212. 29편, 러시아의 음흉한 마수(魔手)에서). 

그런데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러시아의 야욕을 제대로 경계하지 못하고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관리들은 청나라가 러시아에 대항하지 못하는데, 어찌 우리가 러시아에 대항하겠느냐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원인을 일본의 침략정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 러시아가 요동반도를 침범한 것에 있다고 봤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은화 2억 냥)과 요동지방을 차지했는데,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협력하여 일본에게 요동을 다시 청에 반환하라고 요구했고(3국 간섭), 일본이 이에 굴복했다.

청나라는 러시아에 고맙게 생각하여 요동을 통과하는 철도 건설을 허락하니 철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를 지나 요동반도 끝에 있는 여순까지 이르러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었다. 

▲ 영국의 부추김으로 러시아와 맞서는 일본을 풍자한 그림. 영국이 “네가 뿔을 잡아당기면 내가 꼬리를 잡을게”라고 외치고 있다. (출처 :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 지식산업사)

만주 주둔 군대 철수하지 않은 러시아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러시아는 철도 보호 명분으로 만주에 군대를 주둔한 것이다. 의화단의 난으로 8개국 군대(러시아, 일본, 독일, 영국,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가 북경을 점령하자 그 이후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후 각국 군대는 물러갔지만, 유독 러시아 군대는 철병을 거절하고 만주 전체를 점령했다. 러시아는 청과의 협약에 따라 만주지방을 관통하여 여순에 이르는 철도를 수비할 군대를 주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러시아는 만주뿐만이 아니라 한반도 이북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제로 러시아는 조선의 서북지방도 침범했다.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서북 해변에 벌목 구실을 내세워 수백 명의 군인들을 민간 복장으로 들여보내기도 했다. 1903년 5월에는 용암포에 상륙하여 포대를 구축하고, 압록강변에 군대 주둔지를 설치하고, 마을에 들어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승만은 일본의 대응책과 전쟁 준비를 러시아에 대한 반발로 이해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반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단독 전쟁으로 일본을 쉽게 이길 것으로 오판했다. 러시아의 오만한 태도는 갈수록 심해졌는데, 39도선 대동강 남북으로 한 한반도에 대한 분할 의사까지 내비친다. 

조선 정부는 전쟁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러시아 공사관만 바라볼 뿐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고종의 지나치게 러시아에 쏠린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나라도 중립을 선언했으나, 이미 은밀히 러시아를 끌어들였으니 어떻게 중립을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개탄했지만 그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승만은 민비 살해사건 이후의 한반도 정황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1895년 민비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사무라이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다음 해, 고종이 그의 왕실 식구들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친일파는 모두 제거되고 친러파가 득세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고, 부산 절영도에 러시아 군함들이 쓸 석탄 보관시설을 만들고, 러시아 장교들과 고문관들을 초빙하여 조선의 재정과 군사업무를 맡기게 되었다. 

조선 조정은 그 대가로 러시아에 막대한 이권을 넘겼다. 조선 내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일본은 조선에 점차 무리한 요구를 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조선은 러시아에 대한 의존이 더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조선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불행하게도 백성들은 황실이 무엇을 양보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승만은 “관리들은 그들의 안위와 이익에만 급급하여 비밀 협상에 의해 우리 영토와 권리를 러시아에 넘겨줬던 것이다”라고 통탄한다.

러시아인들의 행동으로 판단한 바, “용암포, 북부지방의 섬들과 해안지방의 벌목권, 러시아에 근접한 국경도시 경흥의 전보선 부설권” 등을 획득했다. 서구 열강도 덩달아 러시아에 준하는 이권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중립이란 그것을 유지할 힘이 있을 때 가능” 

이승만은 세계 여론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러일전쟁 이전의 국제정세에서 날로 욱일승천하는 러시아의 오만함을 견제하기 위해, 동양에서 그 세력을 막으려면 일본의 힘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세계 여론이 일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승만은 1902년에 체결된 영일동맹이 러시아의 팽창을 막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국과 일본은 청과 조선에게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누누이 권유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이승만이 제시한 해결책은 “(특정 지역에 대해 특정 나라에) 이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통상지로 개방하는 것”이었으나, 러시아가 암암리에 압력을 넣어 그런 선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가장 불만을 가진 세력은 일본이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원인에서 러시아가 더 큰 책임이 있다고 간주했다. “당시 일본은 만한(滿韓)문제에서 협상을 하려고 했었지만, 러시아는 협상에는 관심이 없고 군사력만 키웠다”고 지적한다. 러일전쟁 발발 후 이승만은 자국(自國) 외교관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들어 온 각국 군대가 벌인 추악한 행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각국 군인들이 서울에 들어와 돌아다니며 온갖 행패를 저질렀다. 특히 러시아 군인들의 만행이 심하여 민가에 들어가 부녀자들 겁탈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장옷 쓴 여인을 몇 사람이 붙들고 억지로 입 맞추기도 하고, 심지어 죽동 네거리에서는 러시아 군인 네 명이 한 여인을 겁탈하려 하자 사람들이 이를 말리려다가 그들이 칼을 휘두르자 달아났다.”

전쟁 발발 직후, 국제 정세에 대한 국민들의 무지와 다가오는 전쟁 위기에 대한 고종 정부의 무책과 맹목적인 러시아에 대한 외세 의존성을 개탄한다. 

“백성들이 무지하면 무슨 변란이 다가오는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만 안전하면 모든 것이 태평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외국 군함이 어디로 오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가 외국 군인들의 행태가 심해지자 비로소 전쟁이 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러시아를 믿는 바 있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위 사람들이 걱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백성들도 곧 안정을 되찾았다. 이 때 정부에서 비밀리에 3천명의 러시아 군대의 파병을 요청한 바, 마침 일본 해군이 러시아에 보내는 문서를 탈취하여 그 내용이 각국 신문에 보도되어 망신을 샀고 사람들은 정부의 한심한 행동에 분통을 터트렸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은 전시(戰時) 중립을 외쳤지만, 일본 공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공사는 “중립이란 그것을 유지할 힘이 있을 때 가능한데 조선은 그런 힘이 없다”고 주장했다. 서울은 하루 만에 일본군에 의해 무단 점령되었다. 
왜 한국은 이토록 어려운 지경에 빠졌나? 러일전쟁 발발 당시 이승만이 내린 분석의 결론은 두 가지다. 

자립정신이 부족했기에… 

첫째, 러시아나 일본의 침략주의를 원망하기 이전에 자립정신이 부족했기에, 즉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말하면, 그들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고자 30년 가까이 청나라와 협상하며, 우리나라와 조약을 맺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를 해칠 의도가 없는 것은 분명했던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고 청나라를 끌어들여 결국은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했다.”

“러시아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동양과 서양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욕은 있었지만, 우리가 문제를 스스로 잘 해결해 나갈 때에는 감히 불순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그들에게 내정에 간섭할 기회를 주자 이것을 기화로 우리나라의 영토와 주권을 침해하려 하면서 지금의 전쟁으로 비화했다.” 

둘째, 주권 상실을 막을 마지막 기회는 고종의 아관파천(1896~97) 이후 개혁의 여부였다.  

“황제 폐하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신 후에 하지 못한 것이 있다. 당시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다투고 있는 시기였다. 우리는 우리 군대로 황실을 철저히 보호하고, 정부와 백성들이 합심 협력하여 국가의 기강을 높여 공정한 사람에게 나라 일을 맡기고, 탐욕과 포학함을 없애고, 법률을 정비하여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을 공평하게 대하여 국권을 온전히 보존하여 어느 나라도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셋째, “(특정 지역에 대해 특정 나라에) 이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접근할 수 있는 통상지로 개방하는 것”이 바람직했으나, 고종은 외교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나치게 러시아에 의존하여 내정간섭을 불러왔으며, 다른 열강들의 불평에 의해 또 다른 이권을 넘겨버리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넷째, 러일전쟁 이후 이승만은 장기 대책을 생각한다. 즉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오직 학문을 장려하고 정신교육에 힘써서 우리 백성들의 지식과 신의가 세계에 알려져, 모든 나라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 우리를 도와주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런 구국적 성찰과 대응책은 고종과 조정대신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한국의 주권과 독립을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최후의 방안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이 생각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미 조선의 운명을 일본에 위임하려는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오늘날처럼 정보와 통신이 발달되지 못했던 그 당시 불과 30세가 채 안된 약관의 나이에 이미 이승만은 국제정세에 해박한 지식을 축적해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가 영어에 능통하여 외국인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을 접촉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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