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미국으로, 러시아를 중국으로 바꾸면 19세기 말의 동북아와 유사한 국제정치 판도
● 미국이 전쟁에 지지도 않은 채 중국에 밀려 2위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
● 일본의 꿈은 미국 편을 들어 중국을 견제함으로써 아시아의 패자 자리 되찾는 것
● 미국은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에 일본군을 데려다 상륙작전 훈련을 시킬 정도
●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함께 한다는 安美經中은 국제정치의 기본 무시한 황당한 개념
100년 전과 너무 유사한 한반도 안보 상황
그렇다면 21세기 오늘의 대한민국은 잘하고 있는가?
우선 우리는 미국, 일본, 중국보다 더 탁월한 국가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이를 상쇄하기 위해 더 탁월한 전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흥망성쇠의 기로에 놓여 있다.
중국의 부상은 미국이 만들어 놓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충실하게 따르고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힘이 증강된 중국은 사사건건 미국의 패권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적 국제질서에 순응하던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려울 일이 거의 없었다.
중국이 미국의 지위에 도전하기 이전, 우리는 미국과는 안보, 중국과는 경제라는 최상의 거래를 하며 살 수 있었다. 그동안 미중 사이에서 한국은 님도 보고 뽕도 땄다.
그러나 그런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중국은 미국적 국제질서에 정치, 군사적으로 도전하기 시작했고, 미국 역시 중국의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나오고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은 아직도 안미경중(安美經中, 황당한 개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니 그냥 쓰기로 한다. 미국과는 안보, 중국과는 경제라는 뜻이라 한다)을 말하고 있다. 이미 그럴 수 없게 된 것이 현재의 국제 상황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공부 많이 했다는 사람들이 내놓은 한결같은 결론은 “우리의 국익에 의거해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식인답지 못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국익에 의거”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전략이다. 우리는 그런 전략이 없다.
미국과 중국이 사사건건 맞붙고 미국과의 찰떡 동맹을 국가 대전략 목표(정상국가로 그리고 강대국으로의 회귀)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삼은 일본이 치고 나오는 와중에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국익을 지키는 것인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최근 유명 신문의 논설에서 중국을 친구, 미국을 형제라고 지칭한 글을 읽고 놀랐다. 대한민국의 괜찮다는 지식인들의 국제정치 인식 수준에 기가 막혔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들의 국제정치 원칙이다.
미국이 우리의 형님이라면, 우리가 친구인 중국과 좀 친하게 놀겠다는데 그것이 형에게 조금 불편할지라도 형님이 그런 것을 뭐 그리 대수롭게 생각할까 라는 말이다. 그래서 형님인 미국이 원하는 사드(THAAD) 배치,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은 반대해도 되고, 친구인 중국이 하는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전승절 참석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오늘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 환경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세계의 패권국은 영국이었고, 이에 가장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나라는 러시아였다. 당시 신흥 강국 일본도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즉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제어해야 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은 그동안 고수했던 비동맹 고립정책을 포기하고, 1902년 일본과 동맹을 체결, 일본에게 아시아 지역에서의 러시아 제국 팽창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겼다.
세계 최강 영국의 지지를 확보한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격파함으로써 영국의 이익에 부응했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고 아시아의 패권국,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강대국이 되는 이익을 모두 챙겼다.
100년 전의 러시아를 중국으로 바꿔 읽고, 영국을 미국으로 바꿔 읽으면 오늘의 동북아가 나온다. “중국의 패권 도전이 두려운 미국은 일본의 힘을 활용해서 중국을 억제하고 일본은 이 기회를 활용해서 다시 아시아의 강자가 되려 한다. 영국이 고수했던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었듯이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전후(戰後)의 정책을 포기하고, 일본을 다시 무장시켰다.”
한국과 중국
한국은 100년 전 만큼 약하지는 않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의 협공을 받게 된 중국이 눈독 들이는 나라다. 우리나라 외무 장관이 미중 양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중국의 눈에 미국과의 동맹국 중 그 연결고리가 가장 약하다고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미국을 배반할 수 있는 나라라고 보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에게 미소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전쟁할 것을 약속한 사이’ 인데도 중국이 그렇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제정치의 처절한 작동원리에 둔감한 한국은 중국은 우리나라의 ‘안보 위협’이 결코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역사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왜 그렇게 역사를 다 까먹은 것일까? 일본과의 역사는 죽어도 잃어버릴 수 없다는 한국은 중국과의 역사는 왜 다 잃어버린 것인가?
조공을 바칠 때에도, 잘 지낼 때나 혹은 그렇지 않을 때나, 자신의 필요에 의해 우리나라를 언제라도 무력 침공한 나라(혹은 세력)는 오늘 중국의 영토에 자리 잡고 있었던 나라들 혹은 민족들이었다.
▲ 중국이 한국에 유화정책을 취하는 이유는 한국을 미국의 동맹으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전략적 포석이다. 한미동맹이 사라질 경우 한국은 구한말의 조선과 같은 고립무원 신세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
오늘 중국이 우리에게 잘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국으로부터 한국을 떼어내기 위해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한국이 미국과 친하면 친할수록 중국은 우리를 잘 대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의 이 말에 대해, 우리도 능력이 상당하다며 발끈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도 능력이 상당해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 정도로 강한 우리나라가 왜 북한에게는 쩔쩔매는가? 도발도 북한 마음대로, 대화도 북한 마음대로다. 북한은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 아무 때나 도발하고,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아무 때나 대화할 수 있는 나라다. 링 위에 선 두 권투 선수에 비유하자면 북한은 언제라도 불리할 때 자기 마음대로 공을 울릴 수 있는 선수다. 우리가 룰을 그렇게 만들어 줬다.
미국의 입장
향후 100년 사용할 수 있는 가스, 200년 사용할 수 있는 석유를 확보한 미국(조셉 나이 교수의 점잖은 분석이다. 그러나 미국 콜로라도, 유타, 와이오밍 주에 분포하고 있는 셰일 석유 부존량 만으로도 미국이 300년 이상 쓸 수 있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있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패권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러니까 일일이 이곳저곳 국제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조차 나오는 행복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21세기의 대세(大勢)가 중국이 아니라 미국일 것임이 확실한데 애써서 동맹정책을 추구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중국의 부상은, 중국 주변에 있는 대부분 나라들이 더 적극적으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 일본 호주 등 전통적인 동맹국들은 물론 미국을 몰아냈던 필리핀, 미국과 전쟁했던 베트남, 미국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도 등이 모두 미국을 끌어들이고 있다. 오라는 데가 많아서 불편할 지경이다. 중국과 패권 경쟁하는데 확실한 동맹군이 저절로 형성된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의 기본은 아시아 3대 강국인 중국, 일본, 인도 중 최소한 한 나라를 미국편에 묶어두면 된다는 것이다. 아시아 3대 강국 중 하나와 동맹을 유지하는 것은 아시아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이다. 지금 미국은 열렬한 일본, 확실하게 미국으로 기울고 있는 인도를 확보했고, 특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천군만마와 같은 베트남을 미국의 전략 멤버로 확보했다.
중국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2015년 미국은 거꾸로 자원의 확보, 창조적인 경제력, 막강한 군사력 등으로 21세가 미국의 세기임을 보장 받고 있는 데 더하여 중국 주변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미국을 편들고 있는 여유 있는 상황을 맞고 있다.
미국의 열정적인 동맹국이 되고 있는 인도+일본+베트남의 인구, 경제력, 군사력은 중국보다 더 강하다. 이처럼 여유 있는 상황에 도달한 미국은, 그동안 확실한 전략 요충으로 간주했던 한국이 미국을 떠나 완전한 중국편이 되더라도 별로 손해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국은 궁극적으로 중국편이 될 수 있다고 예측한 미국의 전략 보고서들이 여러 개 있었다. 미국이 한국에 러브콜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외무 장관도 있고 한미 양국을 형제라고 비유하는 한국인 식자도 있지만, 미국은 한국이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되는 상황을 맞았다. 혹시 미국은 한국을 동맹의 신의를 저버린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한국의 전략적 선택
지난 8월 14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패전(敗戰) 70주년 담화에서 일본의 군국주의가 아시아에 희망을 줬다고 미화해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을 본 인도인들은 아시아가 유럽을 이겼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인도의 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 영국 대신 일본을 공부해야 한다는 인도인들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은 이번 아베 담화를 적극 환영한다고 말했다.
21세기 현재 아시아의 국제정치 상황은 영국을 미국으로, 러시아를 중국으로 바꿔 읽어도 될 정도로 19세기 말의 아시아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패권국 미국에 도전하는 중국, 이를 위협으로 느끼는 미국, 같은 위협을 당하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을 도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싸움에 앞장서 주겠다는 일본, 일본에게 그 지위를 적극적으로 맡겨도 될 것이라 생각하는 미국 등은 모두 국가 대전략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 계획을 수립하느라 분주하다.
중국이 미국에게 도전하는 것, 미국이 이를 제어하려는 것, 그 틈을 이용해서 다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일본의 전략은 세계 전략의 역사에 교과서처럼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일의 21세기 버전일 뿐이다. 모두들 최고급 강대국이 되기 위해(중국),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미국), 또는 되찾기 위해(일본) 노력하는 중이다.
이처럼 강대국들이 자국의 대전략 목표를 설정해 놓고 경쟁하는 한복판에 놓여 있는 한국은 과연 전략적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중국, 일본, 미국의 행동은 국제정치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략도 그렇게 냉정한 것인가? 우리는 21세기 국제정치의 대세를 잘 읽고 있는가?
지난 20년 동안 국제정치의 대세는 중국의 부상, 미국의 몰락이었다. 지금 이런 견해는 급격히 꺾이고 있다.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되지 못할 것이고, 미국은 21세기가 끝날 무렵에도 패권국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급히 확산되고 있는 것이 새로운 대세다. 이런 것들을 정확히, 그리고 재빨리 인지하고 대처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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