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바로 지역재단이라는 유령이….”
‘시민사회의 대부’ 박원순 서울시장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서문의 내용(“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을 빗대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실제 이 ‘유령’을 우리 사회에서 가공할 만한 실체로 만들어냈다.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 등 수백, 수천억 원 규모의 자금을 운영하며 수백, 수천, 수만 명의 활동가들의 생활 터전을 제공해온 모금재단, 시민단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2013년 기준 아름다운재단의 자산 총계는 683억 원이고 당해 사업수익은 98억 원에 달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이러한 시민사회 내의 인적(人的), 재정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2011년 인기 절정이던 안철수 교수와 담판을 통해 인지도 5% 이하의 ‘무명’에서 일약 서울시장으로 당선됐고, 현재 유력한 야권 대권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서울시장을 하면서는 700여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마을공동체라는 풀뿌리 시민조직을 만들고 3000여 명의 마을 활동가들을 양성하겠다는 '생경한' (공적자금+시민조직) 계획을 펼치면서 시민사회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바야흐로 시민사회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이 시대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주도했던 인물이 지금 대한민국의 대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시민사회 활동을 제도권 내 정치활동의 기반으로 활용한 사례는 없지 않았으나 과정이나 수단으로서였지 그것이 시민혁명이라는 본질이 된 적은 없었다. 공산주의 혁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떤 특정 인물이 시민사회를 발판으로 정치적, 혁명적 성공을 이룰 수 있을지 여부는 본 논의의 예측 영역이나 주된 관심사항이 아니지만, 시사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고 ‘시민사회의 시대’는 10년 후 2025년 한반도에서 지금보다 한층 성숙된 발전기(期)를 구가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민사회의 전성기는 현대 사회의 모습이 지속되는 한 최소한 반세기 이상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시민사회나 시민단체들의 규모와 운영 형태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오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다가오는 미래를 ‘시민사회 2.0의 시대’라 명명해보기로 한다.
'지역재단'이라는 유령, 그리고 미래
시민사회(1.0) 시대의 도래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극히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현재 전 세계에서 계급사회와 독재가 종식됐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인권과 삶의 질, 분권과 자치, 경제성장과 환경 문제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 함께 참여 민주주의의 요구가 거세지면서 국민들은 종래의 정부의 독점적 권력과 권한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뿐 아니라 정책집행과 평가과정에도 참여를 요구하고, 심지어 집행 중인 정책의 중단을 요구하기도 하면서 혼란을 빚기도 한다.
이처럼 정책과정 전반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가 강조됨에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통치 대신 정부와 민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고 일견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약화되는 모양새다. 시민 개인이 권력의 주체로 발전하면서 시민단체, 비정부기관(NGO)이 시민사회를 넘어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행위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한편 박원순 변호사가 1990년대 말 미국 유학 중 발견했던 가공할 ‘유령’, 지역재단 혹은 모금재단은 일반적 의미의 시민단체나 NGO의 위에 있는 상위개념으로서 근래 시민사회의 발전단계에서 한층 더 진화된 형태다. ‘시민사회 2.0’의 시대를 알리는 구분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5월 영국에서 자선지원재단(CAF·Charities Aid Foundation), 전국자원봉사단체협의회(NCVO·National Council for Voluntary Organizations), 리버풀 자선 봉사활동(LCVS·Liverpool Charity and Voluntary Services) 등 세계 최고(最古), 최대 규모의 지역재단을 둘러봤다.
▲ 600명이 근무하는 영국 옥스포드의 옥스팜 본사 (사진/ 필자) |
각각 1974년, 1919년, 1909년 설립돼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들 단체는 정부와 시민단체들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국가와 지역사회를 발전시키고 기부문화를 선도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와 선진 프로그램 등에서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국내의 경우 지역단체나 모금재단은 그 숫자가 한손으로 꼽힐 정도로 적고, 몇군데를 제외하곤 그나마 걸음마 단계인데, 선진국의 경우는 이미 깊은 뿌리를 내려왔고 수많은 성공사례들이 있다. 머지않아 우리 사회에서도 지역단체나 모금재단이 활성화 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세계의 자선단체, 모금, 재단, 시민사회의 판도를 바꿀 것으로 평가되는 지역재단(community foundation)은 종전의 시민단체와는 다른 수준의 잠재력과 사회 전반에 미칠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지역재단의 첫 번째 특징은 ‘지역에 의한, 지역을 위한, 지역의 재단’이라는 장소, 공간적 부분에 있지만, 주목되는 부분은 모금(fundraising)과 배분(grant-making)에 기관의 역량이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시민활동가 양성 기관으로서의 지역재단
지역재단, 혹은 모금재단의 명시적 목적은 모금된 자금으로 특정한 목적의 기금을 만들고, 그 기금을 토대로 공익적 활동을 벌이는 지역단체에 배분하여 지역발전과 지역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시민단체가 공익적 활동을 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결사체라면, 재단은 이런 시민단체들이 각 지역과 영역에서 수행하는 활동을 지원하며 정부 혹은 후원자와 시민단체들의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 재단은 시민단체들에게는 재정적 후원과 함께 인적, 물리적 네트워크를 제공하며 후원자들에게는 세금감면 혜택과 자산운영 자문, 법률 자문, 구호단체와의 연결 및 구제활동 보고, 기금운영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조사연구에 따르면 잠재적 기부자들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은 ‘어디에 어떻게 기부할지 모르겠다’는 점인데, 모금재단은 그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지역재단은 1900년대 초 미국에서 시작돼 서서히 발전돼 오다 최근 몇 년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캐나다와 영국, 독일 등 서유럽과 러시아, 체코 등의 동유럽, 인도, 태국, 필리핀 등의 아시아, 멕시코와 브라질 등의 남미, 그리고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까지 현재 전 세계 50여 개 국에 1200여 개의 지역재단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는 과거 마을조합 같은 지역재단의 흔적이 있으나 엄밀한 의미의 지역, 모금재단은 2000년 박원순 변호사가 도입한 것이 최초로 꼽힌다.
지역재단은 면세, 비영리, 자치, 대중적 지원 등의 특징을 가지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부나 지방자치기관의 법률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여건이 성숙되어 있다.
▲ 런던에 위치한 영국 전국자원봉사단체협의회(NCVO)빌딩 (사진/ 필자) |
지역재단의 기금은 기부자들의 기부금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일시에 내는 자금일 수도 있고 수천 명의 주민에 의한 지속적이고 정기적인 기부에 의할 수도 있으며, 아름다운가게나 그 모델이 된 영국의 옥스팜 스토어와 같이 수익을 지속적으로 내는 거래 활동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가게의 경우 전국 120여 개의 매장에서 연 250여 억 원의 매출을 내고 있다.
이런 지역 모금재단은 지역사회에서 정치적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낸다. 재정적 지원을 통해 수많은 사회 활동가를 양성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국가 구석구석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경우 작년 한해 전국에서 4000억 원을 모금했는데, 이 중 10% 이상을 활동가들의 인건비로 지출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지역재단은 시민사회의 무기이며…사회정의를 바로 세우는 시민사회의 도구이며 기반”이라고 '자랑스럽게' 밝힌바 있다.
정치적으로 악용 소지 있는 지역재단
이러한 지역재단의 성격과 운용방식이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정확한 지향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언급됐듯이 지역재단 혹은 모금재단은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본질적으로도 적지 않은 맹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후원자들의 자발적인 모금이 과연 지속적일 수 있는지, 얼마나 자생적인 풀뿌리 후원조직을 갖출 수 있는지의 여부다. 뿌리 깊은 기부와 나눔 문화가 조성돼 있지 않는 한 결국 지역재단은 소수의 큰손 후원자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지역사회의 정치구조나 비즈니스 내의 먹이사슬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지역 활동가들이 기업이나 자산가, 정치인들에 대한 잠재적 협박, 모금수단으로 악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일부 저명한 사회 활동가들의 삶이 ‘협찬인생’이라고 비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중앙정부 혹은 지방자치기관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모금액의 규모가 크게 달라짐으로써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운영 여부가 갈리게 될 것이다.
또 재단이나 시민단체를 통해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목적은 애초부터 정치적 의도가 기저에 깔려 있음을 드러낸다. 사회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특정한 정치적 프로그램을 달성하기 위해 재단이 그 수단과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치되는 기금과, 그 기금을 관리하는 재단의 투명성과 영속성, 법률적 제도적 문제 등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이런 맹점에도 불구하고 향후 우리나라 시민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지역재단, 모금재단의 미래와 역할, 발전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 전임 노무현 정부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민사회수석실을 폐지했다. 이후 진보좌파진영 시민사회가 일제히 궐기한 광우병 사태를 맞아 국정의 좌표를 완전히 잃고 우왕좌왕하는 우를 범한 바 있다.
중도 혹은 보수진영은 진보진영의 지역재단이 구축해 놓은 시민사회 네트워크를 담대하게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이념적 논의나 정치 진영 대립 논리를 떠나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건강하고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서라도 시급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영국 런던과 리버풀, 옥스퍼드, 에딘버러에 위치한 12개 지역재단과 시민단체를 방문하면서 새롭게 다가왔던 점이 있다.
세계적으로 앞서 있는 영국의 기부문화와 제도, 자선단체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기부문화와 시민사회의 무궁한 발전 가능이 잠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시민문화 선도할 기독교 운동의 가능성
그것은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와 성도들의 열성과 신앙이었다. 영국에서 재단이나 시민단체 활동에 관여하며 기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의 수입 대비 기부율이 3~4%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수입의 10%(십일조)를 헌금으로 내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있다.
기독교 교인 절반 이상이 십일조 명목의 헌금을 내고 있으며, 교회의 재정의 50% 정도가 십일조 수입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런 수치는 미국 기독교 성도 10% 미만이 십일조를 하는 것보다도 훨씬 높은 것으로, 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미얀마의 경우 세계 기부 척도에서 최상위권에 있는데 불교 신도들의 헌금이 통계에 잡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개신교는 이미 알게 모르게 많은 사회적 구제활동, 시민사회 활동에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 70% 이상의 사회봉사자들과 구제기금이 기독교 성도들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미개발된 무궁무진한 잠재력,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 평균 재정지출의 10~20%만이 사회구제와 선교 등 외부활동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교회 건축과 예배 등 내부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의 70% 이상을 외부로 내보내는 교회도 있긴 하다.
사회 구제의 경우 전문가에 의한 체계적 프로그램에 의해 이뤄지기보다 일시적이고 주먹구구식으로 집행되고 평가 과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전문성이 접목될 경우 비약적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조직과 재정과 열성의 삼박자를 두루 갖춘 한국 교회가 전문가 양성과 사회구제 프로그램을 통해 기부문화를 선도하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시민사회 2.0 시대에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세계 1등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교회는 사회운동가들의 수단과 도구가 될 수 없으며, 신앙의 본질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민사회의 시대’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대세이자 현실이다. 시민사회는 모금재단 등 아직 우리에게 낯선 선진 기법들을 도입해 향후 10년, 그리고 이를 넘어 더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이를 수단화하고 정치적 목적의 도구가 되는 순간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사회적 디자인으로서의 시민혁명의 꿈은 헛된 것이며 진정한 봉사와 헌신, 구제와 나눔의 문화가 확산시킴으로써 다가오는 21세기 시민사회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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