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 30여권, 역사서 15권, 동양철학 5권, 이승만 대통령 관련 3권, 사회분석서 5권, 아동도서 서너 권. 전업작가의 실적이 아니다. 매일 출근해 기사를 써온 조선일보 이한우 문화부장의 작품 리스트이다. 동양철학 서적 3권은 각각 1000페이지가 넘으며 <대학연의> 상하권은 200자 원고지 6511매 분량이다.
기자들은 의외로 책을 내지 않는 편이며, 낸다하더라도 대개 취재한 내용을 묶는 정도이다. 이한우 부장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고려대 대학원과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대학원 시절부터 번역서 위주로 책을 내다가 1996년에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상·하권을 출간했다.
“우리 신문에 연재한 걸 묶어 내면서 서문에 ‘끝나고 나도 이승만이 잘 안 보인다’고 썼어요. 서양적인 모습이나 권모술수, 산업,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겠는데 대단한 인간적 깊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도무지 규명이 안 되는 겁니다. 이 분의 탁월성이 개인적인 것인지, 우리가 잘 모르는 조선시대만의 교육에 있는지,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의문을 갖고 있던 2002년, 출판사 대표가 600만원짜리 조선왕조실록 CD를 들고 와 세종에 관한 책을 쉽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낸 책이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인데 내용이 엉성해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이승만 대통령의 깊이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게 되면서 역사 공부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당시 진짜 엘리트들이 한학을 했는데 한문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걸 통해 인격적인 도약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았던 거죠. <사서삼경>도 읽었겠지만 <춘추> 같은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외교문서인 춘추를 보고 현실감을 배웠을 테고 문서 하나하나에 온힘을 다해야 한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조선의 선비가 엘리트 교육에 체화된 상태에서 외국 문물을 배우니 수준이 높았던 거죠. 공적인 관심사 없이 교수되려고 공부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7년간 조선왕조실록을 거의 외울 정도로 공부하고, 2007년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해 동양철학을 익히자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비로소 정확히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2008년에 많은 부분을 보충해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를 펴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중에 문서를 제일 많이 생산한 분입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11년간 미국과 관련된 외교문서는 거의 이승만 대통령이 쓰다시피 했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와 미국에서 문서를 다 공개했는데 너무 방대한 데다 평생 일하고 좋은 평가를 못 받을 거 같아서인지 학자들이 연구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격변의 시대에 우리나라가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잡아준 밑바탕까지 봐야 이승만 대통령을 제대로 알게 될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은 무궁무진한 책 기획의 보고
이한우 부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기본적으로 공적인 일에 헌신한 사람이며 자기에게 맞는 시중(時中)이 뭔지 알았던 분’이라고 정의했다.
“망해가는 조선을 어떻게 정리하고, 식민지를 어떻게 극복하며, 새로운 나라는 어디를 모델로 삼아 세워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했고, 적중했습니다. 온몸으로 싸워가며 하나하나 찾아내고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하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 거죠. 우리나라 역사상 네 사람이 건국을 했습니다. 세 개로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한 고려 왕건, 있던 나라를 군사적으로 뒤엎은 조선의 이성계, 반쪽의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입니다. 세 나라를 합친 왕건이 제일 위대하죠. 건국자의 중요성을 알아야 이승만을 재평가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좋다 싫다 싸움을 하면 해법이 없습니다. 건국자는 후대의 지도자 60%를 합친 것보다 중요한 분입니다.”
“조선 사람은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한 번도 국민을 깔본 적이 없다는 것도 높이 평가했다. 문제를 지도자의 탓으로 돌려 고민했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는 것이 이한우 부장의 판단이다.
조선왕조실록에 7년간 빠져 살면서 그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이한우의 군주열전>(세종, 태종, 성종, 숙종, 선조, 정조) 6권을 출간했다. 6명의 왕을 집중적으로 논하면서 사이사이 다른 왕들도 거론했다.
“조선왕조실록을 공부할 때 완전히 미쳤었죠. 그래도 회사 일은 했으니 여기까지 왔겠죠. 술도 마시고 골프도 자주 쳐요. 그 외에 노는 시간이 없어요. 퇴근 이후, 주말과 휴가 때는 꼬박 집에서 글을 씁니다. 1년에 4권을 낼 때도 있으니 주변에서 ‘집에 이한우가 또 한 명 있냐’고들 합니다.”
보통 2권을 동시에 진행하고 한 권 쓰는데 3~4개월 걸린다고 한다. 매일 출근하면서도 책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을 스스로 분석했다.
“집중력도 있지만 테마가 정해져 있으니 산만하게 왔다갔다 하지 않아요. 컨트롤을 정확하게 하는 거죠. 지적 호기심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니까. 일찍 방향을 잡은 편입니다.”
앞으로도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출간할 책이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이한우의 군주열전>에 이어 <조선사 진검승부> <조선의 숨은 왕><조선을 通하다><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를 이미 펴냈고, 김영사의 하루시리즈 <왕의 하루><왕비의 하루>도 출간했다.
역사 서적은 1만부만 나가도 ‘대박’이라는 평을 듣는데 이한우 부장의 책은 기본적으로 출간 한 달 만에 7000부가 판매될 정도로 고정 독자가 형성돼 있다. 2012년에 낸 <왕의 하루>는 3만부를 넘어섰다. 출간하는 책마다 스테디셀러가 되니 한 달이면 서 너 군데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며 기획서를 갖고 올 정도이다.
박 대통령에게 권하는 <대학연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틈틈이 하던 한문공부를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는 이한우 부장은, 독학으로 논어만 5년간 읽다가 어느 날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논어로 논어를 풀다><논어로 중용을 풀다><논어로 대학을 풀다>를 펴냈고, 곧 <논어로 맹자를 풀다>를 출간해 사서를 완성하게 된다. 1000페이지가 넘는 논어 시리즈도 몇 천 권씩 팔려나간 스테디셀러이다.
워낙 사서 관련 책을 내는 저자들이 많아 이한우 부장의 저서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들도 <대학연의> 상·하권 세트가 나오면서 보는 눈이 달라졌다. 세종대왕이 100번 이상 탐독하고, 세조를 제외한 조선시대 모든 왕들이 읽은 뒤 실록에 평을 남긴 책이 바로 <대학연의>이다.
“이성계는 이 책을 읽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으며 이방원은 외척을 멀리하라는 내용을 읽고 외척을 다 죽입니다. 왕위 찬탈을 나쁘게 말한 걸 알고 세조는 이 책을 안 봤습니다. <대학연의>를 모르면 조선시대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예요.”
최초의 완역판인 <대학연의>는 상·하권 세트가 9만원이다. 나온 지 석 달 만에 3000질이 팔려나갔다. 원저자 진덕수는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제왕의 다스림을 보필하고 배움을 돕기 위해’ <대학연의>를 집필했다.
이한우 부장은 현재 진덕수가 저술한 문장론 <문장정종>을 번역하는 중인데 이어서 진덕수의 독서평이 담긴 <서산 독서기>를 번역할 계획이다. 2016년에 두 권이 끝나면 어렵다는 삼경에 도전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조선시대를 훤하게 꿰뚫고 있는 이한우 부장에게 정치인들이 가장 본받아야 할 왕이 누구냐고 묻자 “국내와 국제관계를 다 보려면 태종과 세종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권하고 싶은 책으로는 <대학연의>를 들었다.
“읽어본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통령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온갖 간신들의 식별법이 다 나옵니다. 동양철학자들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사물을 잘 이해하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진덕수는 ‘인재를 가려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한우 부장에게 자신이 낸 책 중에서 역사서 초보자를 위한 저서의 추천을 부탁하자, 그는 조선시대 통치자를 알 수 있는 <왕의 하루><왕비의 하루>와 조선시대 당쟁의 뿌리를 통해 대한민국의 오늘을 읽을 수 있는 <조선의 숨은 왕>을 권했다.
쓰는 자로 계속 살아갈 터
인터뷰 도중 틈틈이 한문 풀이가 이어졌는데 대단히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논어에서 학문을 ‘學問’이 아닌 ‘學文’으로 표기했는데, 온 몸과 온 마음과 온 열정을 다하는 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배워서 되는 것이기 때문에 ‘文’은 ‘애쓰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공자가 매사에 애쓰면서 살라고 한 걸 알아야 이승만 대통령의 삶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는 풀이도 곁들였다.
정치인들이 친애(親愛)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親’이 ‘愛’보다 훨씬 ‘가까운 관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愛’는 ‘사랑한다’가 아닌 ‘아낀다’는 뜻이지만 ‘親’은 ‘내 몸과 같이 여긴다’는 뜻이라며 ‘부친 모친 친구’를 예로 들었다.
중용(中庸)은 균형을 뜻하는 게 아니라 ‘中’하고 ‘庸’하다는 동사로 이뤄진 한자어라는 설명도 새로웠다. ‘中庸’을 문제의 본질, 사람의 마음에 적중해서 그걸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요구를 고민하여 가장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걸 찾으려 했고, 제도화보다 언어의 지속력이 더 강하다는 걸 알고 ‘中’하고 ‘庸’해서 만든 전형적인 케이스가 바로 훈민정음입니다. 그걸 할 수 있었던 정신적 기반과 방법론이 <대학연의>에 있고 그것의 핵심이 ‘中’하고 ‘庸’한 겁니다.”
세칭 ‘문화권력’이라고 부르는 조선일보 문화부장에게 요즘 출판계 불황에 대해 물었다.
“예전보다 어려워진 건 사실이지만 책을 낼 때 분명히 공력을 들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투자한 만큼 나옵니다. 독자들이 읽고 싶어 미칠 정도의 책을 쓰면 됩니다. 저는 소설을 별로 안 좋아 하는데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이 쓴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다리는데 나갈 책이 별로 없는 겁니다. 시중(時中), 현재 대한민국 사람들이 무얼 생각하고 무얼 고민하는지 팍 찔러서 ‘어, 이 사람이 이걸 어떻게 알았지’ 하는 지점을 찾도록 여러 형태로 ‘中’하고 ‘庸’해서 찾아내야죠.”
스마트폰이 출판시장 잠식의 원인이라는 얘기가 많다고 하자 스마트폰으로 읽을 수 없는 <대학연의>같은 두꺼운 책을 내면 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좋은 작품이냐 아니냐와 별개로 운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단계 단계 자기 독자와 교류하면서 길게 보고 써야 합니다. 문학평론가나 문학기자가 절대 알 수 없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나만의 작품을 써 나가야죠.”
이한우 부장은 진덕수 저서를 번역한 이후 조선시대 서인들의 역사에 대해 쓸 계획이라고 했다.
“서인의 뿌리를 보면 패턴이 지금 좌익과 비슷합니다. 임금과 국가를 인정하지 않아요. 서인의 앞잡이였던 송익필이 노비 출신인데 계속 뒤에서 조종했습니다. 송익필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오소독스(orthodox)한 서인사를 연구해야죠.”
이한우 부장이 조선시대와 사서에 관한 책을 연이어 내자 역사학자나 중국사와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게 봤다. <대학연의> 같은 확고한 성과가 나면서 그의 책을 인용하고, 다음 책을 주시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한우 부장은 힘들지만 자신이 공부한 것을 우리 사회와 공유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쓰는 자’로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모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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