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한일관계가 꼬이고 갈등이 첨예해질 때마다 이런 의문이 증폭되곤 한다. 한국인과 가장 닮았다는 일본인. 언어마저 세계에서 가장 닮아 있다. 그래서일까. 한일 양국의 사람들은 마치 상대가 ‘땅 사면 배가 아픈’ 사촌지간 같다. 일본인의 선조는 왜인이다. ‘왜인=고대 일본인’이라는 도식은 익숙하다.
하지만 적어도 1990년대 이후로 이 등식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유전자 인류학이 말하는 일본인과 고대 문헌이 말하는 왜인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열도에 왜(倭)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권위 있는 학자들, 예를 들어 일본 기마민족설로 유명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와 일본문화 기원론의 고쿠부 나오이치(國分直一), 오키나와를 일본민족의 박물관론으로 구성한 도리고에 겐자부로 등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왜인의 기원은 일본 열도가 아니라, 진(秦)나라대에까지 양자강 유역과 산동반도 등에 흩어져 해상무역을 하던 집단이라는 점이다.
이런 왜인들은 후에 한(漢)나라의 남하정책에 따라 중국남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로 흩어지게 된다.
왜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중국 고대 인문지리서 <산해경>이 처음 언급하고 있다. 진한(秦漢)기에 걸쳐 저술된 <산해경>에는 “개국(蓋國)은 거연(鉅燕)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으며, 왜는 연에 속한다”라고 설명한다.
이제까지 ‘왜=일본열도의 고대인’이라고 간주했던 시각은 당연히 왜의 북쪽에 있다는 개국( 蓋國)을 BC 2~3세기경의 한반도 내 삼한 세력이라고 판단해 왔다.
하지만 다른 사서들이 말하는 왜인의 위치와 활동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진한시대 이전까지는 일본열도에 왜인이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주장이다.
그러한 근거로 에가미 교수는 <논형(論衡)>이라고 불리는 사서에 “주(周)대 때는 천하태평하며 월상(越裳)은 흰 꿩을 바치고 왜인은 ‘창초를 바쳤다”는 기술에 주목했다. 창초는 창포의 다른 말로서 주로 중국 양자강 이남 지역에 분포되고 있고, 일본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이 에가미 교수의 주장이다.
아울러 중국의 사서들이 ‘왜인은 얼굴에 문신을 한다’고 언급한 풍습 역시 양자강 이남의 중국 남방 민족들에게 흔했다는 점도 지적된다.
에가미는 ‘왜가 연에 속했다’는 산해경의 기술은 화중·화남의 왜인들이 연나라에 무역을 하기 위해 들어갔던 것이라고 추정한다.
에가미는 원래 왜인이 중국 강남에 기원을 두고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해양민족이었다가, 1세기 이후에는 일본에 정착된 무리만이 왜인으로 불리게 됐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에가미 교수의 논지에서 좀 더 폭넓게 왜인의 기원을 연구한 학자가 있다. 바로 도리고에 겐자부로였다. 그는 왜족(倭族)이라는 공통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상정했는데, 그의 정의에 의하면 왜인이란 ‘벼농사를 수반해 일본열도에 도래한 왜인, 즉 야요이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총칭한 개념’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본초학 연구서 <본초강목(本草綱目)>을 근거로 왜인의 본거지를 쓰촨성(四川省)으로 밝혔다는 점이다.
도리고에에 의하면 왜인은 양자강 유역에 여러 소규모 왕국을 건설하고 벼농사를 영위하고 있었지만 춘추전국시대를 통해 오·월 등에 흡수돼 갔으며 진한(秦漢)시대에 완전히 와해되면서 중국 남부의 오지와 한반도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왜인들은 예맥족과 혼합됐고 그 결과가 한족(韓族)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한(韓)에 통합되기를 거부한 이들이 한반도에서 왜(倭)로 불렸으며 이들이 다시 일본 열도로 이동해 사서(史書)에 야마토 정권을 수립한 왜(倭)로 등장한다는 것이 도리고에의 학설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 동남부 지역의 사람들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인들 간에 유전자 거리가 서로 밀접하다는 점이 뒷받침한다.
한반도 삼한과 왜의 문화는 닮은꼴?
도리고에의 이론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왜 한민족과 일본 민족은 그렇게 닮았으며 삼한의 문화와 왜의 문화가 비슷한지,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이 치열한 논쟁을 겪으면서도 완벽한 해결을 보지 못하는지를 말이다.
도리고에의 학설을 일단 수용해 보면 고대 한반도의 삼한과 일본의 왜는 거의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문화적 양상이 비슷했을 거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아울러 왜가 백제와는 서로 연합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신라와는 적대적이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즉 백제는 한반도 내 존재했던 왜와 연합국가적 성격을 띠었던 반면, 신라는 왜와 연합하지 않고 독특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내세워 왜집단을 배척했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점은 한반도 왜의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했던 가야의 여러 나라들을 신라가 정복하는 과정에서도 크게 불거졌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가야는 왜와 친연성이 높으면서도 백제와 신라에 비해 설명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고대국가였다.
장강에서 이동한 세력, 한(韓)과 왜(倭)로 갈려
왜의 기원과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건국의 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의 명칭 구조가 가야의 두 건국자 뇌질주일(惱室朱日)과 뇌질청예(惱窒靑裔)의 명칭 구조와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대가야의 건국자 뇌질주일의 별칭은 이진아시였다. 바로 김수로왕이다. 일본의 건국 남신 이자나기와 가야 김수로의 이진아시의 음차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의 기원도 가야로부터 탐색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5가야 가운데 하나인 비화가야(非火伽倻)의 옛 이름은 비사벌(比斯伐), 비자벌(比子伐)이었다. 경남 창녕지역이고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되는 곳이다.
창녕에는 가야왕족들의 고분이 유달리 많은 곳이다. 비사벌, 비자벌은 모두 비화(非火), 즉 ‘빛벌’의 음차다. 고대의 성읍은 ‘벌’, ‘부리’와 같은 말로 표현됐는데 신라의 서라벌과 백제의 소부리가 그렇다.
비화가야(非火伽倻)의 비화(非火)는 빛불=빛부리=비사벌이었다. 고대 일본어에서 일(日)의 음가는 ‘히’가 아니라 ‘피’였다. 그러므로 일본(日本)의 일(日)을 왜어(倭語) ‘pi’로 읽고 본(本)을 한어(韓語) ‘buri’로 각각 읽으면, 일본(日本)은 빛부리/빛벌과 유사한 음가의 ‘pi-buri/pi-bur’가 된다.
즉 비화(非火)=일본(日本)의 의역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도리고에의 ‘한족(韓族), 왜(倭)-예맥(濊貊) 결합설’이 옳다면 말이다.
▲ 일본 고교 교사용 역사 자료 |
도리고에는 에가미나 고쿠부보다 훨씬 넓은 개념으로 왜인을 파악했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설명하는 데 가설적인 개념으로 ‘왜족(倭族)’이란 용어를 제기했다.
이는 그의 정의에 의하면 ‘벼농사를 수반해 일본열도에 도래한 왜인, 즉 야요이인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총칭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는 왜족 개념을 통해서 왜인과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의 민족적·문화적 계통관계를 재조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도리고에도 역시 에가미와 마찬가지로 <논형>의 기사를 근거로 왜인의 거처를 중국 남부에서 찾았을 뿐만 아니라 본초학 연구서 <본초강목(本草綱目)>을 근거로 그 본거지를 쓰촨성(四川省)으로 특정했다.
또한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를 실마리로 장강 상류에 왜족의 옛 왕국들이 존재했으나 한(漢)족의 침입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다음과 같이 각지에서 흥망을 거듭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선 전한의 침공으로 대부분의 왕국은 멸망했으며 남은 왕국들도 삼국시대와 원(元)나라시대에 토멸돼 장강 상류지역의 왕국들은 전멸됐다.(1982:37-57). 망국의 백성이 된 왜족들은 강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일부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여러 왕국을 세웠다가 근대에 들어서 버마·태국·캄보디아·베트남 등을 건국했다.
한편 산악지대로 들어간 무리는 중국 서남부에서 인도차이나반도에 걸쳐 소수민족으로서 왜족의 맥을 이어갔다. 또한 장강 하류지역으로 이동한 무리는 하무도(河姆渡) 유적을 남기고, 그 일부는 산둥반도로 북상해 한(漢)족한테 동이(東夷)로 불렸다.
은(殷)나라는 그들이 세운 나라였으며 주대에는 서이(徐夷)·회이(淮夷)·담이·거이·엄이(奄夷)·래이(萊夷)라는 작은 나라들을 세웠으나 주나라와 제(齊)나라에게 멸망되거나 오나라에 흡수됐다.
그 오나라도 끝내 월(越)나라에 의해 멸망(BC 473년)됐으며 이때 많은 유이민이 발생했다. 그 유이민 중 일부는 한반도 중남부에 진출해 토착민족이었던 예맥(濊貊)과 혼합하면서 ‘한인(韓人)’이란 명칭으로 중국사서에 등장하게 됐다.
이에 대한 통합을 거부한 무리는 ‘왜인’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면서 한반도에서 정착했다. 한편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일본으로 간 무리도 있었는데, 그들이 일본의 왜가 됐다고 한다.
한정석 편집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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