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믿을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박근혜, 믿을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 이원우
  • 승인 2014.10.0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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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의 블랙스완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 지금부터 박근혜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를 연애(戀愛)로 비유하려고 한다. 박 대통령께서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대통령이 남자였어도 같은 비유를 들었을 거다. 연애에 빗대어 생각할 때 우리는 때때로 인간관계의 본질을 관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창극 파문은 대한민국 우익에 일대 쇼크로 작용했다. 문창극이 꼭 국무총리를 해야만 하는 너무나 훌륭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청문회까지 가지도 못한 채 오해와 날조의 여론재판 속에 침몰해 버린 문창극은 본인의 역량과는 관계없이 잠시 정통우익의 ‘아이콘’이 됐던 것이다.

이번 논란은 문창극이냐 아니냐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념과 가치관, 세계관과 역사관의 퇴로 없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승만의 이념을 계승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한 번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배했다(정확히 말하면 존재를 부정당했다).

문창극은 적어도 청문회에서 낙마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고, 여기에는 많든 적든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했을 거라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쉽게 말해 박 대통령이 우익의 너무나 절박한 입장과 본질 그 자체를 무시했다는 의미다. 이 지점을 나는 박근혜 대통령과 우익의 파국(catastrophe)으로 규정하겠다.

파국 앞에 직면한 사람은 두 갈래로 나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점을 수정하는 사람과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박근혜의 파국 선언 이후 한국의 우익도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 “박근혜를 포기해. 그녀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1번, “아니야. 그래도 믿어보자. 내가 아는 박근혜는 이렇게 끝낼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2번.

파국 앞 우익의 두 갈래

아직도 2번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밖에 안 남았다: 정신 차리세요. 상대는 이미 당신과 헤어지겠다는 입장을 전달했을 뿐더러 다른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한 교제를 시작했다. 그런데도 돌아올 거라고 혼자 정신승리를 하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현실의 모든 정황은 이미 우익에 적대적이다. 우익의 ‘ㅇ’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물을 먹고 있는 현실이 안 보인단 말인가. 시진핑과 나눈 대화들은 또 뭐란 말인가. 이건 실수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한때 가난하지만 올곧은 남자에게 호감을 보였으나 결혼은 실전이라는 걸 깨닫고 현실적인 남자를 선택한’ 여자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순박한 남자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른 채 ‘돌아올 거야…’라며 눈물 젖은 헌사를 읊조리고 있는 꼴이다. 10년쯤 지나면 그녀가 당신과 커피 한 잔 마셔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녀의 아들은 여섯 살쯤 됐을 것이다. 정신 차리시길 바란다. 그녀의 마음은 떠났다. 당신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박근혜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박근혜를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느냐, 중요한 건 사랑과 믿음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대통령에 대해서도 사랑과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는 반론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나 역시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보다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 생각은 틀렸다. 인간은 서로 굳게 믿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은 종교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본질은 믿음이 아니라 이해다. ‘~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꾹 참고 이해하면 된다. 어쩌면 그걸 위대한 사랑의 발현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여기에도 정도와 경계는 있어야 한다. ‘나’의 본질을 부정하고 파괴할 만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이해한다? 그걸 과연 정상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음에도 ‘그 사람에겐 내가 필요해’라며 미련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뭔지도 모르겠다. 그건 사랑도 믿음도 아니다. 집착이고 미련이다.

어떤 사람도 ‘믿음’의 대상이 될 만큼 대단하지 않다

박근혜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나와 있었다. 도대체 왜 한낱 정치인에게 믿음이라는 가치를 들이대는가? 박근혜 아니라 그 어떤 정치인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녀를 이해할 것이냐 말 것이냐다.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짝사랑주의자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오늘의 박근혜를 이해해 주는 순간 그 사람에게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는 타이틀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보수주의의 본질을 무시하고 부인한 사람을 이해하는 보수주의자라니? 마치 동그란 삼각형을 그리겠다는 사람처럼 보인다. 신선 흉내나 내고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과 한국 보수주의의 사정이 여유롭고 안정적이었나? 박근혜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랑과 믿음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들이대며 그녀를 우상(偶像)으로 만들진 마시길 바란다. 미련한 남자와 스토커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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