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럭저럭 밀리면서라도 약간의 배급은 있었다. 그 시절에는 배급으로 주는 식량이 충분하지는 않지만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먹을 것을 늘 국가에서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대신에 혼자서만 기름 냄새 풍기면서 맛있게 먹는 풍요로움은 이웃집이나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아주 불편한 일이 었다. 수입 대 지출이 누구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집사람들과 가까운 이웃과 친구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었다.
추석이 돌아오면 먹을 것이 모자라서 밥 한 그릇도 제사상에 올려놓기 어려운 집도 많이 있지만 능력이 있어 돼지고기 요리에 송편에 튀김과 과일, 생선까지 갖춰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물론 술과 맥주를 마시면서 며칠을 명절 분위기로 지낼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배급제 기간에는 모든 것이 억제됐기 때문에 재산이 많지만 없는 척 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김일성의 죽음이 바꿔놓은 풍경
배급제 시절에는 국가가 탐오낭비(貪汚浪費)와 미신행위라는 조건으로 주민들의 제사상을 통제하고 제한했다. 그래서 제사상이 매우 간소해졌고 당시에 주민들은 조상신보다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신들의 운명과 미래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날이 쪼들려가는 사회주의 배급제 생활, 김일성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수백만의 아사자와 극도의 기아 상황은 북한 주민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믿음을 한방에 깨뜨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국가가 배급을 언제 줄지 모르는 상황에서 북한 주민들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조상신을 잘 모셔서 조상신의 도움으로 일이 꼬이지 않고 잘 풀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인의 생존 본능은 위대한 것이었다. 국가가 배급을 주지도 않는 상황이고 언제 마지막으로 쌀을 나눠 줬는지도 아득한 때였지만 북한 주민들은 추석에 조상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배급제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을 연출했다. 떡 방앗간에 떡가루를 내러온 줄은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이어졌다. 급기야 등장한 장마당에는 배급제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열대 과일까지 등장했다.
배급제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은 가정들에서 ‘추석을 잘 쇠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더 많은 떡을 만들고 갖가지 제수용품을 사들여 화려한 제사상을 차려낸 것이다. 국가가 배급을 주던 시절에는 제사상 차리는 데 옆집 눈치를 보느라 억제되던 것들이 배급을 주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살라고 하니 제사상은 더 풍성해지고 조상신을 더 잘 받들어 모시려는 열의는 한층 강화됐다.
배급제에만 길들여져 있고 능력이 부족한 집들에서 ‘제사상에 죽물도 올리기 어렵다’는 푸념을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급제 시절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나게 풍요로운 삶이 시작된 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국가가 배급을 안 준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국가가 배급을 주지 말고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된 것이었다.
“차라리 배급제 없는 게 낫다”는 주민들
배급제 붕괴 후 북한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때는 아마 추석이나 음력설 제사상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많은 북한전문가들은 아직도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김정일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믿음은 상당수 ‘조상신’에게로 돌아갔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북한 주민들 중에 아직도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의 살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단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로, 김정일에 이어 또 다시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내야 할지, 탈북을 제외하고는 북한의 현실을 탈피할 방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도 하거니와 북한의 현실을 바꿔낼 힘이 없어 땅을 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올해 추석에도 북한 주민들은 어쩌면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하루빨리 무너지기를 조상신에게 열심히 빌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북한 정권이 제대로 배급하고 있는 것이라곤 그런 열망 뿐이다.
이애란 편집위원·북한전통음식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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