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한 건의 제보가 본지 미래한국에 접수됐다. 반체제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의 일생을 홍보하고 미화하는 아동용 도서가 ‘정부추천 우수교양도서’라는 이름으로 전국서점 및 도서관에 대량 유통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도서명 ‘체 게바라와 랄랄라 라틴아메리카’).
취재에 착수한 결과 상황은 체 게바라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지정 우수교양도서 11개 분야 420권 중에는 김일성도 있었고 극렬 반미주의도 있었고 민주노총도 있었다. 이 내용은 미래한국 제466호 단독보도를 통해 상세하게 보도된 바 있으며 문체부에 즉시 보고돼 유진룡 당시 장관이 시정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가 反정부도서 권장한 아이러니
1968년부터 시행된 우수교양도서 사업은 매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원장 이재호)이 400여권 규모의 과학기술, 문학, 종교, 철학, 역사 분야 추천도서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사업명이 ‘세종도서’로 변경돼 하반기 400여권 규모의 교양 도서와 600여권 규모의 문학 도서를 선정 및 발표할 예정이다.
본 사업의 취지는 ‘출판문화 진흥’이다. 책을 읽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개선하고 교양수준을 고양시키기 위한 사업이다. 지난 5월 한국문화관광연구원(KCTI)이 발표한 ‘2013년 4분기 오락·문화비 지출 경향과 시사점’ 자료에 따르면 작년 4분기 가구당 서적 구입비용은 월평균 1만5001원이다.
참고서 구입이나 취업용 수험도서가 모두 포함된 비용이므로 실제 교양을 위한 도서 구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개선하고 장기 침체에 허덕이고 있는 출판업계를 지원하기 위해 활용되고 있는 것이 도서추천 사업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기묘한 좌편향이 출판업계에도 이미 전이돼 있다는 점이다. 다수결 논리 혹은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해 자연스럽게(?) 책을 추천하면 정부가 예산을 집행해 반(反)정부 반(反) 체제 도서를 구매해 전국에 뿌려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2013년 우수교양도서 선정결과가 바로 그 사례였다.
작년 문체부는 도합 24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체 게바라를 미화하는 반미주의 동화책, 민주노총과 통합진보당의 노동관을 그대로 담아놓은 동화책 등을 종당 각각 500만원(최우수도서의 경우 750만원) 이내로 20만여권 구입했다. 그리고 공공도서관, 전국 각지의 작은도서관, 벽지 초중고등학교, 병영도서관, 지역아동센터 등 2500여 곳에 배포했다. 이는 정부사업이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될 때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가 파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이 아이러니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을 성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들은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를 관장하는 실무기관에 불과하다. 책의 심사과정에 내부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이 비쳐졌다가는 금세 ‘정부의 탄압’이라는 역공격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참사’는 반복된다
도서를 선정하는 심사위원들의 심사과정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는 것 정도가 그나마 경주할 수 있는 노력의 최선이다. 작년의 경우 문체부는 77인의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우수교양도서 420종을 선정했다. 극단적인 좌익서적이 선정된 결과만 놓고 보면 77인의 심사위원들이 편향된 인사로 구성돼 있지 않을까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명단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책 칼럼니스트, 작가, 교사, 교수, 기자 등으로 구성된 2013년의 심사위원들은 총 4회의 회의를 거쳐 281개 출판사의 도서 420종을 선정했다. 심사위원장은 서울대 경영대학원 조동성 교수였다. 그는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출신으로 인재영입분과 위원장을 맡은 바 있는 ‘친정부 인사’다.
이외에도 심사위원들 중에는 편향돼 있다고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실무를 담당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역시 심사위원단을 꾸리는 데 가장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왜 작년과 같은 결과가 도출된 것일까.
‘싸우지 않는’ 우익의 특성이 애써 확립한 심사위원단의 좌우 균형을 무색케 만들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쉽게 말해 좌익은 한 권이라도 자신들의 생각에 부합하는 책을 파급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데 반해 우익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안일하게 심사과정에 임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풍경은 학교도서관에 전태일 평전을 파급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전교조 교사들의 성실한 노력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대다수 ‘보수적인’ 교사들에게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문화 분야는 원래부터 좌편향의 속성을 띠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좌편향 소설, 좌편향 영화를 즐긴다. 문화에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스토리란 아무래도 판을 뒤엎는 전복적 스탠스를 취할 때 흥미롭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문화판의 경우 좌편향의 정도가 지나쳐 ‘9:1을 넘어선 10:0’이라는 푸념마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의 우파진영 내부에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얼마나 공유되어 있을까. 이 문제의 심각성이 충분히 전파되지 않으면 작년과 같은 기이한 풍경은 영속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특히 올해부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매년 600여권 규모로 문학 도서를 추천하는 ‘문학나눔’ 사업까지 떠맡게 됐다. 도합 1000여권의 도서가 ‘정부인증 세종도서’의 이름으로 전국에 파급될 예정인 셈이다. 지난 6월 학술분야 336종의 도서를 선정·발표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지난 19일 ‘본게임’에 해당하는 교양도서에 대한 신청절차를 마무리했다.
이제 결과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심사위원들의 몫으로 남았다. 어떤 인물들로 심사위원단이 선정될지는 알 수 없지만, 누가 되든 ‘적절하지 못한’ 책들을 걸러내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심사에 임하겠다는 자세가 요청되는 국면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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