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전선에 나선 구직자들에게 ‘서류 낙방’은 가장 큰 절망이다. 그나마 면접이라도 봤으면 나한테 뭔가 부족한 점이 있나보다 납득을 하겠지만 서류 낙방은 기회조차 얻지 못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스펙 몇 줄로 감히 나를 판단하다니. 부들부들.
다행히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요즘에도 학벌이나 경력 몇 줄만 보고 서류 불합격을 시키는 회사는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기업들도 성급하게 누군가를 불합격시키는 즉시 ‘안티 고객’이 1명 추가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금씩 더 예의를 갖추려 노력하고 있다.
그럼 이제 한국 사회는 서로서로 배려하고 상대방 영혼의 심층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는 속 깊은 곳으로 거듭나고 있는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가 목도하고 있다. 문창극 논란을 보라.
이력서에 써 놓은 몇 줄의 스펙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잘못됐다고 핏대를 올리던 이들이 멋대로 휘갈겨진 기사제목 몇 줄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 구도가 아주 기묘한 건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각자 왜곡을 하면서 서로들 열을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문창극의 커리어가 기사제목 몇 줄만도 못한가
기자 A가 왜곡을 하면 그걸 보고 열 받은 기자 B가 새로운 날조를 반복하며 C를 자극하는 형국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문창극을 극우 친일파 쓰레기로 만드는 데 성공한 모양이지만, 사실상 그들이 알고 있는 방식의 문창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강연 전문을 천천히 읽어보거나 동영상을 끝까지 보라는 얘기는 너무 많이 나와서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안 보는 거면 어차피 그 사람은 문창극에 대한 견해를 수정할 생각이 없는 사람인 거다. 인간의 고집에는 이상한 데가 있어서 한 번 오해하기로 결심하면 그 오해를 관철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문창극을 비웃는 동지(同志)들은 충분히 많으니 그렇게 해도 마음의 평화는 깨지지 않겠지만, 부디 잊지는 마시길. 그런 순조로운 과정을 거쳐 한 인간이 점점 대화가 불가능한 좀비로 변모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기가 쓴 칼럼을 인쇄해서 친일파가 아님을 항변해야 하는 문창극의 모습은 글을 쓰는 입장에서 취업 불합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담한 풍경이다. 그깟 총리 자리 따위가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수십 년간 쌓아온 커리어와 세계관이 질 낮은 후배들의 손에 의해 짓뭉개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악몽인 것이다.
그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부정당한 점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감히 진심의 위로 말씀을 전하고 싶다. 스펙 몇 줄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잘못됐듯, 왜곡된 기사제목 몇 개로 문창극의 커리어 자체를 부정하는 세태는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에게 면접시험(청문회)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교회의 비겁한 침묵
왜 이렇게까지 전선(戰線)이 불리해진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2011년 문창극 특별강연을 진행했던 온누리교회와 CGN TV가 해당영상을 삭제한 건 매우 결정적인 변곡점이었다. 이 순간 온누리교회는 문창극에 대한 KBS의 날조보도가 사실이라고 인정해 줘버린 꼴이 됐다. 온누리교회는 정말로 그가 “일제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다고 보는 걸까.
그렇다 해도 이제 와서 삭제를 했다가 다시 올렸다가 하는 이유가 뭔지는 불가사의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지은 죄조차 천국책에 기록되고 있다고 믿는 분들이 이제 와서 영상을 지우면 그게 없던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게 자신이 없어서야 어떻게 온누리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것인지. 사도 바울이 통탄할 일이다.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대한민국과 기독교의 관계가 매우 각별했다는 건 여러 각도에서 증명이 가능하다. 신앙이 없는 학자들 다수도 인정하고 있는 바다. 민족대표 33인에서 기독교 신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보면 간단한 얘기다.
1948년 5월 31일 건국 이후 첫 번째 제헌의회에서 국회가 가장 먼저 한 일이 ‘기도’였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간단한 얘기다(그렇다고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종교의 자유가 없는 기독교 신정국가로 만든 것도 아니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은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하며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청했다. 제헌의회 속기록 첫 문서가 기도문인 나라인데 문창극이 교회 ‘안’에서 강연한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문제를 삼을 일인가? 좌익들이야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쳐도 교회까지 휩쓸리는 건 세계 9대 미스터리 수준의 사건이다.
온누리교회는 원고를 마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문창극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침묵은 금’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이 순간 교회의 비겁한 침묵은 금(gold)이 아니라 금(line)이다. 그 옹졸한 라인 밖으로 밀려난 기독교적 세계관은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처음이자 마지막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일찌감치 떠나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서서히 침몰하는 일 뿐이다. 교회는 스스로 종교의 자유를 포기하고 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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