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Dead Sea) 부근에 위치한 마사다(Masada) 요새를 5월 30일 처음 방문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던가? 그 규모가 이렇게 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책에서 읽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10배는 컸다.(왜 마사다 요새를 작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발 40m라 하지만 그 인근 지역이 해수면보다 400m나 낮기 때문에(사해 지역은 세계에서 해수면이 가장 낮은 곳이다), 실제 요새 높이는 440m에 달한다.
높이보다 놀라운 것은 요새의 면적이었다. 가파른 곳에 위치했음에도 불구, 정상 부분은 평평했으며 그 크기는 길이 600m, 너비 250m나 됐다.
이스라엘 저항의 상징 마사다 요새
마사다는 이스라엘 저항의 상징이다. 서기 73년 바로 이곳에서 960명의 이스라엘인이 로마군단과 맞서 최후 저항을 하다가 산화했다. 바벨론 유수 이후 재건축한 예루살렘 성전도 이미 서기 70년에 다시 파괴됐다.
이후 유대인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된 채,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게 된다. 유대인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의 하나가 탈무드다. ‘해설을 붙인 유대교의 율법 및 전설집’이라 할 수 있는 탈무드는 4세기 말에 편찬된 예루살렘 탈무드와 6세기경에 편찬된 바빌로니아 탈무드로 나뉜다.
탈무드 편찬으로 유대교의 기본 교리가 정립됐으며 ‘파괴된 성전’은 유대인 마음속에 존재하게 됐다. 즉 레위지파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랍비가 토라(모세5경)와 탈무드를 해설하게 된 것이다.
마사다에서 사해를 바라보며 유대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래 전 한 유대인 지인으로부터 들은 시(詩)가 떠올랐다. 시오니즘 운동가 하임 나흐만 비알리크(Hayim Hahman Bialik)의 <학살의 도시에서>(In the City of Slaughter)였다.
이 시는 1903년 지금은 몰도바 수도인 키시너우(Kishinev)에서 일어났던 ‘포그롬’(pogrom,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 및 학살)을 배경으로 한 시이다. 비알리크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 코사크들이 유대인 집으로 들이 닥쳤다.
몇몇 유대인 남성들은 벽장에 숨어서 자신의 아내들이 강간당하는 것을 지켜봤다. 너무나 겁이 나서 저항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문제는 코사크가 돌아간 뒤였다. 이들은 랍비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물었다. “아내를 계속 데리고 살아야 합니까”라고.
새로운 유대인의 탄생
비알리크는 분노하며 서술한다. 유대인 남편들은 무릎을 꿇고 아내에게 지켜주지 못했던 것을 사과했어야만 했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지켜주겠으며, 지금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아내를 위로해야만 했었다고. 그러나 위선적(?) 유대인들은 정절을 잃은 아내와 계속 사는 것이 율법 상으로 합당한 것인지만 따지고 있었다. 비알리크는 ‘유배’(Exile)가 유대인을 파괴했다고 개탄했다.
유럽 유대인들은 싸울 줄 몰랐다. 즉 그들은 느낄 줄 몰랐고 인간(human)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시오니즘 운동은 단순히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운동이 아니라 유대인이 ‘인간’으로서 재탄생되는 운동이라는 것이 비알리크의 주장이다.
비알리크 뿐만 아니었다.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을 비롯한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들은 무기력한 유대교 랍비들을 경멸했다. 이들은 탈무드로 상징되는 ‘책의 백성’(the People of Book)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다윗과 같은 ‘칼의 백성’(the People of Sword)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실제로 순한 양떼처럼 끌려가던 홀로코스트(Holocaust) 당시의 유대인 모습과 적어도 1967년 6일 전쟁 이후의 이스라엘 유대인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비알리크가 말한 ‘새로운 유대인’(new Jew)이 탄생한 것이었다. 오늘날 유대인 공수부대원들은 기본교육을 끝마치면 마사다 요새로 행군해 온다. 그리고 요새에서 외친다. “마사다는 이제 결코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라고.
마사다 요새에 가지고간 책이 한 권 있었다. 이틀 전인 28일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지중해의 관문 욥바(jaffa)에 갔다가 구(舊)욥바 철도역 부근의 한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다. 캐롤라인 글릭(Caroline Glick)의 <이스라엘 솔루션>이란 책이다. 이 책은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가 합의(?)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책인 ‘2개의 국가론’(two-state solution)에 대해 반대하는 발칙한(?) 책이다.
글릭은 우선 ‘팔레스타인 사람들’(Palestinians)이란 자체가 ‘만들어진 국민’(invented people)이라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인은 단 한 번도 국가를 세워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을 ‘이슬람 공동체’(ummah)의 일원으로 여기거나 아랍인으로 간주했을 뿐 팔레스타인인이란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란 것이다.
실제로 1947년 유엔의 분할안(案)이 제기됐을 때 독자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할 계획은 나오지 않았다. 시리아 혹은 요르단이나 이집트에 귀속되는 것으로 여겼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이후 가자(Gaza) 지구는 이집트가, 웨스트뱅크(West Bank) 지역은 요르단이 각각 점령했으며 팔레스타인 독립은 논의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정체성이 본격화된 것은 1964년 PLO(팔레스타인 민족해방전선)가 창립되면서부터이다. PLO의 존재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 부각되기 시작했다.
1967년 전쟁에서 대대적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가자지구와 시나이 반도를,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를,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각각 빼앗았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협상을 맺고 시나이 반도를 반환했다. 그리고 웨스트뱅크 일부 지역을 요르단에게 반환하려 했으나 그렇지 않아도 팔레스타인계 주민과의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요르단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이 미국의 종용(?)으로 진행되면서 ‘2개의 국가론’이 대두되고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를 기반으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뤄지게 된다.
1994년부터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Palestinian Authority)에게 서서히 통치권을 넘겨주기 시작, 1997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97%가 PA 통치 하에 놓이게 됐다. 특히 가자지구는 2005년 이스라엘군이 완전철군함으로써 사실상 독립국가가 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의 하나가 하마스(Hamas)다. 하마스는 급진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으로 현재 가자지구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3No 정책’(No recognition, No peace, No negotiation)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인정할 수 없으며 이스라엘이 없어지는 날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마스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과의 자매단체로서 반미테러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웨스트뱅크는 ‘유대와 사마리아’
현재 미국은 하마스를 테러단체로 규정한 상태이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참여하는 한 협상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마스를 배제시켜야 한다고 PA 측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가 이끄는 PA로서는 자칫 잘못하면 배신자 혹은 기회주의자로 몰릴 가능성이 있기에 하마스를 무조건 배제할 수만도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
현재 PA의 주류 정파는 2004년에 사망한 전설적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가 만든 파타(Fatah)이다. 파타는 아랍 민족주의 정치세력으로 하마스와는 경쟁관계에 놓여 있으며 현재 웨스트뱅크를 자기 기반으로 삼고 있다.
글릭은 하마스뿐만 아니라 파타조차도 원칙적으로 이스라엘의 생존 권리(the right to exist)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2개의 국가론’은 레토릭일 뿐 현실성이 없는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2개의 국가론’에 찬동하게 된 것은 ‘인구 위기론’ 때문이었다.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를 합병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이상, 결국은 그곳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하는데 낮은 유대인 출산율과 높은 팔레스타인 출산율을 감안할 경우 이스라엘이 ‘민주적(?) 방식’에 의해 전복될 수 있다는 위기론이 제기됐던 것이다. 그러나 글릭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인구 위기론은 잘못된 통계와 전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웨스트뱅크 거주 팔레스타인 인구가 과장되게 알려져 있었으며 당초 예상과 달리 팔레스타인 출산율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이 조금 나아진 팔레스타인 젊은 여성들이 과거와 같이 많은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유대인의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으며 구(舊)소련 지역으로부터 유대인이 대거 이주해 옴으로써 인구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자지구를 제외한다면(글릭은 웨스트뱅크만 병합할 것을 주장한다!), 유대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은 2/3를 넘는다는 것이다.
연간 11개월 휴가 가는 군인
웨스트뱅크를 넘겨줄 수 없다는 글릭의 주장의 근본은 웨스트뱅크가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의 본고장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명은 웨스트뱅크에 위치해 있다.
넓은 의미에서 예루살렘도 웨스트뱅크에 해당되며 베들레헴, 헤브론, 여리고 등이 모두 웨스트뱅크에 속한다. 사실 이스라엘인들은 웨스트뱅크라 부르지 않는다. 이들은 이 땅을 ‘유대와 사마리아’(Judea and Samaria)라고 부른다. 오히려 현재 이스라엘 영토로 간주되고 있는 지중해 연안 지역은 과거 블레셋인(Philistines)의 영역에 해당된다.
글릭이 웨스트뱅크(혹은 유대와 사마리아)를 내줄 수 없는 이유로 안보 문제를 제기한다. 팔레스타인은 3No를 고수하는 등 이스라엘 멸절이란 목표를 버리지 않고 있는데 웨스트뱅크에 독립국가를 세워주면 웨스트뱅크는 이스라엘 공격을 위한 기지가 될 뿐이란 것이다.
이미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의 교과서만 보더라도 유대인을 없애 버려야 할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웨스트뱅크가 독립되면 이스라엘의 방어 종심은 최저 9마일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릭은 국제사회의 반응에 대해서도 낙관적이다. 어차피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좋아하게 될 리 없다는 것이다. 마치 팔레스타인 문제만 해결되면 아랍국가들과의 관계가 개선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허구이며 자기기만이라고 지적한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핑계일 뿐 막상 아랍국가들도 팔레스타인인을 챙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0년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인을 대거 학살한 ‘검은 9월사건’은 물론, 가자지구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태도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많은 아랍국가들의 가상 적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란이다. 오히려 예상되는 국제사회의 반발은 EU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EU의 경제제재가 예상되며 이를 극복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릭의 주장은 이스라엘 정부 공식 입장과 다르다. 그러나 글릭이 주장하는 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중동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국가는 이스라엘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또 현대 이스라엘인은 더 이상 저항도 못하고 가스실로 끌려가던 과거의 유대인이 아니다. “이스라엘인은 연간 11개월 휴가 가는 군인”이란 말이 있다. 남녀구별 없이 군복무를 해야 하며 제대 이후 만 50세까지 1년에 1개월씩 예비군에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념의 힘’(power of ideas)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에 근육을 붙인 것이 이스라엘의 건국이다. 1948년에 건국된 이스라엘은 고대 유대왕국으로의 부활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척박한 중동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싹을 틔워냈다.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종족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를 지킬 수 있는 현실의 힘이다.
황성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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