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음모론을 좋아한다. 세상만사를 음모론으로 바라보면 한순간에 3D 안경을 쓴 것처럼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일각의 음모론에 의하면 이건희 회장은 이미 지난 16일 오전 사망했다. 삼성이라는 거대조직이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기자들에게 엠바고(보도금지)를 걸었을 뿐이다.
근거가 뭐냐고? ‘근거가 없는 게 근거’다. 얼마나 막대한 조직력을 동원했으면 근거가 하나도 없겠는가 말이다. 음모론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6·25는 북침이거나 최소한 미국이 남침을 유도한 것이다. 천안함은 좌초였다. 세월호 참사에서 박근혜는 ‘일부러’ 승객들을 구하지 않았다. 아니 나아가 세월호 그 자체가 국정원의 기획이었다. 믿을 것은 이종인의 다이빙벨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정부의 방해 때문에 제때 투입되지 못했다.
너무 오버하는 것 같은가? 아니다. 이런 내용의 음모론이 한 많은 귀신처럼 인터넷을 떠돌고 있는 게 개명천지 2014년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당신은 조희연을 아십니까?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다. 이렇게까지 ‘배후의 조직’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절대 믿지 않는 음모론(?)이 하나 있다는 사실이다. 다름 아닌 좌파의 조직력에 관한 음모론이다. 수면 위에서 개개인으로 보이는 좌파들은 사실 보이지 않는 소수 핵심세력이 창출하는 조직력을 기반으로 움직인다고 말하면 한순간에 ‘젊은 나이에 색깔론에 물든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좌파들의 조직력에 대한 얘기를 하기에 이번 서울시교육감 선거는 아주 좋은 사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 당신은 조희연이라는 이름을 아는가?
그는 이번 선거에 출마한 좌파진영 단일후보다. 성공회대 교수로 활약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세간에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조국 서울대 교수며 유홍준 前 문화재청장 등 이른바 ‘거물’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던 서울시교육감 후보에 조희연 교수가 추대된 건 뜻밖이었다.
지난 선거의 이수호 후보처럼 ‘전교조의 수장’이라는 그럴듯한 스펙 하나 없이, 교수라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교육계 인사로 보이지도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자가 돼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대목이다. 어딘가에 전체를 총괄하는 거대한 힘이 후보를 고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희연 교수가 출마 선언을 한 것은 지난 3월 5일의 일이다. 여기에 모여든 인물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이재정 前 성공회대 총장을 필두로 김상곤 前 경기도교육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김중배 前 참여연대 대표, 김정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등등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다들 조희연 교수보다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런 조희연 후보를 중심으로 후보 단일화 과정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는 점. 흥미롭지 않은가.
돈키호테처럼 사라진 윤덕홍 후보
물론 ‘조희연으론 안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좌파진영에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윤덕홍 前 교육부총리다. 이 분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교육부총리직을 수행한 경력을 갖고 있다. 누구든 지나가는 사람 길을 막고 물어보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와 前 교육부총리 중에서 누가 더 교육감 자리에 적합한 것 같은가?
둘 중에서 출마를 포기한 것은 놀랍게도 前 교육부총리였다. 윤 전 부총리는 후보등록 마감일인 16일 “고심 끝에 범민주진영의 승리를 위해 후보등록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표현이 재미 있다. ‘범민주진영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경쟁력 높은 본인이 더더욱 출마를 강행했어야 하지 않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련의 상황을 바라보며 ‘거대한 풍차를 향해 무모하게 돌격했다 나가떨어진 돈키호테’가 자꾸 연상되는 건 또 왜일까.
우파후보들, 그 ‘자유’의 대가는?
한편 우파 성향의 후보들은 자유경쟁의 이점(?)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현직 교육감인 문용린 후보를 비롯해 고승덕 변호사, 이상면 서울대 교수 등이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며 경합을 벌이고 있다.
좌파 후보는 하나인데 우파 후보가 여럿이면 관건은 자연히 ‘인지도’가 돼버린다. 결과적으로 교육계 경력이 셋 중 가장 일천한 고승덕 변호사가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만약 고승덕 후보가 당선된다면 당연히 진심으로 잘 해내시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펀드매니저 경력에 국회의원 시절 교육 관련 법안발의도 별로 한 적 없는 후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육감 생각이 없었던 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후보가 그저 유명하다는 이유로 서울시교육감에 당선되는 선례(先例)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서울시교육감 선거가 교육의 전문성을 겨루는 자리가 아닌 ‘高스펙과 인지도’를 겨루는 격전장이 돼버릴 소지도 없지 않다.
한국 사회는 2010년 우파 후보 난립의 대가를 이미 한 번 뼈아프게 치른 바 있다. 당시 교육감 선거에서 곽노현이라는 좌파 단일후보에 맞선 우파 후보는 무려 6명이었다. 당선된 곽 후보는 전체 표의 34.3%를 가져갔는데, 이는 다른 6인의 득표율을 합친 수치(약 65%)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후폭풍은 거셌다. 학생인권조례, 혁신학교, 무상급식의 도미노가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예산이 한쪽으로 몰리자 교실은 안전문제와 같은 기본에 취약해졌다. 지금 우리 주변의 학교가 과연 세월호보다 안전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교육감 선거는 시장 선거보다 더 중요하다. 시장을 잘못 뽑으면 현재를 망치지만 교육감을 잘못 뽑으면 미래를 망치기 때문이다. 우파 교육감 후보는 언제까지 이렇게 ‘져도 문제 이겨도 문제’인 위험한 싸움을 계속 해야 하나?
때로는 우파에도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줄 ‘빅 브라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아무래도 음모론에 단단히 사로잡혀버린 것 같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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