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허리 디스크가 재발, 청담역 부근의 한 척추전문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입원실에 누워 있으려니 TV에서는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데 암울한 뉴스만 들리니 기분이 유쾌할 리 없었다. TV를 끄고 싶었다. 그러나 병실을 함께 사용하는 다른 환자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잠을 청해 보았다. 잠들었던 것일까? 비몽사몽(非夢似夢) 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얼굴이다. 아니 이제 그의 본명도 금방 떠올릴 수 없었다.(결국 다시 생각해 내긴 했지만…) ‘바랴그’란 별명으로 불린 러시아 마피아 두목이었다. ‘바랴그’란 바이킹의 한 분파로서 현재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이주, 원주민을 정복·융합해 키예프 공국 등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원형이 되는 국가를 건설한 고대 스칸디나비아 노르만인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 러시아 마피아에 대한 추억
1993년 초 어느 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던 필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러시아 경제사와 밤늦게까지 씨름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할 일은 전혀 없었다. 얼마 전 도둑이 들어와 살림살이를 깡그리 가져갔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빨려고 내놓은 팬티와 양말도 모두 가져갔을 정도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책을 제외한다면 입고 있던 옷 정도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미화 500달러 주고 산 일제 소니 TV다. 여성 속옷 판매원으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마련한 것으로, 당시 재산목록 1호였다. 얼마나 아까웠던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도둑들이 책장 사이에 숨겨놓은 현찰은 찾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불도 없이 맨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현관 벨소리가 들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무조건 문을 열라는 것이었다. 겁이 덜컹 났다.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전화선이 끊어져 있었다. 괴한 2명이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나무문이었던 관계로 쉽게 부셔졌다. 필자를 칼로 위협했다. 필자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다행히(?) 이들은 필자로부터 돈만 빼앗았을 뿐 신체적 위해는 가하지 않았다.
다음날 경찰에 신고했다. 러시아 경찰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당시 러시아 치안질서는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기존의 사회주의 배급 및 공급 체제는 붕괴됐으나 이를 대체할 시장경제는 아직 맹아적 형태만 보일 뿐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사회 가치 질서’의 붕괴였다. 공산주의 가치는 붕괴됐다. 특히 공산주의 가치에 대한 청년층의 반발은 “그동안 속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는 정립되지 않았다. 시장질서가 도입되고 있었으나 이들에게 시장이란 ‘약육강식의 정글’ 쯤으로만 비춰졌다. “나 이외에는 믿을 놈 없다”는 것이 당시 만연된 풍조였다.
도덕도 양심도 허위의식의 하나쯤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공산주의 시절에 교육받은 조야한 유물론과 서구로부터 잘못 도입된 ‘도덕 없는 공리주의’가 기형적으로 결합되면서 ‘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사회’로 전화돼 버린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월급마저 몇 달치 밀려 있는 러시아 경찰에게서 적극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도범 검거가 아니라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지금도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는 한국인 사업가 K모 씨의 도움으로 일단 최소한의 생존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다소 특이한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게 된다. 주선한 사람은 공산청년동맹 간부 출신의 러시아 지인이었다. 우연히 그와 한국에서의 선거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이 러시아인이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공산혁명 이후 처음으로 자유선거가 실시되기 시작했는데 선거운동 경험이 전혀 없었던 관계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무모했는지 얼굴이 불거지는 이야기지만 당시 ‘선거 전문가’를 사칭(?)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방의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바랴그를 만났다.
‘도덕으로부터 해방된 사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선거 결과는 매우 좋았다. 한국에서 주워들은 몇 가지 부정선거 기법이 적절하게 사용됐다. 상대방 선거운동원을 가장, 러시아 할머니들에게 당시 러시아에서는 매우 귀한 물품으로 여겨지던 헤드&숄더 샴푸를 나눠 준 뒤 잠시 후 다시 찾아가서 잘못 배달된 것이라고 다시 빼앗아 오는 방식 등을 사용했다. 한국정치의 나쁜 전술을 러시아로 수출한 것이었다.
자신이 지원한 후보들을 대거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 바랴그는 필자를 자신의 별장으로 초청했다. 이때 강도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범인을 잡으려는 의지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다. 며칠 뒤 바랴그 경호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라는 것이었다. 바랴그가 운영하고 있는 곡물도매회사 창고로 갔다. 러시아 청년 2명이 의자에 묶인 채 있었다. 얼굴을 보니 범인이 확실했다. 바랴그의 지시로 필자 숙소 근처의 동네 불량배들을 잡아다가 족치기 시작, 용의자를 잡아내고 자백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얻어맞아 탱탱 부은 눈들을 보니 분노보다는 안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쯤 이야기하면 바랴그를 험상궂은 거구의 러시아인으로 연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인상은 정반대다. 170cm 정도로서 러시아 남자치고는 작은 편에 속했다. 얼굴도 곱상했다. 공부만 잘하는 유럽 부잣집 도련님의 인상이었다. 소련 공산당 간부 부모 밑에서 자란 바랴그는 공산청년동맹 간부 출신이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경제학부를 나와 KGB 제1국(대외정보)에서 일했다.
소련이 붕괴돼 실업자가 된 바랴그는 공산청년동맹과 KGB 인맥을 중심으로 ‘마피아’ 조직을 건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경제 지배자의 한 사람이 됐다. 당시 나이도 많지 않았다. 30대 중반이었다. 또 매우 지적인 인물이었다. 하이에크의 <치명적 자만>을 놓고 함께 토론했던 적도 있다.
상대주의 세계관의 지배
그는 철저한 시장주의자였다. 그리고 상대주의자(relativist)이자, 실증주의자(positivist)였다. 아니 니체식의 허무주의자(nihilist)였다. 그에게 도덕이란 인간이 만든 관습에 불과했으며 선과 악이란 개념은 허구였다. 살아남느냐 죽느냐의 문제만이 중요했다. 그가 던진 질문이 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법을 지키라고? 법도 인간이 만든 것이라며? 사회질서를 위해? 내가 죽으면 그만인데, 무슨 사회질서? 사회계약? 필요하지. 우리도 약속 안 지키는 놈은 제거하니까… 그러나 제거 안 당하면 되는 것이고…”
당시 바랴그의 논리에 맞설 수 없었다. ‘절대적 도덕’이 부정당한 상태에서 그의 유물론적 세계관 혹은 극단적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반박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피아 세계에서도 그들 나름대로의 도덕과 가치가 존재한다. 배신자는 나쁜 놈이고 제거돼야 한다는 등의… 그러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덕목’(virtue)이란 이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가치(value)만이 존재할 뿐이다. 요즘 ‘virtue’와 ‘value’가 혼동돼 사용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이 두 개념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특히 니체 이후 value가 단수명사 혹은 동사가 아닌 복수명사(values)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더 그렇게 됐다. 너의 가치와 나의 가치는 다를 수 있으며 어느 것이 선이지는 알 수 없다는 상대주의적 평가가 사회, 최소한 아카데미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살인하면 안 된다는 것도 너의 가치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음도 초월한 것 같은 바랴그의 모습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바랴그도 인간이었다.
재혼한 부인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에 대한 애착은 정말 소시민적이었다. 10살 이상 연하의 부인은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교인이었는데 부인의 유일한 소원인 주일예배만큼은 꼭 지키곤 했다. 이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살인마 마피아 두목이 교회를 다닌다며 교회를 싸잡아 욕하곤 했다. 1995년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 돼 모스크바로 이주하면서 바랴그와의 만남은 뜸해졌다.
바랴그는 비행기 표를 보내면서 간혹 부르곤 했다. 적들이 많아 자신이 모스크바로 가기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외로움이 역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외로움을 나약함으로 간주하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초인이고자 했던 것이다. 바랴그와의 인연은 그의 장례식 참여로 끝났다. 호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기관단총에 벌집이 돼 죽은 것이었다.
왜 바랴그가 생각났을까? 그와의 화려한(혹은 난잡한) 파티도 생각난다.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도덕적 관념을 결여한 인물이었다. 아니 도덕 관념을 자신의 합리주의(?) 철학으로 애써 부정했던 인물이다.
요즘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면 ‘꼰대들의 넋두리’ 쯤으로 취급되기 쉽다. 아니 자신의 특정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혹은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절대적 가치와 윤리가 부정되는 ‘상대주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면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자신이 이야기한 도덕적 잣대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에 대한 두려움과 자기방어 기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 문명 자체를 거부한다면 모를까, 문명사회는 분명한 도덕과 윤리 체계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면 그 도덕과 윤리가 지탱하고 있는 문명도 함께 붕괴된다.
Victorian Value
병실에 누워 거트루드 힘멜파브(Gertrude Himmelfarb)의 <사회의 탈도덕화>(The De-Moralization of Society)를 읽었다. 힘멜파브는 미국 네오콘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의 부인이다. 대학 시절 트로츠키 그룹 서클에서 만난, 평생을 함께 한 영원한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이다. 힘멜파브는 이 책을 통해 영국 보수주의의 중심 개념의 하나인 ‘빅토리아 가치’(Victorian Value)에 대해 논한다.
일찍이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는 “빅토리아 가치는 영국이 위대할 때의 가치”라면서 ‘빅토리아 가치’의 회복을 주장한 바 있다. 근면, 자조, 청결, 봉사와 같은 빅토리아 가치가 사회의 기둥으로 역할을 할 때 개인과 사회가 번영했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는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복음주의(Evangelicalism)가 공존, 아니 융합됐던 시대이다. 얼핏 보면 두 가치관은 철학적으로 결합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결합돼 있던 것이 ‘빅토리아 가치’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가치(value)가 아니라 덕목(virtue)이다. 그러나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가 말한 ‘고대에 대한 현대의 반란’(revolt of the 'Moderns' against the 'Ancients') 이후 덕목(virtue)란 용어는 현대인의 언어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
빅토리아 시절 영국에서 ‘젠틀맨’(gentleman)이란 개념이 정립됐다. 과거 귀족사회에서 책임을 지는 존재는 소수의 특권화된 귀족(noble) 뿐이었다. 젠틀맨이란,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정신적 귀족화’를 이뤘을 때 만들어진 개념이다. 도덕에서의 상향평준화를 이룬 것이다. 이러한 상향평준화는 부르주아에만 머물지 않았다.
영국 노동계층에도 확산돼 갔으며 이 과정에는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도덕적 시민층’(moral citizenery)의 존재가 영국을 건전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고전적 자유주의’가 건강성을 띨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빅토리아 가치와 결합돼 있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가치가 전제하는 도덕적 기준은 의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가치와 결별하고 ‘상대주의’와 결합한 ‘자유주의’(liberalism)는 영국처럼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속에서 분할·점령당하든지 아니면 미국처럼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좌익 이데올로기로 변질돼 버린 것이다.
도덕과 가치문제, 이제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바로 이 문제야말로 보수주의자들의 핵심 명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도덕이 과거 유교적 도덕관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이 있다.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과 같은 가치는 절대적인 가치라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요즘 ‘힐링’(healing)이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힐링’ 문제를 좌파들에게 넘겨준 채 팔짱만 끼고 있다. 이 ‘힐링’의 문제를 도덕 회복운동과 함께 우리 보수진영에서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황성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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