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 내의 우크라이나군 기지를 모두 장악했다고 러시아군이 지난 3월 26일 발표했다. 이미 이틀 전인 24일 우크라이나군 철수 명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크림반도 장악은 시간문제였다. 이로써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은 일단 완료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진영이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으나 별로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효력이 의심스러운 경제 제재 조치 이외에는 별다른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크라이나 자신조차도 러시아군에 맞서 크림반도를 사수할 능력은커녕 의지도 없어 보인다. 심지어 ‘친서방 서부파’가 주도하는 현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반도가 러시아 수중에 넘어간 것을 내심(?) 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 크림 사수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러시아계가 주민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떨어져 나갈 경우 향후 선거에서 ‘친서방 서부파’가 ‘친러 동부파’를 쉽게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친러 동부파’에게 몰표를 몰아주던 크림자치공화국의 이탈로 인해 박빙의 표 대결을 보여주던 ‘친서방 서부파’와 ‘친러 동부파’의 균형이 무너지고 ‘친서방 서부파’의 우위로 굳어지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바라보면서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크림반도는 러시아로 편입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3월 16일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의 크림반도 주민들이 러시아 편입을 찬성한 이상,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은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이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크림반도가 원래 러시아 땅이었으며 우크라이나로 편입된 것은 1954년 러시아가 행정적 편의에 의해 같은 소연방 소속이던 우크라이나 관할로 넘겨줬기 때문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1990년대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피어린 유혈 민족·영토 분쟁을 목격한 필자는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다. 오히려 1938년 나치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이 떠오른다.
1938년 체코 영토였던 주데텐란트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독일계였다. 이에 나치 독일은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요구했다. 유화정책으로 히틀러를 달래기에 급급했던 당시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뮌헨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독일에게 떼어 주는 것으로 전쟁을 방지해 보려 했다. 그러나 역사적 결과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진행됐다.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됐으며 결국 이듬해인 1939년 9월 폴란드를 전면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민족·영토 분쟁의 중심이 돼 온 지역이다. 흑토 평야지대로 많은 민족들의 통로가 됐기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등록된 민족 수만 하더라도 130여개에 이른다. 크림반도만 하더라도 역사적 정통성만을 따진다면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도 아닌 ‘크림 타타르인’의 땅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크림 타타르인들도 외지인이다. 크림 타타르인들이 오기 전부터 크림반도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카라이임’족(族)과 ‘크림차크’족(族)이 소수민족으로서 크림반도에 살고 있다.
1954년 이후에나 러시아人 크림반도 다수파 돼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장악한 것은 1783년이다. 그러나 러시아인이 크림반도 인구의 다수파가 된 것은 1954년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크림 타타르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크림반도 인구의 다수파였다.
이러한 인구 비율 역전이 일어나게 된 첫 번째 배경은 1944년 크림 타타르인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사건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부(?) 크림 타타르인들이 나치 독일에 협력했으며 크림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중요시한 스탈린이 크림 타타르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추방해 버린 것이다.
두 번째 배경은 1950년대 이후 흑해함대 기지로서 크림반도의 군사기지화가 진행되면서 러시아군과 그 가족들이 대거 이주해 왔으며, 소련 정부가 따뜻한 크림반도에 해변 휴양지를 적극 개발해 소련 공산당과 러시아군 출신 은퇴자들에게 분양해 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림반도 거주 러시아인 가운데 크림반도 태생은 1/3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벨라베즈 협약(Belavezh Accords) 체제의 붕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의 대표는 소연방 체제의 해체에 대해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인근에 위치한 벨라베즈에 모여 소연방 해체에 대해 합의했다. 이때 합의한 내용의 기본 골자가 구소련 연방을 구성하던 15개 국가들의 주권(sovereignty)과 영토적 통합성(territorial integrity)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구소련 지역이 워낙 복잡다단한 역사적 민족 및 영토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영토의 현상 유지를 합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달 21일 조지아(그루지아)를 제외한 구소련 국가들이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모여 ‘벨라베즈 협약’을 승인하는 ‘알마티 프로토콜’에 사인함으로써 소연방이 해체되고 이른바 ‘1991년 유라시아 체제’ 혹은 ‘벨라베즈 협약 체제’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벨라베즈 협약’은 강대국 소련으로의 복귀를 염원하는 러시아인들에게는 치욕의 단어이기도 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직전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베르사유 체제’를 굴욕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러시아는 ‘벨라베즈 협약’의 준수를 약속해야만 했다. 체첸사태 등 러시아연방 자체도 붕괴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를 넘기고 ‘근육’을 회복한 러시아는 ‘벨라베즈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신호가 2008년 조지아 전쟁이다. 독립 혹은 러시아로의 편입을 원하는 남오세티아를 지원, 조지아를 침공한 것이었다. 현재 남오세티아는 사실상 조지아로부터 독립한 상태이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러시아는 ‘벨라베즈 체제’에 정면 도전하지는 않았다. 남오세티아를 러시아로 편입시키거나 그렇게 하겠다고 주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벨라베즈 체제’가 붕괴되면 구소련 지역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크라이나만 하더라도 크림반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러시아계 혹은 러시아어 사용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부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적 통합성이 위기를 맞게 된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외신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나토는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다. 몰도바공화국의 트란스니스트리아(프리드네스트로비에)의 분리주의자들은 들썩이고 있으며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러시아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카자흐스탄 북부의 운명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카자흐스탄의 주요 자원이 북부지역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경우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즉 얽히고설킨 해묵은 유라시아 민족·종족 갈등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민족-종족 갈등의 ‘판도라의 상자’열려
어찌 보면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것이었다. 1996년 우크라이나 독립 5주년을 맞이해 발간된 알렉세이 즈베료프(Алексей Зверев)편(編)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Россия, украина, Белоруссия)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다.
18년 세월의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밀봉해 놓았던 문제가 다시 튀어 나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비엔나 체제’에 의해 불완전하나마 상대적으로 긴 기간의 평화가 유지됐다. 그리고 ‘비엔나 체제’의 붕괴는 유럽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다.
핵의 대칭 속에서 ‘냉전체제’는 “열전(hot war)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평화체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로 ‘냉전체제’가 붕괴됐다. 예상됐던 혼란은 ‘벨라베즈 체제’에 의해 일단 봉합됐다. 체첸, 조지아,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지에서 내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유고 사태와 같은 극단적 참변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벨라베즈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휴가 갔던 유라시아 역사”가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 지정학 전략가 조지 프리드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지만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독일이 2차 세계대전이라는 리턴매치를 벌인 것처럼 1991년 일단 붕괴됐으나 지역 패권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가 재기전을 벌일 것이라고 일찍이 예견(?)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는 슬라브어로 우(у)라는 장소를 나타내는 전치사와 크라야(края)라는 ‘변방’을 뜻하는 명사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직역하면 “변방에”란 뜻으로, ‘변방국가’란 의미다. 동슬라브족의 역사는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에서 시작됐다. 러시아도 그 기원을 키예프 공국에서 찾는다.
그런데 어떻게 ‘변방’이 됐는가? 현재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아인을 경멸할 때 ‘하홀’(хохол)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변발’(髮)이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인을 욕할 때 ‘변발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동슬라브족이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등 3개 민족으로 나눠지게 된 것은 13세기 몽골 침입 때문이다. 몽골군이 직접 점령했던 지역이 우크라이나이고, 몽골이 간접 통치한 지역이 러시아다. 벨라루스는 몽골군이 들어가지 못했던 지역이다.
몽골 침입으로 나뉜 東슬라브족
몽골의 침입으로 동슬라브족은 크게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중심으로 한 모스크바 세력이다. 이들은 친몽골 정책을 취하면서 내부 실력 양성노선을 취한다. 몽골도 모스크바가 추운 북쪽에 치우쳐 있던 관계로 다루가치를 파견, 간접통치하는 데 만족한다.
바로 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러시아 제국이 형성된다. 몽골과의 연합 속에서 스웨덴·독일 등 서방세력을 몰아내고 러시아 제국을 일궈 낸다. 그리고 훗날 몽골이 몰락하자 몽골세력을 몰아내고 유라시아 대륙의 패자(覇者)로 등장한다. 반면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인 칼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영주였던 다닐로 로마노비치는 모스크바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서구 세력과 연합해 反몽골 항쟁을 거듭한 것이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지역은 서구 대(對) 몽골·타타르 유목민 간의 주전쟁터가 돼 버린다. 그리고 다닐로가 죽은 뒤 칼리치아-볼히니아 공국도 곧 멸망하고 우크라이나 땅은 14세기 중반부터 폴란드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17세기에 러시아에 편입되게 된다. 약 400년 동안 분리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독립적 민족이 돼 버린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형성할 만한 자연적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옥한 흑토지대와 남부 초원지대에는 드네프르강(江) 이외에는 자연적 방어선도 없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수많은 농경 민족이 거주하고 유목 민족이 지나가는 지역이 됐다. 경계선이 모호한 채 수많은 민족들이 섞여 살아 온 땅인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는 전통적인 유럽의 곡창지대로 2011년 기준 세계 곡물 수출 3위 국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경제 사정은 형편없다. 러시아를 부러워할 정도. 우크라이나의 주력 수출품은 ‘여자’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우크라이나 여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웃음과 몸을 팔고 있다. 유럽이나 두바이 등지에서 러시아 아가씨로 불리는 여인들의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여성이다. 심지어 러시아 모스크바 유흥가에도 상대적으로 ‘싼 값’의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대거 진출해 있는 상태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도움과 러시아의 약속을 믿고 핵을 포기했다.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고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하자 서방세계는 우크라이나를 잊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된 지구촌 사회’에서 경제적 협력과 경쟁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와 영토는 살아 있었다. 세계사의 운명이 크림반도에서 바뀐 적이 여러 번 있다.
첫째는 19세기말 크림전쟁이다. 러시아의 남하가 터키와 연합한 서방세력에 의해 저지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우리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형성시킨 얄타회담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이제 다시 크림반도가 세계사의 갈림길의 중심에 서 있다. 이러한 문제를 ‘먼 나라 이야기’로만 간주하고 국내 정쟁만을 일삼는 우물안 개구리들의 처지를 언제 벗어날지 왠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황성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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